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좀 물읍시다
522년 9월 32일, 성기사단의 기록적인 패배 일주일 후.
윈덴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인 없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깊숙하고 더러운 골방, 어둠은 악취처럼 스며들어 있다.
상대방의 얼굴을 알려면 두 손으로 서로를 더듬어야 할 것만 같은 칠흑 속, 한 남자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는 피투성이였고, 지친 듯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으며, 온 사방엔 그의 살점이 가득했다.
하지만 남자는 웃고 있었다.
어둠을 휘저어놓는 그 조용한 웃음.
얼마가 지났다.
남자의 몸에서 떨어져내리는 핏방울 소리가 잦아들 무렵, 남자는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뚜걱, 뚜걱, 뚜걱ㅡ
몇 걸음쯤을 이동한 남자는 그의 앞에 놓여 있던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둥근 모양이었던 그것은 삭은 무화과처럼 버석버석하게 메말라 있었으며, 감촉이 일정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 느낌을 손으로 기억해 두려는 듯 그것을 천천히 쓸어만졌다.
주름진 이마, 움푹 패인 볼. 굳게 닫힌 눈꺼풀과 쪼그라든 눈두덩이. 메마른 이빨과 그 안의 머리카락들.
골방의 남자. 뤼델은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다, 가이슨."
뤼델의 손에 들린 머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멀지 않은 과거에 광휘기사라는 이름으로 신의 위광을 업고 혼탁한 황야를 질주하던 사내는, 그 머리만 남아서는 과거의 영광을 기억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뤼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어차피 대답은 영원히 기다려도 들을 수 없다.
"덕분에 근 반 세기 들어... 가장 상쾌하군."
괴괴한 침묵.
뤼델은 머리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빛 한 줌 새지 않는 농밀하기에 공허한 어둠 속이었기에 그렇게 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뤼델 자신도 머리의 얼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던 건 감촉을 느껴 봤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의 눈이 있으리라 싶은 부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둡군. 밤보다도 더."
"..."
"마치... 내가 그림자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을 때처럼."
뤼델은 그로서는 꽤나 오랜만에 과거를 떠올렸다.
"그래, 그때가 생각 나. 내가... 내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성의 가장 깊은 그림자 아래에서 숨죽여 울던 시절이..."
"..."
머리는 어둠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침묵했고, 뤼델은 그 침묵과 대화했다.
"어둠이 친우였고, 광휘는 공포였지... 광휘기사여, 납득할 수 있겠나?"
"..."
"어둠은 차가운 만큼 적막했고, 비정한 만큼 무관심하지. 나는 차가움에 허덕이면서도 적막을 끌어안았고 비정에 상처입으면서도 무관심을 갈구했다...."
뤼델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그 빛은, 빌어먹을 빛들은 나를 좀먹었으니까."
대답은 없었다. 뤼델은 갑자기 돌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제기랄, 좀먹는다고. 물어뜯고 할퀴고 찌르다 죽였지! 나는 죽을 수 없으니까!"
점차 자신의 말에 그 자신이 공격당하기 시작하던 뤼델은 끝내 비명처럼 분노했다.
영혼에 음각된 상처 같은 기억을 가리던 반 세기는 짙은 어둠에 희석되어 흩뿌려졌다.
아득해지는 시야. 하지만 여전히 어둡다.
눈앞의 어둠은 522년의 골방 속이기도, 472년의 밤이기도 하다.
기억의 부상, 시간의 왜곡. 공포의 부활.
무너져버린 정신을 지탱하던 가짜 연륜이라는 기둥은 눈앞에 도래한 어둠을 타고 범람하는 기억에 휩쓸려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힘없이 사그라든다.
그렇게 미친 듯이 소리치고 나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뤼델은, 티끌 같은 광점을 보았다.
갑자기 난 구멍일까, 과거가 그려내는 환각일까.
그 광점은.
야수가 된 기억이 정신을 물어뜯는다.
"....!"
갑자기, 뤼델은 영문 모를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분노하며 고함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숨기 위해 뒷걸음질치던 뤼델은, 저도 모르게 손 안에 들린 물건에 집중했다.
메마른 살갗.
기억의 야수가 다시 포효한다.
"... ... ... ..."
메마르다.
ㅤㅤㅤㅤ시체의 살갗은.
점차 역한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쯤
살갗은ㅤㅤ단단해지고
ㅤㅤㅤㅤㅤ내부가 물렁해진다.
뼈는 구멍이 많다.
피는ㅤㅤㅤㅤ마르지 않는다.
짓물러진 내부
살갗과ㅤㅤㅤ뒤섞여 질컥거리게 되어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버린다.
그래서
ㅤㅤㅤㅤㅤㅤㅤㅤㅤ먹기에
ㅤㅤㅤ그런 시체는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좋지 않다ㅡ
"...! ...! ....! ....!"
뤼델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집어던졌다.
콰지지지직ㅡ 콰과광쾅ㅡ!
머리는 완전히 눌어붙어 가루처럼 변해 버린 핏가루를 흩날리며 내벽과 함께 박살 났다.
갑자기 들이닥쳐 오는 빛살.
뤼델은 온 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공포에 온 몸을 떨었다.
"아아... 아...! 아아아아...!"
뤼델은 머리를 감싸쥐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도, 쭈그려 앉아도,
쏟아지는 빛을 피할 곳이 없다.
빛은 두렵다. 빛과 함께 나타나는 기름진 얼굴은 저주스럽다.
광휘에 비춰질 때 드러나는 나의 그림자를 보고 싶지 않다.
빛은 증오스럽다.
"..."
고통의 역사는 썩고 곪아 공포로 변하고, 공포를 연료로 분노가 타오른다.
오래 된 공포는 격렬한 분노를 불태운다.
그리고 그 분노조차 아무것도 해소하지 못한 채 전부 타들어가면, 비로소 차가운 장작 속에서 되태어난다.
그것이 증오. 뤼델의 반 세기의 양분.
"..."
생의 역사를 빠르게 되풀이한 뤼델은 곧 자신을 되찾았다.
"...하아."
그는 초췌해진 눈으로 그 시야의 초점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런, 내가...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뤼델의 시야에 맺히던 윤곽이 점차 어떤 살갗이 되어 갔다.
그것은 고개를 몸에 파묻을 듯이 숙이고 있던 뤼델의 시야에 비치던 그 자신의 상체였다.
상체는 깨끗했다.
본래 그렇지 않았던 부분들까지.
"...카하, 하하하..."
주박은 없었다.
어떤 광휘기사의 머리도 참여했던 마지막 의식에 의해, 뤼델은 악마와의 단절에서 해방된 것이었다.
뤼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웃기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군... 응?"
어둠 속에서 말거는 존재들과의 삶 속에서 익혔던 그 특유의 말투.
"이제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는데."
따사롭게 쏟아지는 햇볕에 비친 치아가 빛났다.
뤼델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부서진 벽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마주 보았다.
"이제... 난 자유롭다."
혼잣말. 되묻는 말투. 끝없이 흔들리는 정신.
그의 뒤틀린 어린 시절이 남긴 많고 많은 자취들은 그대로였지만, 뤼델은 분명히 그중 하나에서는 벗어났다.
이제 뤼델은 빛에서 두려움을 찾지 않았다.
그 쏟아지는 빛살 아래로, 뤼델의 한 점 문신 없는 상체가 드러났다.
뤼델은 웃음을 깊게 머금으며 주박이 있던 곳을 긁어내렸다.
거무죽죽한 피부에 허옇게 남는 손톱 자국.
뤼델은 그 얕은 상처에서 그 무엇보다 깊은 만족을 느꼈다.
무한한 제물을 가진 부두술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방이다."
.
.
.
522년 9월 35일 오전,
차르탄은 불행했다.
그는 최근 들어 자주 불행했지만 그날은 그의 근 한 달 중에서 가장 불행한 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상황은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그 어떤 귀족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차르탄은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해야 했고, 그래서 그는 혼란스러웠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제국의 신민 차르탄이 위대하신 여러분을 뵙습니다."
8만의 성기사단과 10만의 제국군, 총 18만 대군이 그의 앞에 있었다.
윈덴은 일찍이 그런 대병력을 가져본 적이 제국 500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렇기에 그 엄청난 인원을 데리고 거병식을 할 장소 또한 마땅치 않았다.
덕분에 차르탄은 그나마 넓은 대광장을 꽉 채우고도 남아 좁은 길목 구석구석에서 무기를 꼬나쥐고 있는 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군집보다는, 자연 경관 같은 풍경이었다.
투구로 만들어지는 지평선. 무수한 말들의 숨결에서 태어나는 거대한 바람 소리.
코끝에 감도는 비릿한 쇠 내음과 말 냄새.
바람의 백작은 그것이 전쟁의 냄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군대는 반드시 전쟁과 함께 등장하며, 그 예고된 피비린내는 강철로서 자신을 암시하고 있다.
허리춤에 매달린 제국검. 말에 얹혀진 장창. 무거운 방패와 검회색의 강철 갑주.
활과 화살. 갈무리된 난폭함. 눈꺼풀 뒤로 가려지는 비정함.
성기사단에서는 그 특유의 기품과 근엄함이 있어 몰랐지만, 그로서는 처음 보는 대규모 제국군에서 차르탄은 그제서야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군대는 살인하는 집단인 것이다.
차르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그를 향해, 각 군단의 우두머리들이 인사했다.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백작님. 대군단장 마버크 드란입니다. "
"백깃의 영광을, 신성관 프릴이오."
간단한 대답에 앞서 차르탄은 갑자기 어떤 고민에 빠졌다.
제국 귀족 편제와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권력 구분이 확실한 제국군과 달리 종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 인삿말, 엇갈리는 존대와 하대, 그리고 특유의 오만함.
윈덴 백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요즘 들어 저의 영지에서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일들 탓에 제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들까지도 노하신다는 소식을 들려오곤 하더군요, 정말이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가 이 도시를 관할하기에 그릇이 모자란 탓이겠지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들'은, 그것이 까마득히 높은 권력을 말하는 것인지 주를 말하는 것인지를 불분명히 하려는 찰나의 고심책이었다.
그것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신성관 프릴은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을 가만히 깜빡이며 말했다.
"아니, 형제님의 탓이 아니오. 불온한 자들은 저 위대한 페일에서도 발생하는 법이오, 끔찍한 투르샤먼 사태처럼. 그리고 우리 신의 깃털들은 그 참람된 이들에게 신의 마지막 은혜를 알려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말이오."
그에 이어지는 중후한 목소리. 대군단장이었다.
"그렇습니다, 바람의 백작님. 당장 하늘 같은 제국에 도전하던 잡것들도 얼마든지 있어왔지 않습니까? 남해의 해적들, 불법 마법사, 반신의 사제들... 그리고,"
"예, 이교도들이지요. 제국의 공적을 꼽으면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이들이지요. 그만큼 드물기도 합니다만."
프릴은 마버크가 신에 반한 일에 대해 제국의 반란자들을 비하는 것이 아니꼽다는 눈으로 흘겨보다가 말을 얹었다.
"그런 이교도들을 징벌하러 이 깃털이 이렇듯 방문한 것이오, 바람의 형제."
프릴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옆에 당당하게 서 있던 그녀의 말을 옆으로 약간 밀었다.
주춤대며 시야의 옆으로 비켜서는 말의 뒤로 18만 대군의 위용이 거리낌 없이 드러났다.
스무 명의 광휘기사, 사백 명의 신성기사. 그리고 일만 명의 집행관.
그들은 갑주에 새겨진 문양이 약간 더 빛난다는 점 이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야말로 순수한 위력과 당연한 존경의 증거. 그들은 신의 이름 아래 하나로 귀결된 백색의 사도 같다.
제국군은 이에 정면으로 반한다.
드문드문 나부끼는 황실의 깃발을 제외하면 그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할 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대장간에서 주조된 이후로 그 차가운 빛깔을 단 한 번도 감추어본 적 없는 강철 본연의 색으로 일색인 군단.
중장기병과 경장기병, 장창병들과 궁병들, 그리고 마법사 부대.
전원이 각기 다른 갑주를 걸치고 있어 개개인들이 부대에서의 역할로 뚜렷이 구획된다.
차르탄은, 그제서야 실감했다.
그의 영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백작은 그 사실에 전율했다.
그런 그가 이 엄청난 군세의 모습에 대해 무어라 평하려는 순간이었다.
"아하, 이거 죄송한데, 길 좀 물읍시다."
갈라지고 음산한 목소리.
차르탄과 두 지휘관들은 그 말이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말을 탄 채로 박제된 짐승을 품에 안고 있는 괴한이 그들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투거덕, 투거덕, 투거덕ㅡ
차라리 시체 같은 몰골의 말.
남자가 입을 열자, 프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마기... 아주 짙은...!'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길 좀 물읍시다. 고해를 하고 싶은데, 가까운 인근에 어디 교회 없습니까?"
-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정말 많이 늦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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