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굴에 들어가려면

제국이 불어오는 바람을 관조하며 제 살을 찌를 준비를 하고 있는 때에, 바람은 빛을 향해 불었다.
서부 제후국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은 페일의 성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은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지령에 따라 준동을 달리하고 있었다.
온갖 성경의 구절들과 영화로운 비유들로 점철된 지령서들 중 가장 직접적인 내용을 받은 곳은 서부의 북쪽이었다.
안디오. 그 아리따운 여인들과 낭만적인 사막의 노래들로 유명한 곳.
서쪽으로는 귀신 숲. 동쪽으로는 안디오 사막과 맞닿아 있는 그 도시는 모험가들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미답지에 발을 들이고 허풍과 낭만으로 가득 찬 노래들을 끌어안고 돌아오는 모험가들의 유쾌함이 짙은 그 도시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사막의 여인들.
억척스럽지만 기품 있고 풍족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안디오의 처녀들은 도시를 지나는 모험가들의 행복한 늪이다.
그랬기에, 풋내기 모험가 빌 허츠가 주점 한켠에 앉아 종이뭉치를 팔락이고 있는 한 여인에게 직접댄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안녕, 아가씨. 술도 없이 낙타 고기라니, 내가 한 잔 살까?"
그녀의 생각은 좀 달랐지만.
쿠당탕탕!
넘어지는 의자와 쓰러지는 원형 테이블.
그것들을 반쯤 부숴 놓을 기세로 일어선 그녀는 종이를 숨기며 검집을 움켜쥐었다.
불쌍한 빌은 대경하여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무슨 수작입니까!"
"어이쿠, 죄송, 죄송합니다!"
여인은 움켜쥔 검집에 더욱 힘을 주며 고함쳤다.
"양 손을 들고 물러서십시오! 다가오면 베겠습니다!"
빌은 황망히 양 손을 들어보인 채 어적어적 기어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소란 덕분에 주점은 잠시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즐겁게 담소를 나누던 입들은 하얗게 다물려 있고 웃음짓던 눈들은 전부 여인의 검집에 닿아 있는 손만을 바라보고 있다.
"..."
"..."
먼저 입을 연 것은 주점의 주인인 니스였다.
"저어, 손님? 어떤... 무슨 일이시죠?"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부 얼어붙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여인은 헛기침과 함께 검집에서 손을 떼었다.
"실례했군요."
여인은 엷은 망토 아래에 가려져 있던 갑주의 사이에서 은편 네 닢을 꺼내 니스에게 건네었다.
그녀가 주문한 낙타 요리의 값이었다.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은 니스는 등을 돌려 주점을 떠나고 있는 여인의 뒤통수를 볼 수 있었다.
소란이 떠나간 주점. 하지만 사라진 왁자함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니스의 주점에는 이제 널브러진 비품들과 울상이 된 빌과 자욱한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색거리도.
니스는 손님들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망토 아래의 흰 갑옷, 분명히 빛이 났어.'
니스가 알고 있는 형태의 성기사 갑옷은 아닌, 말하자면 경량화된 형태였지만 그 신묘한 빛은 분명히 신성력의 것이었다.
턱을 어루만지는 손가락.
차츰차츰 돌아오기 시작하는 대화들을 들으며, 니스는 무언가 갈피를 잡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윈덴에 난리가ㅡ'
'이교도가 발생해서 성기사단이ㅡ'
니스는 탄성을 질렀다.
"...그거였군?"
그녀는 무언가 지령을 받은 성기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빌의 의도야 어찌됐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이민 것은 군의 지령서를 훔쳐보려는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과민 반응이라니.
니스는 그 사안에 대해 조금 더 골똘히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자신의 남성적 자존감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채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빌을 조금 달래 줘야겠다고도 생각했다.
.
.
.
뤼델은 그가 처음 당도했던 미림의 외곽지 마을의 광장 한복판에 퍼질러앉은 채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상인들의 외침들과 열정적인 호객 행위, 영원할 것 같은 흥정들로 떠들썩하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눈엔 눈물이 그렁하다.
그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
뤼델이 거리에 나타난 이후 그에 대해 속삭이기라도 했던 이들은 얼굴이 보랏빛이 되어 쓰러져 버렸다.
그를 대놓고 피해 다니려던 이들은 갑자기 목덜미를 찌르는 독충의 꿈틀거림에 기겁해야 했고,
마을을 빠져나갈 작정을 했던 이들은 다음날 길게 뻗어서 광장에 널브러져야 했다.
뤼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술 도구(그것은 설명하자면 해골로 빚은 피리처럼 보였다)로 그들의 중독을 해결해 주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고마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따지고 들려는 용자도 없었다.
결국 요지는 명확했던 것이다.
내게 신경 쓰지 마라.
상인들은 영리함보다는 약삭빠름이라 평가받을 수 있을 태도로 뤼델의 의도를 따랐다.
그리고 동시에 등 뒤에 도사리는 너무 가벼운 죽음에 진저리쳐야 했다.
그리고 뤼델은, 그들의 고통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한가하게 앉아서 그의 단도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날이 많이 갔군."
그것을 한낮의 햇빛에 이리 저리 비춰 보던 뤼델은 그것을 입 안에 넣었다.
가볍게 입을 찢은 뤼델은 허공에 선을 그었다.
"{가니온}"
허공에 벌어진 심연의 틈 속에 손을 집어넣은 뤼델은 가방 뒤지듯 그 하계의 이차원을 휘저었다.
이윽고, 그가 찾던 것이 손에 닿았다.
현상의 세계로 돌아오는 손에 들린, 작달만한 숫돌.
뤼델은 그것을 무릎에 얹고 혀를 씹었다.
두루룩ㅡ
피와 침으로 숫돌을 적신 뤼델은 그대로 표면에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떠들썩하고 목가적인, 그리고 살벌한 시장터 풍경.
얼마 후, 뤼델은 백색소음 같은 상인들의 외침들을 들으며 잘 연마된 칼날을 들어올렸다.
"죽이는데."
벌겋게 번득이는 칼날을 잠시 바라본 뤼델은, 그것을 자신의 눈 아래로 쑤셔 넣었다.
예리한 칼날은 부드럽게 들어갔다.
살갗을 파고든 칼날을 안와에 걸쳐 지렛대처럼 눈알을 밀어내며 읊조려지는 조용한 이름.
"{듀크}"
꺼림칙한 소리와 함께 안구가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을 배회하던 시체매들 중 하나가 급강하하며 날아들었다.
잡동작 없는 모습으로 눈알을 파먹은 시체매는, 마기의 분출과 함께 인간의 눈을 갖게 되었다.
부름이 없다면 그들은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다.
대가와 함께 불러지는 이름이 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시체매 공작의 의지에 따라 하수인 벌쳐가 된다.
벌쳐는 핏기 가득한 부리를 열어 말했다.
[질문하라. 세 번째까지 허용한다.]
뤼델은 눈두덩이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는 감각이 싫어 왼눈을 가린 채 질문했다.
"지금, 어떤 세력들이 나의 거취를 파악했지?"
듀크의 권능을 나눠 가진 벌쳐는 음성을 빌어 그것을 드러내었다.
[제국군은 파악하지 못했다. 페일은 파악했다. 그들의 추적자 성물이 거의 거취를 명확히 드러내었다.]
부리가 닫히고, 벌쳐의 한쪽 눈이 붉게 물들며 감겼다.
뤼델은 그 단순하기에 막강한 권능의 발현으로 인해 주변에 자욱하게 번진 마기의 흐름을 느끼며 두 번째를 질문했다.
"제국군과 성기사단의 향후 3달 이내의 목표는 대략적으로 어떻게 되지?"
[제국군은 최대 200만의 제국군 병력을 이끌고 너의 처단을 빌미로 서부 제후국들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페일의 성기사단은 전원 세례자로 구성된 특수 부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너를 교황성으로 압송할 암살자 병력들을 추리고 있다.]
벌쳐의 남은 눈 한 짝까지 감겼다.
벌쳐는 양안시 모두를 잃은 모습으로, 그리고 동시에 그에 대해 일말의 유감도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다. 신중하라.]
뤼델은 눈알 가리고 있던 오른손을 치웠다.
그 아래에는 멀쩡히 차오른 안구가 껌뻑이고 있었다.
"신중?"
[그것이 마지막 질문인가.]
"아냐, 아냐, 아냐. 제기랄, 융통성 없는 새 같으니."
뤼델은 턱을 긁적이며 질문했다.
"세례자 부대는 오래 걸릴 것 같고... 그 암살자 무리라는 게 언제 내게 도달하는 거지?"
[오늘 밤.]
그 말을 끝으로 벌쳐는 고개를 떨궜다.
시체매 특유의 기다란 목이 무정물처럼 떨어져 까딱대는 광경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두 갈래.
사라진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벌쳐였던 시체매는 죽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피조물의 육신으로 악마의 권능을 받아들였던 짐승의 말로였다.
뤼델은 그런 벌쳐의 까딱거림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밤이라."
뤼델은 그의 멋진 저택을 돌아보았다.
마을의 대부에게 소유된 대저택이었지만 뤼델은 큰 상관 없다는 태도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 저택을 차지했었다.
대부는 그에 대해 별로 반대할 의지는 없어 보였고, 그래서 그곳이 뤼델의 집이었다.
뤼델은 그 으리으리한 건물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시체매의 사체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놓은 뤼델은 점점 뻣뻣해지는 다리를 이리저리 비틀어 제대로 세워 놓고 그 기다란 목을 받쳐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뤼델은 시체매의 턱을 받치지 않은 다른 손으로 부리를 잡고 까딱였다.
"범굴로 간다."
나직한 킬킬거림.
뤼델은 그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비웃으면서도 그 짓을 이어갔다.
"범굴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까딱대는 손가락.
"범에게 물려 간다."
이제, 세 번째 질문이 남았다.
뤼델은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웃음을 가득 띄운 채 칠문했다.
"날 물어 갈 범은 언제 온다지?"
죽은 부리가 산 자의 의지로 여닫힌다.
"오늘 밤."
.
.
.
사막의 밤은 그 가열찬 낮에 대한 복수처럼 차갑다.
구름이 없는 사막의 하늘은, 다만 모래바람으로 혼탁하여 그리 청명하지는 못하다.
어쨌든 별들은 가득했다.
안디오의 밤.
어둠을 가로지르는 낙타조차도 한 마리 없는 그 매서운 차가움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수신호를 주고받는 무리들이 있었다.
총합 여덟 개의 그것들은 모두 정확했다.
"맞군."
"맞군."
"맞군."
그들은 두터운 베일로 되어 한 줌의 빛도 투과시키지 않는 망토를 단단히 여미며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페일의 암살자들, 그것이 그들의 임시 명칭이었다.
여덟 중 하나, 금발의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입을 열었다.
"누가... 마법사지요?"
검은 후드까지 둘러쓴 남자가 손을 들었다.
다른 이들은 약간씩 꺼림칙해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에서 그쳤다.
페일이 그 엄격함을 내리누르고 마법사까지 기용하게 된 것은 그 심각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성기사들 사이에서 지팡이를 꺼내드는, 꽤나 우스운 처지가 된 마법사 피립스는 그렇게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텔라스 옴.>"
그의 지팡이 첨단에서 그의 의지를 반영하여 빚어낸 신력 조형물이 유체처럼 뿜어져나왔다.
투명화의 베일.
성스러운 암살자들은 그 신묘한 마법을 불쾌감 반 생경함 반을 담을 얼굴로 바라보았다.
드넓은 천은 천천히 내려와 그들의 머리를 덮었고, 그들은 밤 속에 스며들었다.
"완료되었소."
"좋아. 이제 그 몸종은 언제 오는 거지?"
"저기에 오는군."
그들은 서로의 뒤통수에 시야가 방해받을 일 없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여덟 마리의 말고삐를 쥔 채 열심히 두리번대며 걸어오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남은 한 손으로 손나팔 비슷한 것을 만들어 외치듯이 속삭였다.
"모험가님들ㅡ 모험가님드흘ㅡ"
누군가가 마법사가 있음직한 곳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받아 오시죠."
약간 주저하는 숨소리.
하지만 단호한 침묵 속에서 그 무언의 항의는 무언으로 묵살되었다.
마법사는 한숨을 쉬며 보이지 않는 몸으로 소년에게 접근했다.
"모험가님드흘ㅡ 은전 닷 편 주셔야지효오ㅡ"
그 비밀 약속 때문에 차마 외치지 못하고 열심히 속삭이는 그 목소리.
마법사는 자신에 대해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대답했다.
"말을 받으러 왔다."
소년은 소스라쳤다.
"예? 어, 어디에 계시죠?"
"...여기."
남자의 비수가 밤보다 비정하게 날아들었다.
소년은 보이지 않는 칼날에 찔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크윽."
마법사는 잇새로 새는 신음을 삼키면서도 말들을 끌고 다가왔다.
그런 그에게 밤이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
말들 역시 베일 아래에서 투명해진다.
한 소년이 쓰러진 밤, 일곱 명의 살해 방조자와 한 명의 살인자가 말을 달렸다.
모래에 자취만 남기고, 밤을 스치는 잔영은 그리지 않은 채, 그 살인보다 무거운 이단의 죄를 벌하러.
- 작가의말
갑옷이 빛나는 암살자는 좀 머저리 같지만 페일의 상징이니 바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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