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잊지 말자.
얼떨결에 만난 우림 가구의 사람들과 김대리의 파티는 연합을 결성하게 됐다.
목적지까지 도달할때까지 일시적인 관계였지만 현재 김대리에게 있어서는 이들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김대리의 것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느껴졌다.
4명의 힘과 능력 배분으로 파티라는 구조의 이점을 살린 효율적인 공격과 방어를 통한 생존은 홀로 모든 몬스터를 상대하는 김대리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김대리님!”
박사원의 못이 몬스터들의 눈이나 다리에 박혀 주춤하게 만들어 잠시 기동력을 묶어두면 전위의 성사원이 톱을 칼처럼 있는 힘껏 휘둘러 몬스터들의 목, 혹은 사지를 절단한다.
혹여 원거리 공격 위주의 박사원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이 있으면 직소를 사용하는 최사원이 그를 보호하고 최종적인 마무리는 구반장의 도끼로 완전하게 숨통을 끊는다.
이렇게 이상적인 파티의 연계안에서 김대리의 공격력이 더해졌다.
박사원의 보조에 맞춰 김대리가 휘두르는 고블린의 검이 몬스터들의 목을 단칼에 내리쳤다.
너무도 빠르고 손쉽게, 그리고 들이는 힘을 최소화하여 효과적으로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성사원의 경쟁심과 그에 반응하여 질세라 더욱 쇄도하는 김대리의 공격으로 몬스터들은 전위인 두 사람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성사원과 김대리 두 사람은 급격하게 성장해나갔다.
“금방 정리가 되는데요?”
덕분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은 체력을 온존하여 좀 더 빠른 이동이 가능했다.
강과장 또한 다리의 상처를 회복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고 정인턴 또한 자신이 안전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자 점차 멘탈이 회복되었다.
모두가 목적지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희망에 차 있어 얼굴 가득 미소를 띄었다.
단 한사람만 빼고 말이다.
“안대리님... 괜찮으세요?”
정인턴이 얼굴 가득 불만을 품고 있는 안대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정인턴의 걱정에도 대답하지 않고 파죽지세로 몬스터를 정리하는 김대리를 응시했다.
‘젠장... 저러면 안된다고!’
안대리는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런 안대리의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한 김대리는 살해 행위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핏빛신사가 당신의 활약에 감탄합니다.]
김대리는 몬스터를 사냥한 전리품들을 인벤토리에 담고 틈이 날 때마다 강과장과 정인턴에게 좀 더 튼튼한 장비로 교체해주었다.
“고마워, 김대리. 우리 때문에 괜히 고생하네.”
“아니에요, 다리는 좀 어떠세요?”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 고마워 정말로.”
김대리를 향한 강과장과 정인턴의 신임 또한 점점 두터워졌다. 그동안 들고 다니던 부러진 나무 마대조각 따위는 버리고 김대리처럼 어엿한 무기를 갖춘 강과장은 다리가 많이 회복되었는지 정인턴의 부축 없이도 이동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도 스스로 처리하게 될 수 있었다.
정인턴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과장과의 협력으로 강과장이 마무리하지 못한 몬스터들을 직접 공격해 숨통을 끊으면서 본인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오... 이제야 파티다운 모습을 갖췄군.’
구반장이 그들을 보며 감탄했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팀이란 것은 단체로 움직이면서 그 안에서 개별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자신들의 몫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
네 사람이 네 사람 몫의 일을 개인이 온전히 행하기에는 어려우나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만 보인다면 한 사람은 물론 두 사람, 세 사람의 몫을 하는 배의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잘 하고 있어요, 강과장님! 정인턴!”
김대리의 격려, 다른 파티원들의 보조와 가르침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목숨을 지키기도 나아가 팀원의 목숨을 지키기도 하는, 제 몫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숙여요, 안대리님!”
하지만 여전히 안대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피하고 숨어 다녔다.
“고마워, 정인턴. 내가 좀 어깨가 안 좋아서~”
“...네.”
정인턴의 쌀쌀맞은 반응에 안대리는 더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자신이 이 파티에서 쓸모없어질 것 같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전투가 끝나면 파티원들에게 다가가 격려와 응원을 가장한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아니 뭐, 저흰 괜찮은데.”
“이렇게까지 안해주셔도 돼요.”
어깨를 주무른다던지 물을 가져다준다 던지의 허드렛일 뿐이었지만 상대의 기분과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이만한 접근법이 없었다.
이런 사소한 호의에 별 반응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원인은 김대리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저 빌어먹을 놈은 사무실에서 죽었어야 하는데!’
그녀는 김대리를 노려보며 그를 향한 원망을 가득 피워냈다.
[음침한 모략가가 당신의 모략에 한숨을 내쉽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자색 글자의 메시지에 큰 초조함을 느꼈다.
***
“이제 몇이나 죽였어요?”
성사원이 숨을 고르며 김대리에게 물었다.
“야 이놈아! 내가 누누이 얘기했지!”
“아이, 알았어요! 경쟁 안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에요, 궁금해서!”
포기를 모르고 김대리에게 몬스터를 처리한 횟수를 물어보는 성사원이었다.
성사원의 질문에 김대리 대신 대답해주기라도 하듯 김대리의 눈앞에 붉은색 글자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홀로 150마리 이상의 몬스터 죽이기를 달성하셨습니다!]
“백오십.”
김대리는 성사원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읊조렸다.
성사원은 그제야 자신이 보았던 숫자가 다섯이 아닌 오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놀란 눈으로 김대리를 보고 잠시 멍하게 입을 벌린 채 앉아있었다.
김대리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어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또 다른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의 피가 난무하는 광기 어린 살해 행위에 핏빛신사가 감격합니다.]
[당신의 생존을 바라며 핏빛의 가호가 내립니다.]
[피의 광기 Lv 1을 습득했습니다.]
‘피의 광기?’
[이제 당신의 피의 광기에 발을 들일 수 있습니다.]
[과도한 피를 뒤집어쓰고 과도한 피를 흘릴 경우 광기의 개입이 시작됩니다.]
[효과 : 당신이 피를 흘린 만큼 더 많은 피의 복수를 할 수 있습니다.]
[효과 : 당신이 피를 뒤집어쓴 만큼 더 많은 피를 갈구할 것입니다.]
김대리는 마치 게임과도 같은 단어와 문장을 보며 개념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하필 광기라니. 불길하고 부정적인 단어였지만 생존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형님.”
그 때, 정신을 차린 성사원이 김대리의 옆으로 소리 없이 다가와 말했다.
“이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경쟁심리가 가득했던 그의 반항적인 눈빛은 김대리를 존경하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김대리는 그의 태도가 부담스러웠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우림 가구 사람들을 만난 덕에 자신의 생존은 물론 파티 구성원들의 생존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
[제한 시간 25:05:17]
어느덧 목적지까지의 남은 시간은 하루 남짓 남아있었다.
지도상 거리는 반나절도 안되어 도착할 수 있을 거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좀 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다 마저 걸어나가기로 했다.
폐쇄되고 매장된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비록 유리창이 깨지거나 2층 위부터는 옆으로 무너져 내린 폐허였지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몬스터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며 쉴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이곳 말고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곳이어도 이들은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 동안 쌓인 전투의 피로 때문이었다.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몬스터, 특히 고블린 스토커와 같은 악랄하고 강력한 몬스터를 만나 힘겹게 쓰러뜨리기도 했다.
또한 멀리서 다른 생존자 파티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서로 싸우며 급기야 몬스터처럼 서로를 죽고 죽이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이제는 몬스터가 아닌 인간들도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이 점차 드러나는 멸망한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에서 김대리는 자신들의 파티를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김대리마저 도움이 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들이 호의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받아주었을까? 어쩌면 방금 보게 된 그 생존자 무리처럼 자신들을 공격해 무참히 죽이고 챙겨갈 것만 챙겨가지 않았을까?
“김대리님, 잠깐 저 좀 봐요.”
그런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안대리가 김대리를 불러냈다.
“무슨 일인데요?”
김대리는 안대리를 따라 나선 지하철 역 앞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남들이 들으면 안 될 말 못할 얘기라도 있던 것인가 싶어 김대리는 의심 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것이 김대리의 가장 큰 실수였다.
짧지만 하루 남짓한 시간 동안 만났던 믿음직한 동료들은 김대리의 경계심을 살짝 풀어놨다. 느슨해진 경계심은 낯선사람 뿐 아니라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에 대해서도 느슨해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가장 위험한 마음 가짐이었다.
익숙함.
주변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당연히 경계해야할 것들을 경계하지 않은 것. 당연히 의심해봐야할 것들을 의심하지 않은 것.
재산이나 커리어 따위는 쓸모 없는 쓰레기가 되어 오로지 자신의 목숨만이 가치를 가진 세상. 자신의 몸과 목숨을 지키는 것만이 의의가 있는 극단적이고 삭막한 세상에서 익숙함은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툭
“어?”
잔해가 깔린 지하철 역 안으로 김대리를 힘껏 민 안대리. 그리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안대리의 섬뜩한 미소를 본 김대리는 탕비실 문틈 사이로 보았던 안대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젠장 맞을 년.”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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