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제물 부두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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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파뤼투나읫
작품등록일 :
2024.10.01 11:48
최근연재일 :
2025.01.17 18:12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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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글자수 :
215,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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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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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불씨

DUMMY

전혀 조용하지 않은 오후였다.


무수한 전쟁의 굉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페일의 승리를 짐작한 차르탄은, 그제서야 뻣뻣하게 굳은 자세를 고쳐 앉고서 입을 열었다.


"...데로스. 자의 주군이 한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옆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보좌관이 고개를 돌렸다.


"떳떳하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겠지요."


"역시 그렇겠지?"


윈덴 저택의 집무실에서, 차르탄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말했다.


그런 주군이 약간 안쓰러웠던 데로스는 손수 백작의 시가를 건네고는 불을 붙였다.


백작은 눈으로 감사를 표하며 그것을 빨아 올렸다.


"후우ㅡ."


가시성을 띠게 된 한숨.


차르탄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미치광이 놈들이랑 말을 오래 섞으면 안 됐었는데."


"혁명국들의 사절단 말씀이신가요?"


"염병할, 혁명 좋아하네! 그건 반란이야! 내 평생 그 정도로 노골적인 반 황제 성향 인물들은, 그것도 사절로 온 양반들은 정말 처음 보는군!"


데로스는 말없이 탁자 위의 재떨이를 차르탄 쪽으로 밀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차르탄은 시가의 재를 탁탁 털며 흥분을 약간 가라앉혔다.


"그래, 솔직히, 그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것까지는 별로 걸리는 게 없었어. 반신의 사제니, 마법사니... 뭐 어떤가, 나는 바람의 백작인데. 그런데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이, 괴상한 출신은 십중팔구 괴상한 요설을 늘어놓는다는 거야..."


대화는 약간 어색하게 끊긴다.


그리고 보좌관은, 주군의 그런 식의 태도에 약간의 이채를 느꼈다.


"..."


데로스는 다시 재떨이를 제자리로 밀어 놓았다.


"하지만, 백작님. 아무리 윈덴의 세평이 간신히 적대적이지는 않은 수준이라고 해도, 백작님의 권위는 여실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믈스믈 흐르던 담배 연기가 뚝 끊겼다.


천천히 뱉던 숨을 다시 들이마신 것이다.


잠시 동안의 정적.


백작은 다시 연기를 뱉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지?"


데로스는 그녀의 주군에게 몇 발짝 더 다가갔다.


차르탄은 어깨를 약간 움찔했다. 그녀는 보통 심문할 때에 그런 위치로 다가오곤 했다.


"백작님은, 원하셨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물리쳐 버리실 수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들보다 더 권위 낮은 자를 찾기도 어려운 사제와 날강도들이고, 백작님은 어찌되었던 고위 귀족이십니다."


담배 연기가 다시 끊긴다.


"백작님, 백작님은 그들의 그 해괴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으셨던 거 아닙니까?"


바람의 백작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수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그리고 반절쯤 짧아진 시가를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그냥 어이가 없었을 뿐이야."


보좌관은, 놀랍게도 미소를 띠었다.


그녀를 아는 자들은 정말 대경실색할 일.


둘러댈 말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던 백작은 갑자기 눈앞으로 내려오는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데로스는 백작이 물고 있는 시가를 제 손으로 집어 가져갔다.


숨결이 끊긴 시가의 불티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백작은 이 방자한 짓거리에 대해 무어라 말해야 하나 입을 뻐끔거렸지만, 그가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보좌관을 제대로 꾸짖은 기억이 없었다는 사실만 되새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얼빠진 질문을 하고 말았다.


"무슨... 무슨 짓이지, 보좌관?"


데로스는 싱긋 웃으며 꺼진 시가를 재떨이에 비스듬히 걸쳐 놓고 말했다.


"바람의 사내라는 거군요. 백작님은 어떤 열기를 보고 계신 것 아닙니까?"


"...열기라니?"


"흐응, 백작님. 들불은 어떤 조건에서 번지던가요?"


차르탄은 지금 주군의 시가를 마음대로 입에서 빼가 놓고 이제 수수께끼 놀음까지 하려 하는 그녀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얼떨떨하게 답했다.


"...마른 들이지."


데로스는 차르탄의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예, 그렇지요. 불길은 풍요로운 땅을 덮치지 않습니다. 이미 불길이 휩쓸기 전에도 메말라 가던 목마른 땅에서 피어오르는 것이지요."


"이봐, 데로스.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ㅡ"


"마치, 지금의 제국처럼요."


백작의 잘린 말의 뒷부분은 그대로 휘발되어 사라졌다.


정곡을 꿰였기 때문이다.


차르탄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한 번만 더 제국에 관련된 망언을 내뱉는다면 자네가 말한 백작의 권위라는 것을 사용해 자네를 이 도시에서 내쫓아 주겠어, 데로스."


데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백작님?"


완강하던 백작의 굳은 입매가 약간 씰룩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로스는 백작의 피다 만 시가까지 집어들며 조용히 말했다.


"선대의 폐하도, 지금의 폐하도. 난폭하기로는 제국력 전체를 따져 보아도 그분들보다 난폭한 자들은 찾기 힘든 분들이지요."


백작의 입에 약간의 미소가 번졌다.


"꼭대기의 분노는 아래층의 장작을 태우며 타오르는 법. 제국은 메마르고 갈라졌습니다."


퐁ㅡ


멋스러운 동작으로 점화통의 덮개를 연 데로스는 그것을 사용해 시가에 불을 댕겼다.


데로스는 그것을 백작에게 다시 내밀며 말했다.


"방금 떠난 그분들이 자신들을 무어라 지칭했었지요?"


백작은 시가를 받아 이빨 사이에 끼웠다.


"...'혁명의 불꽃'."


이제 차르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데로스는 덩달아 웃으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백작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배짱도 좋으십니다, 주군. 세상이 불타는 꼴을 보시겠다는 것입니까?"


백작은 너울 같은 연기를 뭉개뭉개 피워올렸다.


그것은 새어나오는 웃음 때문이었다.


"나는, 하핫! 잘 모르겠군, 보좌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데로스는 대답을 독촉하지 않았다.


"어떤 커다란 불길이 번질 거라는 것. 그래, 제국은 이제 오래 해먹었어. 522년이라니, 반천년의 역사야. 곪을 때가 되었지."


"아하하하."


"크하, 그래. 자네는... 우수해. 나도 잘 모르던 내 속을 알아차릴 만큼. 하하핫!"


백작은 시가를 내려치듯이 재를 털며 웃어젖혔다.


"내 안에도 도시의 바람이 불어닥치는 모양이야, 청년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정말, 정말... 철없는 소망이 하나 생겼다고 해야 할까?"


데로스는 이제 다시 그녀의 위치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읊조렸다.


"말해 보시죠."


"이번 생에서, 제국의 마지막 순간이나 최초의 순간을 볼 수도 있을 것만 같아졌다. 그 혁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느꼈어."


데로스는, 정말 놀랍게도 어깨를 떨며 웃었다.


백작마저 약간 얼떨떨해 하던 찰나, 데로스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크핫!"


백작은 씨익 웃으며 다 타버린 시가를 던졌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데로스였지만, 그녀 역시 윈덴의 정열을 품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차르탄은 외투를 펄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멀리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전쟁이 불어닥친 윈덴의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싶을 만큼 고요했고, 덕분에 이제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어떤 점들은 아직 간신히 보이고 있었다.


"...혁명의 불꽃이라."


데로스는 백작의 의자를 정리해 두며 말했다.


"저는, 재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작님의 행동 말입니다."


차르탄은 고개를 약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하, 사탄마귀에 대해 결국 온갖 걸 다 알려줘 버린 것 말이군. 헌대, 재미있다고?"


"훌륭한 처신이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국을 혼돈에 빠뜨리는 첩경에 대한 평가로는 말이지요."


힐난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것을 말한 자도 들은 자도 전부 짙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조만간 큰불이 날 거다. 불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면..."


"제국을 삼키는 화마가 되겠지요."






.

.

.






뤼델은 그의 앞에 선, 당도했을 때는 십팔만이었으나 이제 그렇지 않은 이들을 향해 소름 끼치는 웃음을 던졌다.


"카하, 크하학! 어, 해명하자면 말이야, 저것들이 공격한 거라구. 카핫! 아무 짓도 안 했다면 이런 사달까지 나진 않았어."


그의 주변에 흩어진 8,000 하고도 수백 명의 사체 조각들.


그 지옥도 같은 광경 속에서 웃어젖히고 있는 뤼델의 모습은 각별했다.


마버크는 그런 그를 향해 무어라 떠듬떠듬 말했다.


"...전군."


그의 덜덜 떨리는 깃발이 천천히 올라간다.


"후퇴한다, 후퇴한다ㅡ!"


지휘 계통은 정서적으로 박살 난 상태와 다름없었다.


코앞에서 명령을 외쳐도 그 문장이 라노타인지 고대 어인지도 구별할 수 없을 상태인 부관들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작용으로 깃발 신호를 따른다.


당장 탈영해 달아나고 싶다는 표정의 병사들은 그 기수처럼 극도로 긴장한 말들과 함께 천천히 마버크의 외침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측면에서 보자면 꾸물대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


뤼델은 그 진빠지는 후퇴를 보며 느물느물 웃었다.


제국군의 처신과 성기사단의 처신이 얼마나 다를지를 이해했기 때문에.


낙마했던 프릴이 숨가쁜 목소리로 뤼델을 불렀다.


"...고한다."


그녀를 부축하던 성기사들이 황급히 그녀를 붙들었다.


신성관은 힘없는, 하지만 단호한 동작으로 그들을 뿌리친 후 말에 올랐다.


그리고 칼날을 뽑아들어 뤼델을 겨냥했다.


덜덜 떨리는 칼끝.


하지만 목소리는 조용한 만큼 진중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대를 형제로 부르지 않노라. 신과 세계를 등진 자여, 그 죄의 무게를 느껴라."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성기사들의 눈에서 각기 다른 빛들이 스치운다.


그것은 앞으로 행할 공격이 개인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임을 밝히는 선언.


교회의 기사단인 그들로서 그 자신들을 그토록이나 전율케 하는 문장도 드물었지만, 또한 그들의 앞에 펼쳐진 광경만큼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도 드물다.


프릴의 말은 계속된다.


"신의 빛 아래에서, 그대에게 전해질 은혜는 없다."


뤼델은 깊게 웃었다.


언젠가 하스엘이 그가 준비한 악몽으로 뛰어들 때 외쳤던 그 말.


"칼날을 받으라!"


그것은 체내 신력을 이끌어내는 영창처럼, 악령의 의지를 일깨우는 주문처럼 성기사들의 본성 같은 것을 건드렸다.


우리는 신의 기사단. 신의 의지가 담긴 공격에서, 우리는 그저 검이다.


신성관의 칼날이 겨누는 곳을 향해 회광반조처럼 신의 의지가 달려들었다.


뤼델은 입술을 핥으며 생각했다.


이번엔 이만 여기까지.


발끝으로 느껴지는 땅의 울림을 느끼며 뤼델은 칼날을 쥐었다.


그리고, 허리를 한껏 숙여 그의 발뒤꿈치, 종골건(踵骨腱)에 칼날을 대었다.


그러고는 마치 가벼운 작별인사인 양 입을 열었다.


"또 보지."


당겨지는 칼날.


투둑ㅡ 쩌어억ㅡ


힘줄을 끊어 낸 칼날이 발꿈치를 깊숙히 파헤치며 반대편으로 빠져나온다.


끈적하게 떨어지는 유혈.


뤼델은 그 피가 흥건히 묻은 칼날을 허공에 그으며 말했다.


"{가니온}"


그가 그 가니온의 이름을 말했을 때의 모든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검은 틈이 벌어져나왔다.


그것은 악마의 자취였으며, 하계의 차원을 타넘어 현세의 공간을 접어 달리는 괴기무쌍한 부두술이었다.


다리를 끊어서 만드는 세상 어디로든 통하는 통로.


그 존재 자체가 모순인 악마다운 권능이다.


"그럼, 안녕히."


그의 가슴을 향해 달려드는 첫 번째 칼날을 바라보며, 뤼델은 틈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작가의말

종골건은 아킬레스건이라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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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거성의 아래 24.12.26 16 0 12쪽
36 나포되다 24.12.22 17 0 11쪽
35 조용하고 처절한 말들 24.11.27 14 1 11쪽
34 딸려 가려면 이빨을 붙잡으라 24.11.25 17 1 12쪽
33 최후의 여인과 최악의 사내 24.11.20 21 1 11쪽
32 안전불감 24.11.19 20 1 12쪽
31 범굴에 들어가려면 24.11.15 20 1 13쪽
30 계약은 성립되었다 24.11.12 20 2 12쪽
29 시체매 공작 24.11.11 21 1 11쪽
28 세상이 저버린 자들 24.11.09 22 1 12쪽
27 너무 미치진 말게 24.11.07 22 1 12쪽
» 불씨 24.11.05 26 1 12쪽
25 아디젤 24.11.04 28 1 14쪽
24 전장의 이념 24.11.03 32 2 11쪽
23 마귀와 세례자 24.11.03 33 2 12쪽
22 마귀와 전쟁한다는 것은 24.11.01 36 3 12쪽
21 대담한 광태 24.10.31 45 3 12쪽
20 길 좀 물읍시다 24.10.31 42 3 13쪽
19 교황의 분노, 황제의 준동 24.10.29 48 3 11쪽
18 사탄마귀가 돌아왔다 24.10.28 43 5 13쪽
17 아무도 살아 나갈 수 없다 +1 24.10.27 41 3 13쪽
16 번개 치는 낮 24.10.26 43 3 11쪽
15 절체절명 24.10.25 45 4 12쪽
14 사면초가 24.10.24 44 5 12쪽
13 뒤바뀐 추격전 24.10.23 45 4 12쪽
12 의심과 말로 24.10.22 41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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