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4년 8개월
이대로 뒀다가는 이 장사인 여자와 술주정뱅이 여자에게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성의도 성의인 지라, 딱 한 잔만 받고 가려 술상 앞에 앉았다.
놀랍게도 술상이 차려진 방에는 시중을 드는 이 한 명만 있고 아무도 없었다.
버젓이 사는 이가 있지만, 사람 사는 냄새도 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곳은 아무리 경지에 달해 오는 곳이라도 내 쪽에서 사절이다.
“이곳은 너무 지루해.”
“그럴 것도 같습니다.”
나는 다른 이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라, 이렇게 인사불성인 취객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술에 취한 사람과의 대화만큼 생산성 없는 대화도 없지. 난 푸념처럼 늘어놓는 한 보살의 말에 솔직하게 맞장구를 조금 쳐 주었다.
“사는 맛이 없어.”
“저도 혼자서 오래 살아봤는데, 말동무는 필요하더라고요.”
“동무라, 좋은 것이지. 어찌, 나와 말동무를 해줄 생각이 있나?”
한 시간 정도는 괜찮았다.
어느새 취해 뻗어버린 강용지를 내가 업고 가는 것은 무리라, 그녀가 술이 깰 때까지 기다릴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오 장군은 미리, 내게 불수감으로 만든 숙취해소제를 건넸다.
“오 장군이 만드는 숙취해소제는 꽤 효능이 좋다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 보살은 평범해 보이는 술병을 꺼내, 내게 딱 한 잔을 따라 건넸다.
그러곤 인사불성 같던 모습을 지우고서, 붉게 물든 얼굴에 완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양어깨에 진 것이 무겁구먼.”
“···많다고는 생각하지만 무겁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의외군?”
“뭐,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과거엔 이 세상이 망할 거란 걱정 같은 건 안 하고 살았던 터라서요. 하지만 세상은 망했고,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남았고요. 다 어찌저찌 흘러갈 일이라 생각합니다.”
“운이 좋았어. 아니, 나빴던가.”
오 장군은 헛기침을 했다.
“장군님, 추우십니까?”
“아닙니다. 술을 주는대로 다 드시진 마십시오. 매우 독합니다.”
이곳에도 서열이 있다면 아마, 장군보다 눈앞에 앉은 보살이 더 높은 것일지도 몰랐다.
꼭, 초임 시절 술잔이 흘러넘치게 술을 따라주던 교감과, 은근슬쩍 뒤로 빼주시던 학년 부장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분들, 잘 계시려나.
“거, 한잔 쭉 들이키게!”
“아, 예.”
걱정스럽다는 듯 고갤 젓는 오 장군님의 걱정은 이해가 되지만, 나 그래도 제법 술은 잘 받는 체질이다. 근데 첫 잔은 좀 썼다.
“그래, 그대가 어찌 이곳을 찾게 되었는지는 장군에게 들었지?”
“네, 종종 있는 일이라고요.”
“종종은 무슨, 수백 년에 어찌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 것을.”
“근 수십 년 간은 종종 있었지요. 한 보살께서 매일 술독에 빠져 바깥을 둘러보지 않아 모르는 것이외다.”
“그런가? 그럼, 그것도 이야기 해줬나? 대부분은 들어온 문을 찾지 못해 나가지 못했다는 것.”
“네?”
놀랄만한 소리였다. 들어온 문을 찾아 나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찾기 어려운 일인가? 그럼, 나 못 나가?
손에 쥐고 있던 잔 가득 차오른 술의 표면이 요동쳤다.
“스스로를 갈고 닦아 열반에 오르는 이는 이제 없네. 자네처럼 우연히 들어오는 이들이 태반이지. 그들은 모두 죽음을 겪어 본 이들이야. 이곳이 주는 안락함에 돌아갈 문을 스스로 찾지 못한 것일세.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지.”
신의 경지에 올랐다 한들, 사람은 사람이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주어진 낙원을 걷어차고 나갈 이는 많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지금 같은 때라면 더욱.
하지만······.
“저는 나가고 싶습니다.”
“그래, 일단 한잔 더 드시게.”
주워 올린 잔엔 다시 술이 차올랐다.
어쩐지 이걸 마시면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지만, 한 잔 정도에 굴복할 내가 아니다.
영험한 힘은 없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다. 기절하면 구함이 주워 가 주겠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난 얼마 되지 않는 술을 한입에 털어 마셨다. 두 번째 잔은 의외로 달았다. 먹다보면 쭉쭉 들어갈 것 같은 맛이었다. 이러니 강용지가 저 모양이 되었지.
“좀 더 있으려 했는데, 문 이야기를 들으니 오래 있진 못하겠습니다.”
“문 이야기가 어째서?”
“저도 이곳에 머무르고 싶어질 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전 꼭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곳을 두고?”
“예.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어서요.”
“그대의 아래로는 자식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자식 같은 놈들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도 제 제자의 아이라, 잘 돌려보내 줘야 하고요.”
만취한 강용지가 널브러져 있는 꼴은 평생 놀릴 수 있을 정도의 비주얼이었지만, 일단은 모른 척해줄 생각이다.
“아쉽군.”
“그리고, 제겐 문을 찾지 않아도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그 방법까진 필요 없겠는데?”
“네?”
한 보살이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보자, 그곳엔 아까 들어올 때 열었던 것과 같은 황금색의 문이 있었다.
“아까부터 자네의 문은 이미 와 있었네. 마중을 나온 문은 처음 보는구먼. 성격이 급한 모양이지?”
“···좀, 그런 편입니다.”
“그래, 나와 대작해 주어서 고맙군. 함께 온 그 아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게. 덕분에 모처럼 즐거웠다고.”
“···예.”
난 서둘러 나보다 아주 조금 작은 강용지를 들어 업고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거, 약술이니 필요할 때 쓰게.”
한 보살님은 내게 투박한 술병하날 건넸다.
그 술병의 머리엔 공예수업 할 때 쓰는 마끈 같은 걸로 잔이 걸려있었다. 꼭, 관광지에서 파는 기념품 같다.
“보답일세. 제법 오래된 영약이니, 두잔 이상은 금물이야!”
“알겠습니다.”
“또 보세.”
“잘 가시오. 갈 때,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술 깨는 데 좋습니다.”
난 우장군님의 특제 불수감 양갱을 전해 받고서 그곳, 열반을 벗어났다.
금 주우러 갔다가 결국 금은 더 얻지도 못하고 술과 강용지만 얻어온 셈이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들의 대접 덕에 감기 기운 도 싹 가셨고, 한 며칠은 거뜬할 것만 같다.
난 그 황금빛 문을 꽉 눌러 닫고서, 팔만불이 가득한 길을 따라 나왔다. 아, 물론 짐짝 같은 강용지도 살뜰히 챙겼다.
[흡수하시겠습니까?]
“아니, 무슨 나오자마자 묻냐? 안에선 헛소리만 하더니.”
[사표 님도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이젠 제 차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안에선 스스로 답도 찾고 강용지도 찾지 않으셨습니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죠.]
“···알겠다. 흡수해.”
마침 강용지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겠다. 혹여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니, 서둘렀다.
거대한 핵에 손을 가져다 대자, 일전엔 겉도는 느낌으로 흡수되던 에너지가 내 몸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며칠 새, 녀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상당한 양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뻗어 나간 작은 핵들의 에너지가 별 볼 일 없군요. 게다가 여긴, 이미 오래전에 한번 핵이 가진 에너지가 빠져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게이트가 열렸었다는 거야?”
[그것은 아닙니다. 핵의 과거 연표를 읽으시겠습니까?(-744시간)]
녀석이 제시한 시간의 양은 꽉 찬 한 달 분량이었다.
“한달 씩이나? 이거 양아치 아냐?”
[궁금해하셔서요.]
“내 궁금증을 네 장사에 이용하지 마.”
[섭섭하군요.]
“섭섭은 개뿔. 여기 있던 핵은 적어도, 이 절이 세워질 무렵부턴 있었다는 거 아냐.”
[최소 수백 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게이트가 열렸던 것도 아니고, 수백 년 전의 일이면 지금은 영향이 있지도 않을 거고. 이용된 경우가 있었다면, 지금 인류가 다 써먹고도 남았겠지. 당시 각성자가 있었어도 다 죽었을 거고.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이 땅에 마물과 관련한 괴담 같은 건 없었어.”
[그래서, 핵의 과거 연표를 읽으시겠습니까?(-744시간) 혹은, 시간을 지불하여 보관할 수 있습니다.(–1시간)]
“보관도 돼? 나중에 필요할 때 읽어도 되는 거면, 그렇게 할게.”
[천령사 지하성전 핵의 과거 연표(열람 시 –744시간 소모)를 보관합니다.]
“읽을 일은 없겠지만, 시간을 한 달씩이나 소모하는 건 낭비니까.”
[알겠습니다.]
[게이트 에너지의 양을 측정합니다.]
[측정량은 7,200시간입니다.]
[41,023시간 후에 이 세계는 멸망합니다.]
남은 시간은 대략 4년하고도 8개월.
며칠 사이 훌쩍 늘어나긴 했지만 4년은 금방이다.
“근데, 시간 측정 기준은 뭐야?”
[핵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에 이 세계 운명에 관여하는 정도를 따집니다.]
“저번 것은 던전 발생 직전이라 값을 후하게 친 것이고, 이건 크기는 크지만 큰 영향이 없어서. 맞냐?”
[네, 맞습니다.]
녀석의 기준이 무엇이고, 녀석에게 핵을 먹인다고 정말 세계의 명운이 달라지는 것이 확실한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은 물어봐도 답도 해주지 않으니, 답답한 나만 열심히 시간을 벌 뿐이다.
“그런데, 열반이라는 곳 말이야. 왜 저기에 그 문이 있던 거야?”
[문이란, 필요한 자에게 열리는 법.]
“고리타분한 소리 말고.”
[천령사는 과거 하늘의 명을 전하던 사찰로, 그 뜻을 알리던 어떠한 존재가 드나들던 문이 아니었나, 예상됩니다.]
“너도 잘 모르는 게 있구나.”
[장르가 달라서.]
“···어련하시겠어.”
녀석이 정말로 이런 것들을 모르는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때가 있는 듯 구는 것이 꼭 내 말버릇과 닮아있었다.
“여기 절에 관련한 서적 같은 거, 이곳에 있을까?”
[불공명부가 올려져 있던 서랍 아래에 이름 없는 고서적이 하나 있습니다.]
녀석이 말해준 곳을 보니, 서랍 하나, 그것도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 하나 있었다.
바위로 만든 서랍은 꽉 끼어 뺄 수 없었다.
“이 안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빼?”
[무력으로 빼십시오.]
“이동 스킬로는 못 가져와?”
[게으른 인간은 매력이 없습니다.]
한참을 부동의 바위와 씨름을 했다.
“야, 이거 안 움직······.”
우르르르릉······.
“무슨 소리야?”
[5분 후에 천령사 일대는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4분 58초, 이동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4분 57초, 4분 56초, 4분 55초······.]
익숙한 듯한 말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천마산 봉우리 구덩이 속에서 봤던 재촉이었다.
“야, 이거 꺼내야지.”
[4분 54초, 4분 53초······.]
“야!”
[스스로 하지 못하면 도움을 요청해 보시죠. 4분 51초.]
“커어어어······.”
일처리를 하느라 강용지를 잊고 있었다.
난 서둘러 강용지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요. 강용지 선생님!”
“으으응, 깨우지 마. 고양이랑 놀고 있단 말이야······. 몽실몽실, 폭신폭신······.”
“고양이가 문젭니까! 일어나 보세요!”
“으응, 시러······.”
인사불성인 여자를 뺨 때려 깨울 수도 없고, 시간은 흘러간다.
내겐 쓸만한 무력 스킬이 없다. 이 고주망태를 깨워야만 한다.
“강용지! 일어나!”
“아이, 시러! 술줘!”
그 순간, 오 장군님이 ‘술 깨는 데 좋습니다’하고 걱정스레 건네던 양갱이 떠올랐다.
난 하는 수 없이, 술병을 까, 그녀의 코에 냄새를 맡게 해줬다.
그러자, 그 술을 들이부으라며 입을 벌렸다. 난 냅다, 양갱을 처넣었다.
[3분 49초······.]
우물우물거리던 강용지는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곤 날 보더니 냅다 소리치며 검을 빼들었다.
“···그, 죄송하지만 베어야할 건 제가 아니라 여깁니다.”
“예?”
숙취해소제인지 각성제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제법 효과적이었다.
주변이 무너져 가는 걸 느낀 강용지는 내게 더 이상 묻지 않고서, 내가 가리키는 것을 단숨에 베어냈다. 참, 대단한 판단력이다.
“감사합니다.”
반 토막난 서랍엔 손상된 부분 하나 없는 말끔한 책 한 권이 나왔다.
난 그것을 들고, 냅다 달렸다.
“정신 차렸으면 얼른 뛰세요!”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말을 참 듣는 인간이었다.
둘 다 발은 빨라, 이동 스킬을 쓰지도 않고서 절 바깥까지 나왔다.
그리고 10초 후, 한때 내가 몸을 거했던 천령사는 폭격을 맞은 듯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내 품 안엔 영약이라는 술과, 나간 정신도 찾아주는 양갱 몇 알, 오래된 책 한 권이 무너진 천령사를 대신해 남았다.
“······.”
“···그럼, 이제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김 선생님?”
술 주정뱅이 주제에, 센 척은.
아, 아까 영상찍어 둘 걸.
- 작가의말
★ f8608**** 독자님 재 후원 감사합니다!
꾸준히 봐 주시는 독자님들 감사 인사 드립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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