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불살조 (殺佛殺祖)
3회 들어 메츠는 하위타선부터 시작되었다.
8번 베이더, 9번 알바레즈, 그리고 아까 나에게 안타를 쳤던 1번 린도어 모두 나의 패스트 볼과 변화구에 힘없는 타구만 날리고 셋 다 물러났다.
이번 메츠와의 대결에서도 3회까지는 1회에 맞은 안타 하나만 빼면 무실점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게임을 중계하는 NBC의 캐스터는 내가 메츠 타선을 3회까지 1안타, 무실점으로 막자 진심 어린 찬사를 쏟아냈다.
“인성 장 선수는 나올 때마다 노히터의 기대를 하게 만드는군요. 오늘도 예외 없이 3회까지 안타 하나만을 허용하고 호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 선수 등판하면 보는 재미가 있어요.”
내가 등판할 때마다 노히터를 기대하게 된다?
사실 그랬다.
언제부턴가 안타 하나 맞지 않고 게임을 끝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구속도 시속 100마일이 나오니까 앞으로는 그런 빈도가 더 잦아질 것이다.
오늘도 로버츠 감독이 몇 회까지 던지게 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3회 정도는 더 완벽하게 막을 자신이 있었다.
4회가 시작하기 전 로버츠 감독이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타선이 한 바퀴 돌았으니까 구종도 바꾸어 던져보도록”
“변화구를 많이 섞어볼까요?”
“그렇지. 스미스가 잘 리드해 줄 거야. 대개의 투수들이 직구가 잘 들어가는 날에는 직구에 많이 의존하거든. 그러다가 맞는 걸 많이 봤어.”
“네, 알겠습니다.”
나는 덕아웃에서 나오면서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4회 메츠는 다시 2번 타자부터 시작되었다.
마크 비엔토스.
나는 이 오른손 타자에게 패스트 볼을 뿌리면서 시작했다.
99마일이 나왔다.
그냥 스피드만 99마일이 나오는 게 아니고 공의 테일링이 심하게 걸리는 지저분한 공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타자는 움찔 하면서 공에 손을 대지 못했다.
스미스가 공을 건네주면서 매우 만족스럽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자, 하나 더”
스미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2구도 똑같은 공을 뿌렸다.
이번에는 98마일이 나왔다.
하지만 움직임이 아까 만큼 크지 않았다.
게다가 코스도 홈 플레이트를 벗어나 볼 판정을 받았다.
매번 공에 가해지는 압력이 달라지므로 공의 움직임에도 차이가 생겼다.
두 번 연속 직구를 던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변화구를 던져야 했다.
스미스로부터 슬라이더 사인이 도착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슬라이더를 던졌다.
그런데 공이 충분히 바깥쪽으로 나가지 못하고 가운데로 몰리고 말았다.
비엔토스가 몰린 공을 놓치지 않고 받아쳤다.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였다.
두 번째 안타이자 이번에는 선두타자 출루다.
선두타자가 나가면 다양한 작전이 나올 수 있다.
단독 도루도 할 수 있고, 번트도 가능하며, 때에 따라서는 히트 앤 런 작전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비엔토스는 정규시즌 내내 도루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도루 가능성은 제로라고 봐야 한다.
남은 건 두 개.
번트 아니면 히트 앤 런이다.
하지만 다음 타자가 3번을 치는 니모다.
3번 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히트 앤 런도 나오기 힘든 작전이라고 판단했다.
만일 타자가 헛스윙을 하면 주자가 2루에서 죽을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 타석은 그냥 강공으로 나올 것이다.
3번 타자 브랜든 니모가 타석에 들어왔다.
강공이라면 가능한 한 낮게 떨어지는 싱커성 볼을 던져 더블 플레이를 유도해야 한다.
니모가 왼쪽에 서서 타석을 고르고 있었다.
자세로 보아 역시 강공으로 나설 모양새다.
나는 1구를 몸쪽으로 찔러 타자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니모는 나의 초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직구에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분명 슬라이더 같은 변화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직구를 더 던지고 싶었으나 로버츠 감독의 말대로 직구에만 의존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체인지업을 던져보기로 했다.
제2구.
니모가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쳐서 1루와 2루 사이의 공간을 갈랐다.
연속안타였다.
아차 싶었다.
나는 새 공을 받아들고 두 손으로 공을 비비며 그냥 강속구로 갈 걸 체인지업을 괜히 던졌다고 후회했다.
다음 타자는 메츠의 중심 타자 피트 알론조.
알론조가 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가 타석에 들어오면 마치 커다란 야생곰을 만난 것처럼 위압감이 들었다.
‘걸리면 넘어 간다. 그의 배트에 걸리지 않는 공을 던져야 한다.’
그럼 가운데 높은 포심 패스트볼.
강타자들이 좋아하는 눈높이의 패스트 볼로 유혹해 보기로 했다.
나는 세트포지션에 들어가 1루와 2루 주자를 눈으로 체크했다.
정상적인 리드 폭이다.
제1구.
99마일 짜리 높은 패스트 볼.
알론조의 배트가 크게 헛돌았다.
다행히 작전이 성공했다.
나의 빠른 공을 그의 배트 스피드가 따라잡지 못했다.
알론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공을 맞추지 못한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무릎 높이의 낮은 공을 던지면 그의 배트가 얼떨결에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2구로 스플리터를 던져 보기로 했다.
직구처럼 날아가던 공이 무릎 약간 위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알론조가 직구라고 판단하고 스윙을 시작했으나 떨어지는 공을 어설프게 따라가다가 힘없이 공의 윗 둥만 건드렸다.
공이 내 앞으로 굴러왔다.
나는 재빨리 마운드에서 내려가 공을 잡아 2루로 송구했다.
2루에서 아웃.
내 공을 받은 유격수 토미 에드먼이 다시 1루로 뿌렸다.
더블플레이가 깔끔하게 완성되었다.
다저스 스타디움의 관중들이 함성을 질렀다.
졸지에 투 아웃에 주자 3루가 되었다.
이제 아웃 카운트 하나만 더 잡으면 이번 이닝도 무사히 무실점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알론조가 허무한 듯 한숨을 푹 내쉬고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다음 상대는 스탈링 마르테였다.
결코 만만치 않은 타자였지만 나는 왠지 자신감이 있었다.
초구 포심 패스트 볼.
98마일이 나왔다.
몸 쪽을 파고드는 스트라익이었다.
마르테가 잠시 타석을 벗어난 후 연습 스윙을 몇 차례 하고 다시 들어왔다.
2구도 패스트볼.
딱 하는 소리가 나며 공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맞추기는 맞췄지만 공의 밑둥을 때린 모양이었다.
하늘을 날던 공이 센터 쪽으로 긴 포물선을 그리며 힘없이 떨어졌다.
오늘 센터를 보던 키케가 여유 있게 한 손으로 잡아냈다.
이렇게 4회도 무실점으로 막았다.
위기 다음에 찬스가 온다고 했던가?
내가 4회초 위기를 무사히 넘겨서인지 4회말 다저스의 타선이 무섭게 폭발했다.
오늘따라 포크볼이 밋밋하게 떨어진 센가를 무차별 폭격하면서 대거 5점을 얻어냈다.
메츠는 투수를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뒤를 이어 나온 투수는 리드 개릿이었다.
그러나 개릿도, 또 그의 뒤에 나온 데이빗 피터슨도 봇물 터지듯 터진 다저스의 맹공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저스는 이날 9점을 내며 메츠 투수진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5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지명타자 윙커, 대타로 나온 이글레시아스, 그리고 맥닐까지 세 타자를 모두 삼진 처리하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와 올린 5번째 승리였다.
이제 25팀만 상대로 더 이기면 나의 목표는 이루어진다.
데뷔 1년 차에 5승을 했으니까 25승을 더하려면 풀타임으로 서너 시즌은 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말이 쉽지, 25승을 더 올리는 게 호락호락한 일인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강팀도 얼마나 많은데.
당장 필라델피아 필리스나 휴스턴 애스트로스, 아틀란타 브레이브스, 밀워키 브루어스, 볼티모어 오리올즈, 시애틀 매리너스 등 이기기 어려운 팀들이 즐비하다.
이런 팀들은 스토브 리그에서 좋은 선수들을 영입해 내년 시즌에는 더욱 강한 팀으로 변모할 것이다.
게다가 겨우 내내 나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해서 나의 약점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 아닌가.
메이저리그 팀에는 상대 투수만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여럿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투수들의 영상을 수십 번, 수백 번이고 반복해서 보면서 그들이 가진 습관이나 약점 등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만 해도 전에 한국에서 주호성 감독이 찾아냈다던 나의 쿠세를 이곳 메이저 전문가들이 찾지 못하라는 법이 없다.
다저스에서도 영상 분석팀이 경기 전 상대팀의 선발 투수들을 철저히 분석해 보고서를 내지 않던가.
커쇼가 말한 대로 메이저리그는 정글이다.
약점을 보이는 순간 잡아먹히게 되어 있다.
이날 메츠와의 챔피언쉽 시리즈 1차전을 승리하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핸드폰을 켜보았더니 다경이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얘기 들었어? 주명찬이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했대. 얼핏 듣기로는 샌디에고 파드레스라고 하던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한번 확인해 봐.’
주명찬이 메이저리그로 온다고?
아니, 주명찬은 국내 프로야구 구단과 계약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얼른 핸드폰으로 한국 뉴스를 검색해 보았다.
이런저런 소식 사이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주명찬의 신분조회를 의뢰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신분조회를 의뢰했다는 말은 어느 팀인지는 몰라도 영입 의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에는 올라와 있지 않지만 다경이가 샌디에고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KBO에서 일하는 오빠로부터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게 정확한 정보일 것이다.
주명찬이 샌디에고로?
샌디에고는 LA와 같은 디비전이기 때문에 한 시즌 최소 13경기를 치러야 한다.
그러다보면 주명찬이 선발로나 대타로 나오는 경기에 나와 마주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주명찬은 한국에서부터 유난히 나에게 강한 면모를 보여 왔다.
어쩌면 남들이 모르는 나의 약점에 대해 알고 있을지 모른다.
더구나 아버지 일로 인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 아닌가.
주명찬이 미국으로 온다면 겁은 나지 않지만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그날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주명찬과 대결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상상은 고스란히 꿈속으로 이어졌는데, 꿈속에서 주명찬은 나의 99마일짜리 강속구를 받아쳐 담장을 넘겨버렸다.
그가 다이아몬드를 돌며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는 모습이 꿈이 아니라 정말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 같이 생생했다.
나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찬물을 마셨다.
그리고 머리맡에 놓여진 핸드폰으로 다시 한 번 뉴스를 검색해 보았다.
‘<속보> 주명찬, 샌디에고 파드레스와 3년 계약’
다경이의 말이 현실화되었다.
알고 보니 한국 프로팀과 정식 계약을 하지 않고 메이저리그 팀의 오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년 시즌부터는 이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주명찬이 메이저에 오면 그냥 메이저리그 타자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상대하면 될 일이다.
주명찬에게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불가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逢佛殺佛),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일 것이며(逢祖殺祖),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라고(逢羅漢殺羅漢) 한 것처럼 나는 주명찬을 만나면 주명찬을 죽이면 될 일이었다.
다음 3차전은 뉴욕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되었다.
다저스의 선발은 플래허티, 메츠의 선발은 피터슨이었다.
뉴욕의 열기는 확실히 LA와 달랐다.
날씨 탓인가.
따뜻한 지방인 LA 관중들이 느긋하고 온화한 반면 추운 지방인 뉴욕의 관중들은 열광적이고 극성맞았다.
구호를 합창하는가 하면 응원가 같은 것도 따라 불렀다.
안타가 하나 나와도 지르는 함성의 강도가 달랐다.
뉴욕 야구팬들은 만일 메츠와 양키즈가 승리하면 뉴욕 연고팀들끼리 월드 시리즈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도 하고 있었다.
이날의 경기만 놓고 보니 그런 기대를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메츠의 타자들은 다저스 선발 플래허티를 초반부터 두드려 3회까지 무려 8점을 뽑아냈다.
일찌감치 승부가 기운 것처럼 보였다.
플래허티의 뒤를 이어 나온 허니웰도 메츠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4점이나 더 실점했다.
이날의 최종 스코어는 12대 6.
다저스의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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