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파

가을녘의 서늘한 바람 사이로 말들의 질주가 치닫는다.
그들의 기수는 윈덴에 체류중이던 각종 제후국의 인사들과 전령들.
최근 있었던 윈덴 성기사단 파병 건에 대해 알아보려 바람의 도시에 방문했던 그들은, 불과 일주일이 안 되어 다시 본국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고용주에게 전달할 양피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페일이 바람의 도시에 3,000기의 성기사단 파병을 결정했다.'
교회의 400기 성기사단 파병 소식도 충분히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이번엔 그 수준이 아니다.
3,000 기의 성기사단.
그것은 성기사 한 명이 일반병 셋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는 말에서 볼 때, 황제의 일만 대군 파병과 비슷한 수준의 대사건인 것이다.
심지어 제국의 중앙, 수도국 칠란트에 주둔하던 먼젓번의 400기 성기사단과 달리 이번의 3,000기는 제국 동부의 페일 본토에서 파병된 정예들이다.
그 사실이 내포하는 위력만으로도 충분히 떠들썩할 만한 사안이지만, 이 사건은 정치적 의미에서도 상당한 대사건이었다.
권력이라는 첨탑의 꼭대기, 제국에 발 딛고 사는 모든 것의 군주인 황제의 권위.
그리고 대륙에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자, 봉황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종교의 최고권위자인 교황의 위세.
물질적 권력과 정신적 권위의 마찰은 제국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끊인 적이 없다.
'바람에 섞여든 한 줌 풍문을 타고 비둘기가 날아오르자 제국이 뒤집힌다네'
ㅡ약삭빠른 담화꾼과 광대들이 부르기 시작한 노래의 첫구절이다.
바람은 윈덴. 비둘기는 성직자들. 그리고 비유될 수 없는 제국.
대단찮은 비유로 점철된, 따지자면 직설적일 정도인 그 노래가 나도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페일은 제국 최동부에 위치해 있고 윈덴은 서부의 제후국들 중 하나이다.
그런 페일에서 윈덴으로 군대를 직접 파병하려면, 페일의 군대가 제국 중앙의 황제령. 칠란트를 직접 가로질러야 하는 것이다.
반천년의 갈등의 폭발이다.
황제령을 꿰뚫고 지나가는 교황 직속의 사실상 일만 대군.
당연히 세간은 상징성을 다 떼고 보아도 논란의 여지가 넘쳐흐르는 이 상황을 두고 떠들기 시작했다.
ㅡ그 온갖 정치적 술수의 기본이 되는 전령들의 노고는 잠시 논외로 두어진다ㅡ
우선 이 대사건의 당사자(어찌보면 피해자)인 차르탄 윈덴은, 정치적 문외한이 보더라도 형식적이기만 한 영광을 표한 뒤 침묵을 유지했다.
이는 각국의 귀족들에게 공감 아닌 공감을 샀다.
400기의 성기사단을 이끄는 신성기사에게도 권력으로 대등하게 서야 했던 바람의 백작은, 이제 3,000기의 성기사단 앞에서 권력의 권 자도 꺼내어놓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판은 한 사람의 우울함을 고려해 잠시 멈춰 주거나 하지 않는다.
우선 하그사이 강을 따라 제국 남서쪽으로 흐른 소식은 텔로 동맹과 세이랑 연합에 닿았다.
선대와 마찬가지로 난폭한 황제에게 부정적이었던 그들은 즉시 페일을 향해 성기사의 손실에 대한 위로를 담은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제국의 서남쪽에서도 최남단의 해안에 위치한 해적 국가 타크에서는, 어떤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들인 만큼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웃어젖혔다.
바람을 타고 말발굽을 타고 풍문은 서북쪽으로 찾아든다.
국민 전체가 상인이라는 소문까지도 있는 상업도시 미림에서는 온갖 곳으로의 위로와 비난의 말을 난사했다.
미림의 양 옆에 위치한, 황제의 난폭함을 비난하는 자칭 혁명국들은 큰 견해의 드러냄 없이 조용히 혼란을 즐겼다.
그 가운데, 소심한 야심가 남작의 도시인 히그스토랑은 은근한 태도로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정치와 사교에 문외한인 안디오는 반강제로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각 귀족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따로 있었다.
서부 제후국들 중 가장 강력하다는 루만 평원의 견해.
그 인구는 수도국 칠란트에 맞먹지만 너무도 광활한 면적 탓에 국명이 아닌 지명으로 불리우는 루만 평원의 대추장의 말은 언제나 귀족들의 화젯거리였다.
그런 그들의 관심에 보답하듯, 바르마란 대추장은 알쏭달쏭한 견해 표출로 온 세간의 문학가들을 열 나게 만들었다.
'우리의 들소들은 풀만 뜯는다.'
머리 아픈 말이었다. 그리고 각 군벌들이 두통을 호소할 만한 일은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 이외에도 넘쳐 났다.
소식이라는 것은 응집력이 있어 강대하고 거대한 집단에 우선적으로 전해지기 마련이다.
제국을 네 조각으로 분할한다면 그중 한 조각(나머지는 황제, 교황, 서부 제후국들이 된다)이 될 것이라도 일컬어지는 제국 최고의 연합, 레드랑 라인의 반응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금빛 닻을 내리지 않는 정박은 허용치 않겠다.' 그들의 공표였다.
제국 북단의 해안 일대를 모조리 점령하고 있는 항구도시 연합, 레드랑다운 암시.
그 문장이 가지는 의미는 다양하고도 은유적이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허락 없이 들어오면 내쫓는다'는 뜻이다.
이렇듯 대륙의 온갖 권력들이 으르릉대고 가르랑대는 가운데,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의 선택은 다음과 같았다.
침묵.
이는 저 야수 같은 황제의 태도로는 상당히 예상 밖의 행동이었으며, 그에 대한 논평도 다양했다.
특히, 어떤 부두술사의 논평은 듣는 이 없기에 더욱 각별한 것이었다.
"아직 끓어넘치진 않는다는 거군. 교활한 박쥐 놈들."
뤼델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구간에 딸린 침소에 들이치는 햇빛은 창문을 따라 조각되어 네모나게 떨어지고 있었다.
허용할 수 없는 여유로운 광경.
뤼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햇빛을 바라보다, 책상에 꽂혀 있던 대거를 뽑아들었다.
칼날로 가볍게 손목을 파헤치자 뜨거운 피가 울컥 쏟아졌다.
땅에 채 떨어지기 직전 메뚜기 떼로 변한 그 혈류는 곧장 창문으로 날아가 붙었다.
메뚜기로 빼곡하게 뒤덮인 창문은 더 이상 햇살을 비추어 내지 않았다.
뤼델은 만족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주박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그것을 한층 더 지워 낼 예정이었다.
본래 또 다른 지하 거처를 구한 뒤 그곳에서 안전하게 의식을 거행할 생각이었으나, 갑작스레 들려온 페일의 3,000기 파병 소식에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그 숫자에게서 숨을래야 숨을 수가 없지. 페일이 작정을 했으니 다른 도시로도 빠질 수 없고."
해서, 뤼델이 내린 새로운 결론은 이러했다.
"이제, 직접 부딪친다."
그러기 위해선 성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주박을 최대한 많이 제거해야 했다.
먼젓번의 400기 성기사단은 제국 중앙의 칠란트에 주둔하던 병사들이기 때문에 윈덴까지 닷새만에 도달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페일의 최서단에서 출발한다고 쳐도 대략 삼 주 이상이 걸릴 것이라 판단한 뤼델은 그 시간 동안 윈덴에 주둔하며 주박을 없애는 데에 전념하기로 했다.
뤼델은 말은 없는 마구간 내부의 건초 창고 비슷한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놓은 뤼델은, 의식을 시작하기 전 지금까지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래... 그것들이 작정을 했지. 완벽한 보완이군."
윈덴에서 크게 데인 400기 병사들은 직접 수색을 완전히 중지하고 대신 윈덴의 외곽 지역에 넓게 주둔하며 도시 이탈자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죽을 맛이겠지."
안타깝게도 제국의 모든 도시들을 통틀어 사람의 순환이 가장 빠른 도시인 바람의 도시는 그런 식의 수색을 진행하기에 상당히 진빠지는 도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엄격한 규율과 방식으로 수색을 진행하는 성기사단 덕분에, 뤼델은 타 도시로의 이동에 대한 고려를 접었다.
애초에 숨어 살기에 윈덴 만한 곳도 없었다.
"최후의 보루가 있지만... '내' 최후를 앞당기는 방법이니."
뤼델은 자조섞인 웃음과 함께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기괴하게 생긴 피리와 붉은 초, 정체 불명의 털뭉치와 낡은 악기. 그리고 잘린 부분이 불로 지져진 사람의 머리 다섯 개.
두 눈을 꽉 감고 있는 머리들은 모두 수염이나 머리털에 가지런히 밀려 있었고, 검댕으로 어떤 문양이 그어져 있었다.
뤼델은 좁은 창고의 여러 면에 붉은 가면을 걸었고, 천정에 작은 등롱을 매달아 불을 밝혔다.
초의 개수를 세고 털뭉치를 가다듬은 뤼델은, 주변을 그것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아랫부분을 등롱으로 지진 다음 벽면에 그것을 붙이거나 하는 식으로 총 열한 개의 초를 온 사방에 깔아 둔 후, 하나하나에 불을 붙였다.
주술적 방법으로. 즉 그의 이빨로 만든 불이었다.
이빨을 뽑아 피가 흥건한 집게를 내려놓은 뤼델은 기묘하게 뒤틀려 있는 피리를 집어들었다.
활에 불 보이기를 하듯 피리의 모든 면에 열한 개 촛불 전부를 쬐어 보인 뤼델은, 피리의 취구로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가볍게 불어넣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악스러운 비명소리 같은 것이 피리의 배부(背部)를 따라 터져 나왔다.
그 끔찍한 소리를 듣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뤼델은, 피리를 잠시 내려놓고 이리저리 얽힌 털뭉치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앉은자리 주변에 자갈처럼 널려 있는 머리들에서 잘라 엮은 것인 그 털뭉치는 색이나 길이, 곱슬기 등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그 털뭉치 역시 열한 개 초에 전부 쬐어 보인 뤼델은, 그것을 다섯 개 머리 중 하나의 입에 쑤셔 넣은 다음 도로 턱을 닫았다.
이로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리저리 쓰러진 채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들을 정갈하게 배열한 뤼델은, 메뚜기 한 마리를 만들어 날려 보내 등롱을 꺼뜨렸다.
그러자 창고 안엔 열한 개의 미약한 초가 발산하는 빛들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뤼델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피리를 집어들었다.
피리의 뒤틀린 관대를 따라 어지러이 배열된 지공(指孔)들에 손가락을 덴 뤼델은, 취구로 다시 입을 가져갔다.
조용한 숨결.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친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촛불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밀랍에 피와 골수를 섞어서 곤 그 붉은 초들은 그 괴기스러운 소리에 반응하여 춤추기 시작했고, 열한 개 광점들이 경련하자 창고 내부는 광란으로 가득 찼다.
뤼델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차분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비명소리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높고 새된, 낮고 음험한, 거대하고 처절한.
촛불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뤼델의 손가락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피리의 비명이 빠르게 뒤섞이며, 여러 명의 비명이 겹쳐 들리는 듯 변해 간다.
집단 살해의 현장에서 울리는 원혼의 메아리가 그러할까.
광란스러운 시계(視界). 끔찍한 괴성들.
그 무지스러운 의식의 장 속에서, 머리 하나가 깨어났다.
입에 다섯 명 분의 머리카락을 머금은 그 머리였다.
"아아아아아아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탄성만 지르던 머리는, 이윽고 눈을 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리는 몸만 있었다면 온 사방을 나뒹굴었을 기세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뤼델의 피리 소리가 가일층 격해진다.
촛불들은 아우성치는 듯하다.
커져 가는 목소리.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윽고 다른 머리들이 차례로 깨어났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피리의 비명 소리. 머리들의 비탄섞인 탄식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옥의 구렁텅이 같은 괴성이 빚어지는 순간이었다.
훅.
갑자기, 열한 개 모든 촛불들의 불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모든 비탄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뤼델의 피리 소리도 곧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거짓말 같은 암흑 속에서, 머리카락을 머금은 머리가 안광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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