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 계약
“형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눈시울을 붉히며 목청을 높여 자신을 애타게 부르짖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
그리고 그를 붙잡고 막아서는 군중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있어!”
“당신들 저 사람이랑 파티였잖아!”
의식이 돌아온 김대리가 본 것은 한 사람 당 스무 명 가량에게 둘러싸여 자신처럼 똑같이 포박당한 채로 무릎이 꿇려진 동료들이었다.
‘저 사람들이 왜?!’
“우우우웁!!! 웁!!”
김대리는 입을 열어 저항해보려 했지만 입안과 밖 모두를 봉하고 있는 천에 의해 말이라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의미 없는 소리만이 밖으로 처절하게 새어나올 뿐이었다.
보금자리의 중앙에 교수대의 형태를 어렴풋이 갖춘 급조한 구조물 위에 자신이 사형수마냥 올려져있었고 바로 아래에는 잔디밭위에 동료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그리고 묶여있는 동료들의 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인자한 웃음을 띠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잊을 수 없는 그 미소. 사람 좋은 웃음 안에 감춰진 살인의 욕구와 소름끼치는 폭력성에 김대리는 다시 한 번 전날 밤의 기억이 떠올라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이 개 같은 새끼!! 가증스러운 새끼!!’
그를 향한 저주스러운 발언들은 모두 입안에서 천에 묻힐 뿐 남지사는커녕 주변에 있는 모든이들에게도 닿지 않았다.
“역시... 참으로 포악하시군요.”
그의 발걸음은 김대리의 동료들을 지나 교수대로 향했다.
밟을 때마다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판자의 삐걱거리는 부실한 소리,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림이 느껴졌지만 남지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대리의 옆에 성큼 다가왔다.
몸을 아무리 옆으로 흔들어도 그저 삐걱거리는 소리만 울릴 뿐 교수대가 무너질 기세를 보이진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마비독의 여파가 한 몫 했다.
비록 의식은 돌아왔어도 신체에 대한 통제권이나 감각이 전부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김대리는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기억 속 무참히 살해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했기 때문에, 그들의 비명과 삶을 향한 목소리가 애타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장본인이 버젓이 자신의 앞에서 의인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에 김대리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진정하세요. 우리도 위험인물인 당신을 이렇게 살려두는 것이 쉽진 않았거든요.”
‘위험인물은 너지 이 살인자새끼야!’
남지사는 웃으며 김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김대리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거부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지사는 뒤를 돌아 200명 남짓한 작은 군중을 향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간밤에 이 시민분께서 제 보좌관이자 소중한 동료인 박보좌관과 크게 다퉜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박보좌관이 숨을 거뒀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 다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이를 악물고 천을 찢으려하는 김대리였지만 현재 그의 턱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소설을 피력하는 남지사였지만 남지사라는 사람의 특수성과 그의 과거 위치와 성품으로 인해 사람들은 진실과 소설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설령 소설이 진실에서 거리가 멀어도 군중은 남지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것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려 안타까운 목숨들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지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보금자리의 바깥, 보금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외부, 간밤의 사태가 벌어졌던 바로 그곳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사람들은 그곳으로 나가 널브러진 꽃들의 싸늘해진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글거리는 분노는 지금에서 김대리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풀어 그에게 해명의 기회를 주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김대리로 보고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이 분명했다.
“저 놈을 당장 죽여!”
“짐승만도 못한 새끼!”
반응은 뜨거웠다.
김대리의 만행이라고 생각했던 탓에 사람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졌고 이 분노는 김대리를 넘어 동료들에게까지 향했다.
“왜... 왜 이러세요!”
사태를 전혀 알 수가 없는 동료들에게 사람들은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맞고 밟히고 몸이 이리저리 굴려지며 상처와 흙투성이가 되고 있을 때 남지사는 손을 올려 군중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그쯤 하면 됐다.
손짓 한 번에 자신의 의지가 피력되기 시작했고 이 보금자리는 확실하게 그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응시하고 있는 김대리는 잘 알 수 있었다.
“여러분들의 분노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저의 불찰. 그들의 죽음에 제 동료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저 또한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이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남지사의 발언에 사람들은 더더욱 분노를 키웠다.
“아니 저 까짓 놈 때문에 우리 지사님이 왜요!”
“지사님! 안됩니다!”
그들은 울고 불며 바닥에 있는 돌을 집어 김대리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몸과 어깨, 머리에 돌이 날아들었으며 어떤 이는 분노를 참지 못해 교수대 위로 달려들려고 했다.
그 때 그를 막아선 것은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금발의 여자였다.
“처... 천보좌관님!”
그녀의 얼굴은 반은 뭉개졌고 반은 분노로 얼룩져있었다. 그 분노는 필히 김대리를 향한 것이었으나 지금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려 했기 때문에 거슬리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처리할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매서운 분노에 사람들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고 그 모습을 본 김대리는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간밤에 단 한사람이라도 직접 사태를 목도했다면, 그들의 고통과 두려움에 젖은 비명소리를 들었다면 남지사라는 사람의 가면을 벗겨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김대리가 간과한 것은 보금자리의 크기가 생각이상으로 컸고 사람들은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로 몰려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휘둘리는 것은 남지사의 언동 그 뿐이었다.
그가 지목한 사람이 살인자라고 하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고 그가 지목한 사람이 피해자라고 하면 피해자가 되는 절대적이고도 독재적인 마피아 게임.
“혀... 형님...”
“대리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자신의 눈앞에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김대리는 그저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자신과 동료들만의 생존을 위해 움직였어야 했다. 사소한 영웅심리 따위로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했다는 죄책감.
“하지만, 저는 이 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강인한 육체 능력, 본능에 충실한 야성! 탁월한 전투 감각까지. 이 분께서 제 편이 돼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이 분을 용서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그들의 목숨 줄은 남지사가 잡고 있다는 무력감에 김대리는 어느새 발버둥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 이게 맞아.’
전의를 상실한 김대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직장인이던 과거의 김대리의 모습과도 같았다.
불합리에 순응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인내하는 것이 특기였던 그 때 그 모습.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김대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며 불공정 계약을 수락하는 것뿐이었다.
***
[핏빛신사가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닥쳐...”
김대리도 알고 있다.
여기서 자신의 능력으로 200병 남짓한 사람을 모두 죽이면 이런 상황이야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을.
남는 것은 자신과 동료들뿐이겠지만 무슨 상관이 있으랴 생존만 하면 되는 것을.
하지만 과연 보금자리까지 마련하고 이들을 이끌 리더까지 선출했으니 앞으로 있을 열 두 개의 시련을 남은 넷이서 무사히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의견과 반대된다고 해서,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이를 누가 따를 수 있을까.
“형님...!”
김대리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그들의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남지사에게 순응하기로 했다.
하지만, 동료들에게는 제대로 설명해야겠지.
“죄송합니다.”
김대리는 자신들의 동료에게 우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사과에 동료들은 당황해했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김대리는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동료들에게 털어놓았다.
***
“저 미친 새끼!”
가장 먼저 성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앉아, 이놈아! 다 들릴라.”
역시, 성사원의 달아오른 불을 제압하는 데에는 구반장의 주먹 만 한 것이 없었다.
모두가 성사원과 같은 마음이었다.
남지사는 미쳤다.
하지만 모두가 의문을 갖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대체 왜 소년, 소녀들을 죽인 것일까.
둘째로, 대체 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김대리를 죽이지 않은 것일까.
김대리와 동료들은 이 사실을 골똘히 고민했지만 달리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저 남지사가 사이코패스라는 결론에만 확신을 가질 뿐이었다.
“그나저나 골치 아프게 됐군, 그래.”
구반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김대리를 보았다.
앞으로 김대리는 남지사의 편으로 남지사가 죽인 박보좌관을 대신해 남지사의 곁에서 퀘스트를 수행해야했다.
그의 곁에서 그를 위해 어떤 더러운 일들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은 시키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때마침 김대리를 찾아 천보좌관이 나타났다.
“지사님께서 찾으신다.”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