재회
우리 팀 구원투수들은 그 후 7회에 베시아, 8회에 허드슨, 9회에 트라이넨이 각각 1이닝씩 무실점으로 막아 나의 4승이 확정되었다.
나는 이로써 메이저리그 데뷔 이래 4승 0패에 ERA 1.29 WHIP 0.45를 기록하는 좋은 출발을 보였다.
이제 정규시즌 남은 등판은 두 차례 정도.
로버츠 감독의 결정에 따라 한 게임은 건너뛸지도 모른다.
만일 바로 내일 포스트시즌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샌디에고와 디비전 시리즈 결정전을 갖게 된다.
샌디에고에는 김하성 선배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시즌 마지막에 어깨 부상을 당해 수술대에 오르고 말았다.
이번 시즌을 끝내면 FA가 되는 하성 선배로서는 여러모로 아쉽게 된 셈이다.
나 역시 지금은 1년 차로 최저연봉인 57만 달러를 받고 있으나 올 시즌이 끝나면 정식 에이전트를 선임하며 본격적으로 연봉조정 협상 대상자가 될 때를 대비할 생각이다.
지금 이대로의 성적만 유지한다면 3년차가 되는 내후년에는 상당한 연봉 인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가서의 문제이고 지금 당장은 다가올 포스트시즌에 대비해야 한다.
샌디에고는 루이스 아라에즈, 주릭슨 프로파, 타니스 주니어, 매니 마차도 등 요주의 타자들이 즐비하다.
샌디에고가 이번 시즌 내내 다저스를 위협하며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한 데는 타자들의 공도 물론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새로 구축한 탄탄한 선발진의 역할이 컸다.
후안 소토 트레이드 때 데려온 마이클 킹을 비롯해서 다르비슈, 딜런 시스 등의 선발진, 그리고 시즌 막판에 영입한 태너 스콧 등의 불펜이 막강한 투수력을 보여주고 있다.
포스트 시즌은 정규 시즌과 같은 야구경기지만 운영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우선 포스트 시즌에는 5선발이 필요 없다.
1차전에 등판한 1선발이 사흘만 쉬고 4차전에 다시 나올 수도 있다.
심지어 상대팀의 강력한 필승조를 5회부터 맞이할 수도 있고 100마일을 던지는 마무리 투수가 7회부터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시즌에서는 만만한 투수라는 건 없다.
각 팀의 최고 투수들만 상대해야 한다.
특히 팀내 원 투 펀치가 강한 팀일수록 포스트 시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밖에 없다.
다저스는 알려진 것처럼 선발진이 붕괴된 상태고 샌디에고는 마이클 킹, 다르빗슈, 딜런 시스라는 강력한 1-2-3 선발이 건재하다.
투수진만 보아서는 샌디에고가 유리하다.
타선도 다저스는 오타니, 베츠에 이어 프리먼이 나와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리먼은 발목 상태가 좋지 않다.
나와서 치기야 하겠지만 제대로 달릴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이래저래 로버츠 감독의 머리가 아프게 생겼다.
선발투수 로테이션도 누가 1선발로 나설지 아직 결정이 안 되어 있다.
현재로선 플래허티가 1선발, 야마모토가 2선발로 나설 것 같은데 그 다음은 누가 마운드에 설지 미지수다.
나 역시 포스트시즌에 나갈 수 있을지 또 던진다면 언제 던질지 아직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상태다.
포스트 시즌의 또다른 변수는 바로 운동장의 분위기다.
포스트 시즌은 정규 시즌과 경기장의 열기 자체가 다르다.
특히 원정 경기를 할 때 홈 팀의 일방적인 응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다.
나 같은 루키는 더욱 그렇다.
끝없이 질러대는 홈 관중의 소음을 어떻게 이겨낼지 아직까지 경험이 없어서 잘 알 수가 없다.
정규 시즌 마지막에 우리 팀은 샌디에고와 3연전을 갖게 되는데 만일 승차가 많이 벌어져 있으면 우리 주력 투수들은 샌디에고 전에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4승을 올린 그날 밤, LA 지역의 각 TV 방송에서는 스포츠 하이라이트로 내가 던진 장면을 반복해서 내보냈다.
주로 삼진으로 타자를 돌려세우는 장면이 많았는데 출연한 패널들은 나의 변화구에 찬사를 보냈다.
“슬라이더와 스플리터가 환상적입니다. 저 어린 선수가 베테랑 타자들을 현혹시키는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던져요. 전에 다저스에 강속구와 능숙한 변화구를 함께 장착한 저런 유형의 투수가 있었나요?”
“무엇보다도 바깥쪽 코너를 놓치지 않는 게 너무 인상적입니다. 97마일이나 98마일의 빠른 공이 아웃 사이드 코너에 들어가면 웬만한 타자들은 배트를 내지 못하게 되죠.”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커맨드입니다. 포수가 요구한 구종을 정확한 위치에 집어넣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이어서 포수 스미스가 인터뷰하는 장면도 방영되었다.
“인성은 배짱이 두둑한 투수예요. 아무리 강한 타자가 나와도 주눅 들지 않고 자기 공을 던집니다. 공의 변화도 다양해서 웬만한 변화구는 다 잘 던집니다.”
이번엔 로버츠 감독.
“오늘 6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했는데 포스트 시즌 등판을 위해서 일찍 내렸습니다. 인성이 던지는 것을 보면 커쇼의 전성기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나는 TV를 보면서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는 스미스와 로버츠 감독이 고마웠다.
내 모습이 커쇼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다고?
루키투수에게 그 이상의 찬사가 있을까?
내가 숙소에서 TV를 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내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다저스 동료들이나 감독님일까 생각하며 전화기를 보니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잠깐 받을까말까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헬로우”
내가 영어로 응답하자 전화기 저편에서는 ‘여보세요’라고 한국어로 말했다.
더구나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그렇게 물었지만 내게는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 다경이야. 인성아.”
나는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어? 다경이?”
“그래, 우리 고등학교 때 잠깐 만났던 윤다경.”
우리 완전히 헤어진 줄 알았는데 웬일이지?
나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다경의 전화에 응답했다.
“어, 다경아, 웬일?”
“나 지금 미국에 있어. TV를 보는데 네가 나오길래 그냥 전화해 봤어. 옛날 번호 그대로네.”
“응, 착신되게 해 놨어. 근데 미국은 어떻게...?”
“아빠가 미국 지사로 발령 나면서 나 보고 같이 가재. 그래서 우리 학교랑 학점 제휴가 되어 있는 UCLA에서 공부하려고 왔어.”
그러고 보니 다경은 나보다 한 살 위여서 벌써 대학교 3학년이 될 나이다.
나중에 아는 친구로부터 그녀가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너 미국에서 스타됐더라. 잘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뜰 줄 몰랐는데”
“아직 멀었어.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잘 돼 보일 뿐이야.”
“아냐, 너 한국에서도 엄청 유명해. 너 시합 나오는 날엔 한국에서 생중계 해주고 언론에 매일 나와.”
“아, 그래?”
나는 약간 쑥스럽게 웃었다.
“너 지금 어디 사니? 이렇게 통화됐으니 한 번 얼굴이나 보자. 우리 너무 찝찝하게 헤어졌잖아?”
“그래야지. 난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아. 넌 집을 어디에 구했어?”
“응, 아빠 회사가 다운타운이라 그 근처에 집 하나 렌트했어.”
“그럼 가깝구나. 내일은 내가 쉬는 날이니까 내일 나갈 수 있는데 내일은 어때?”
“그래. 학교 구경도 할 겸 나 데리러 올 수 있어? 내비에 1310 Law Building 이라고 치면 내가 수업 듣는 법대 건물로 올 수 있어. 두 시에 수업 끝나니까 그 시간에 와.”
다경은 미국에서 법률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과거 생각이 났다.
사실 다경이를 좋아하긴 했으나 다른 남자랑 다정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고 인연을 끊자고 했던 나 자신이 왠지 옹졸하게 느껴졌다.
그날 나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길을 생각해 보니 지금도 가슴이 아련했다.
다경이랑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다시 시작해보자고 할까.
걔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나?
만나면 다시 예전같은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다경이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려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차를 몰고 UCLA로 향했다.
복잡한 대학가 거리를 지나자 학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다경이 알려준 주소를 내비에 입력하고 대학 내 여러 건물이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학교 내에는 가로등에 UCLA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어디를 가나 넓게 펼쳐진 잔디밭이 인상적이었다.
잔디밭 위에는 누워 잠을 자는 학생들, 책을 읽는 학생들,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남녀 학생들이 보여 대학 생활의 낭만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학교 건물 앞에 바로 차를 세우지 못하고 근처 주차장에 대고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벽돌색 계단을 여러 차례 오르자 다경이 기다리는 법대 건물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교내에서 해당 건물을 찾느라고 시간을 지체해 벌써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다경이 멀리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등학생 때는 단발머리였는데 어느 새 머리도 제법 길어있었고 세련된 컬을 넣어 제법 숙녀 티가 나는 모습이었다.
“찾아오느라고 힘들었지. 우리 학교 보여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거야.”
“응, 덕분에 캠퍼스 구경 실컷 했다. 무슨 학교가 이렇게 크냐?”
“캠퍼스 넓지? 나도 처음에 진짜 애먹었어. 아참 점심 먹었어? 우리 카페테리아로 가서 뭐 좀 먹을까? 나도 배고프거든.”
나는 다경이 제안에 따라 학교 카페테리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학교의 상징처럼 보이는 커다란 곰 동상이 보였다.
오랜만에 다경과 함께 걸었더니 고등학교 시절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걸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부는 잘 돼? 어렵지 않아?”
나는 걸으면서 다경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어렵지. 처음부터 다 영어로 해야 하잖아. 그래도 할만은 해.”
“너는 그럼 변호사 같은 게 되고 싶은 거야?”
“응,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변호사 자격증 따고 싶어.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하고 싶은 일? 그게 뭔데”
“스포츠 에이전트”
“응? 스포츠 에이전트? 정말? 그거 너무 의왼데.”
“내가 스포츠 에이전트가 되면 너를 첫 고객으로 삼을까?”
다경이 농담을 하며 웃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 예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우리는 어느 새 카페테리아에 도착했다.
안에는 뷔페식으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다경이 말에 따르면 UCLA에는 8개의 식당이 있는데 그 중 4개가 뷔페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간 곳은 빵부터 샐러드, 계란, 핫도그, 피자 등 여러 음식들이 놓여져 있었다.
다저스를 따라 다니며 먹은 특급 호텔 뷔페보다야 못하지만 이것 역시 나름 먹음직스러웠다.
나는 우선 샐러드와 피자를 접시에 담아 의자에 앉았다.
다경은 샐러드를 듬뿍 담아왔다.
“지난 번에 우리 오빠 만난 적 있지?”
다경이 한참 음식을 먹더니 이런 말을 던졌다.
“너네 오빠? 그게 누군데? 기억에 없는데”
“우리 오빠는 널 만났다고 그러던데”
“그래? 누굴까?”
“왜 지난 번 너 승부조작 사건 때문에 조사받을 때 한국에서 경찰서 서류 갖다 준 사람 있잖아. 윤다운이라고. 그게 우리 오빠야.”
그러고 보니 KBO 직원이라는 한 남자가 찾아와 서류를 건네주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을 처음 본 순간 누굴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경이 일 줄이야.
“그래, 생각나. 윤다운씨가 네 오빠셨구나.”
“응. 우리 오빠도 야구하다가 프로에 지명이 안돼서 그냥 KBO 직원으로 취직했어. 총재님이 예쁘게 봐주셨던 모양이야.”
“아, 중학교나 고등학교 코치 같은 자리도 있었을 텐데 왜?”
“자기는 이제 필드보다는 행정 쪽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대.”
“그렇구나.”
“그나저나 너 그 사건은 어떻게 돼가니?”
“얼마 전에 MLB 사무국에서 조사를 나왔어. 묻는 말에 다 대답하고 필요한 서류 다 주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 잘 되겠지 뭐.”
“응, 한국에서도 이제 그 얘긴 더 이상 안나오니까 잘 마무리 될 것 같아.”
“그래야지. 사실 그 문제 때문에 은근히 신경 쓰였거든. 팀에서도 좀 의심스런 눈으로 본 것도 사실이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 때 느닷없이 내 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역시 모르는 번호였다.
내가 받을까 말까 망설이니까 다경이가 받아보라고 재촉했다.
나는 마지못해 휴대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헬로우”
저쪽에서 높은 하이톤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나 LA 타임즈의 존 힐 기자입니다.”
존 힐 기자라면 가끔 우리 팀에 와서 나를 취재하던 젊은 스포츠 담당기지다.
“다름 아니라 인성 선수 단독 인터뷰 좀 할까 해서요.”
“인터뷰요?”
나는 인터뷰란 말을 듣자 겁이 덜컥 났다.
또 무슨 일이 있나?
나는 다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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