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전화

플래허티는 1회 초를 무사히 넘기는 데 성공했다.
소토가 포볼로 걸어 나갔지만 저지가 플래허티의 너클 커브에 터무니없는 스윙을 하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만일 저지가 시리즈 내내 저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면 다저스의 우승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저지 역시 본인의 그런 모습에 좌절감이 드는 듯 했다.
이어 나온 스탠튼은 다저스의 유격수 토미 에드먼의 에러로 출루에 성공해 2사 1,2루가 되었으나 뒤이어 나온 치좀 주니어가 2루수 땅볼로 아웃되면서 찬스는 무산되었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은 다저스도 마찬가지였다.
1회 말 오타니와 베츠가 범타로 물러난 후 프리먼이 3루타를 치며 관중을 잠깐 흥분시켰으나 이어 나온 에르난데스가 콜의 강속구에 막혀 유격수 정면 라인드라이브를 치고 아웃되면서 이닝이 마무리되었다.
2회도 플래허티의 투구가 빛났다.
안토니 리조에게 단타를 맞은 그는 안토니 볼프를 삼진으로, 오스틴 웰스를 2루 땅볼로, 그리고 알렉스 버두고까지 유격수 땅볼로 아웃시켜 쉽게 이닝을 끝맺을 수 있었다.
양키스의 콜 역시 2회에도 눈부신 피칭을 선보였다.
맥스 먼시를 내야 팝 플라이로 아웃시킨 후 키케 에르난데스와 윌 스미스를 강속구로 내리 삼진 아웃시키며 쉽게 다저스의 공격을 틀어막았다.
저지의 부진은 3회에도 계속되었다.
후안 소토가 더블 플레이로 투 아웃을 만든 후 저지는 플래허티의 다양한 변화구에 대처하지 못하고 또다시 삼진으로 물러났다.
삼진을 당하고 물러나는 그의 얼굴에서 또 다시 심한 실망감과 자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쯤 되면 뉴욕 언론들이 저지를 향해 어떤 폭격을 퍼부을지 짐작이 갔다.
오타니 역시 부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3회 들어 두 번째로 타석에 나온 그는 개빈 럭스가 플라이 아웃 당하고 토미 에드먼이 1루수 팝 플라이로 죽은 후 게릿 콜의 강속구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월드시리즈 시작하기 전 이번 월드시리즈는 오타니와 저지의 대결이라며 엄청난 주목을 받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주목 받던 두 선수가 가장 부진한 아이러니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닝 중간에 로버츠 감독은 오타니의 등을 두드려주며 염려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콜은 5회가 넘어가면 구위가 떨어지는 특징이 있어. 그 때를 놓치지 말고 한 방을 노리면 돼. 알았지?”
오타니는 이런 감독의 격려에 여유 있는 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이 떨어진 저지와는 달리 오타니는 아직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양키스의 4회가 또 무기력하게 끝났다.
아니, 양키스가 무기력하다기 보다는 플래허티가 눈부신 피칭을 하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는 직구와 너클 커브 그리고 슬라이더까지 섞어가며 양키스 타선을 농락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플래허티의 너클 커브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플레이트 앞에서 춤을 추며 떨어졌다.
“그레이트 피칭, 플래어(flare).”
동료들은 플래허티의 이름에서 딴 별명 플레어를 외치며 그의 피칭에 찬사를 보냈다.
다저스가 막판 그를 영입한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반면 마지막 순간에 그의 팔꿈치 부상을 문제 삼아 트레이드를 취소한 양키스는 속이 쓰릴 것이다.
잠잠하던 경기는 5회 말 가을의 사나이 키케가 3루타를 치면서 균형이 깨졌다.
키케를 3루에 두고 윌 스미스가 기대했던 타이밍에 외야 희생플라이를 날려 다저스가 선취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다저스 관중들이 흥분한 것도 잠시.
양키스도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6회 초가 되자 후안 소토가 안타를 치고 선두타자 출루에 성공했다.
벤치에 앉아 있던 로버츠 감독이 나올까 말까 잠깐 움찔했으나 그대로 플래허티로 가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저지가 또다시 삼진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괴력의 사나이 스탠튼이 저지 바로 다음 타석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쏘아 올려 점수는 순식간에 양키스 2 다저스 1이 되었다.
로버츠 감독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곧바로 불펜에서 안토니 반다를 불렀다.
반다는 안토니 볼프를 고의 4구로 내보낸 뒤 오스튼 웰스에게 내야 안타를 허용했지만 버두고를 삼진으로 잡고 이닝을 마쳤다.
요즘 들어 로버츠 감독의 투수 교체 타이밍이 작두를 탄 것 같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번 교체도 그런 성공 사례의 한 가지 예였다.
6회 들어 다저스도 반격의 조짐을 보였다.
월드 시리즈에서 두각을 나타낸 토니 에드먼이 2루타를 치고 나간 것이다.
그러나 오타니가 1루 땅볼로 물러나고 베츠도 3루 땅볼로 아웃되면서 투아웃 3루가 되었다.
이어 나온 프리먼이 우익수 쪽으로 강한 타구를 날렸으나 공은 더 뻗지 못하고 소토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7회 들어 다저스는 안토니 반다를 브루스다 그레테롤로 교체했다.
그레테롤은 토레스를 투수 앞 땅볼로, 후안 소토를 내야 팝 플라이로 아웃시켜 투 아웃을 만든 다음 에런 저지에게 중견수 앞 안타를 허용했다.
저지가 친 공은 평범한 안타인데도 오랜 부진에서 벗어나는 신호탄이 된 듯 본인도 살짝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믿었던 스탠튼도 그레테롤의 강속구를 이겨내지 못하고 삼진 아웃되면서 또 다시 이닝이 무득점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저스의 7회 말.
테오스카 에르난데스가 중견수 앞 안타를 치고 나가자 양키스도 게릿 콜을 클레이 홈스로 교체했다.
그러나 교체되어 나온 홈스가 맥스 먼스에게 몸 맞는 공을 던져 주자가 1,2루가 되고 말았다.
다음 타자 키케는 희생 번트로 에르난데스를 3루로, 먼시를 2루로 보내주었다.
1사 2,3루의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온 윌 스미스가 기대와는 달리 그만 유격수 팝 플라이로 아웃되었고 양키스는 다시 투수를 클레이 홈스에서 토미 캐이늘로 교체했다.
그리고 캐이늘은 개빈 럭스를 1루 앞 땅볼로 처리해 7회도 무실점으로 넘어갔다.
이제 문제의 8회 말이 되었다.
토니 에드먼이 땅볼로 아웃된 후 타석에 등장한 오타니가 우익수 쪽으로 2루타를 날렸다.
하지만 2루타로 끝날 것 같던 이 타구가 후안 소토의 송구 실책으로 인해 오타니를 3루까지 가게 하고 말았다.
사실 후안 소토의 송구 실책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그 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2루수 토레스의 책임도 있었다.
양키스가 또 다시 투수를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마운드에 선 선수는 루크 위버.
위버는 포스트 시즌 내내 무시무시한 피칭을 보여 팬들의 박수를 받았지만 이 날은 나오자마자 무키 베츠에게 희생 플라이를 맞아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베츠의 배팅 센스가 돋보인 타석이었다.
후안 소토의 송구 실책만 아니었으면 주지 않았어도 될 점수를 주고 만 것이다.
그래서 스코어는 2 대 2.
경기는 연장으로 들어갔다.
10회 초 양키스 공격.
스탠튼이 삼진으로 물러난 후 재즈 치좀 주니어가 우익수 앞 안타를 쳤다.
그리고 곧바로 2루로 도루.
원 아웃 2루가 되었다.
그러자 트라이넨이 안토니 리조를 고의 사구로 내보내 1, 2루가 채워졌다.
재즈 치좀 주니어가 이번에는 2루에서 3루 도루를 감행해 성공시켰다.
양키스의 득점 찬스.
이어 나온 볼프가 토미 에드먼 쪽으로 땅볼을 친 사이 3루에 있던 치좀 주니어가 홈으로 들어왔다.
양키스 3 다저스 2.
이제 양키스는 10회 말만 잘 막으면 1차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애런 분 감독은 투수 루크 위버를 제이크 커즌즈로 교체했다.
하지만 이것이 패착이었다.
첫 타자 윌 스미스는 우익수 플라이로 잘 잡아냈으나 개빈 럭스에게 4구를 허용하고 토미 에드먼에게 안타를 맞았다.
그러자 분 감독은 다시 커즌즈를 네스터 코르테즈로 바꿨다.
오타니가 좌익수 방면 파울 플라이로 아웃되는 사이 대주자로 들어온 크리스 테일러가 3루로 가고 에드먼이 2루로 들어갔다.
좌익수 버두고가 파울 플라이를 잡다가 그만 관중석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주자들이 뛸 시간이 생긴 것이다.
투 아웃에 3루, 2루.
그러자 코르테즈는 무키 베츠를 고의 4구로 내보내 주자는 만루가 되었다.
이어 나온 오늘의 히어로 프레디 프리먼.
현지 캐스터들은 발목 사정이 좋지 않은 프리먼이 그냥 단타만 치고 걸어나가도 게임을 승리할 수 있다며 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운드에 선 코르데즈가 초조한 표정으로 공을 손으로 문질렀다.
“월드시리즈 1차전. 1점차 경기. 프리먼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제 싱글 하나면 됩니다.”
캐스터의 말이 끝나고 코르테즈의 초구가 프리먼의 몸 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프리먼은 거짓말처럼 이 공을 통타해 오른쪽 담장을 넘겨 버렸다.
만루 홈런이었다.
다저스 스타디움이 일시에 용광로로 변했다.
프리먼이 홈으로 들어오자 다저스 벤치에 있던 모든 선수들이 뛰어나와 펄쩍펄쩍 뛰면서 그를 환영해 주었다.
마치 88년 커크 깁슨이 오클랜드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극적인 역전 홈런을 친 것처럼 이번에는 프리먼이 그 역할을 해 낸 것이다.
다저스는 순식간에 4점을 더해 6대 3으로 리드했고 경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저스는 죽었다가 살아난 느낌이었고 양키스는 다 잡았던 경기를 눈앞에서 놓친 꼴이 되었다.
단기 시리즈에서 1차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저스에게 1차전을 허무하게 내 준 양키스는 2차전도 역시 무기력하게 내주고 말았다.
다저스의 2차전 선발은 야마모토였다.
메츠와의 경기에서는 부진했던 야마모토가 월드시리즈에서는 휴식 시간을 오래 가져서 그런지 일본에 있을 때만큼 날카로운 피칭을 선보였다.
야마모토는 6과 3분의 1 이닝을 던지면서 단 1안타, 1실점 (1자책), 포볼 2개, 삼진 4개를 잡는 놀라운 호투를 이어갔다.
본인도 놀라고 감독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 경기에서 애런 저지는 1회에 삼진, 2회에 우익수 쪽 뜬 공 아웃, 6회에 삼진, 그리고 9회에 또 삼진으로 아웃당하며 월드시리즈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1차전의 영웅 프리먼은 2차전에서 또 홈런을 치며 팀의 승리를 도왔으며 놀라운 것은 9번 타자 에드먼이 홈런과 2루타를 치며 크레이지 모드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에드먼은 월드시리즈에서만 .365를 기록하며 팀내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이런 월드시리즈에서의 활약 덕분에 다저스와 5년 연장 계약을 맺게 된 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1,2차전을 홈에서 승리한 다저스는 3차전 선발로 나를 예고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월드시리즈 마운드 위에 서 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장소가 뉴욕이라는 점이다.
메츠와의 경기에서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월드시리즈는 또 다르다.
나는 뉴욕 관중들의 그 열기를 잊을 수가 없다.
끊임없이 질러대는 함성.
상대선수들에 대한 야유.
유럽의 축구장을 연상케 하는 집단 응원.
그리고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미디어 프레셔.
나는 이린 것들에 당연히 위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당당히 이겨냈었고 또 이겨낼 것이다.
극성스런 관중들을 조용하게 시키는 방법은 그냥 잘 던지는 일이다.
내가 잘 던져서 타자를 아웃시키면 사람들은 떠들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
소음이 가신 양키 스타디움은 훨씬 던지기가 편하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도 나는 내 진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리라고 결심했다.
내가 양키스 전 등판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전화였다.
나는 무심코 전화를 받으며 ‘헬로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폰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한국어였다.
그것도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의 목소리로.
“장인성 선수죠?”
“네, 그렇습니다만”
“반갑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사업하는 손인환이라고 합니다.”
손인환?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이름이었다.
“아마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라파밸리 세미컨닥터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라파밸리 세미컨닥터라면 가끔 한인신문에 오르내리는 그 반도체 회사인가?
“제가 이번에 메이저리그 팀 하나를 인수하게 되었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한국 사람이 메이저리그 구단을 인수한다고?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텐데 이제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야, 그러시군요.”
나는 반신반의 하면서 대답했다.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 아시죠? 그걸 인수할 겁니다.”
마이애미 말린스?
그러고 보니 구단을 판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그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그 구단 인수 얘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꿈이 있어요.”
꿈? 무슨 꿈? 노인도 꿈이 있나?
“메이저리그 구단을 인수해서 그 팀을 한국 선수들로 꾸리는 꿈입니다.”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한국인 사업가가 메이저리그 구단을 인수해서 그 팀을 한국인 선수들로 꾸린다?
그게 가능한가?
만일 된다면 놀라운 일이다.
한국인으로서는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전화 속의 손인환씨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진지해졌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일까?
나는 그의 말을 더 잘 듣고자 왼손으로 들었던 핸드폰을 오른손으로 바꿔들고 귀에 바짝 갖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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