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포되다

제국력 522년 10월 2일 밤.
어떤 기념일이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짜는 아니었지만 어떤 두 남녀에게는 그러했다.
그들은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감을 말할 수 있는 친우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앤은 어느샌가 말들이 걸음을 멈춘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더듬더듬 말했다.
"...타락한 성물의, 세례. 그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성물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뤼델은 그녀가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이질적인.
할 말에 신중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시간은 없군, 응? 앤. 그 성물 조각들, 어디에 챙겨 뒀지?"
앤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뤼델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어딘가에 챙겨 뒀을 건 알아. 의지할 데 없다는 건, 모든 것을 적대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굳이 쓰러진 내 끔찍한 상처를 헤집어 가며 성물을 뽑아 내고 수레에 실어 온 네 수고는 절대 헛되지 않았어, 응? 덕분에 이렇게 수다도 떨고 있잖아."
뤼델의 혈관들이 한 데 모이며 앤의 양 손으로 향했다.
적색토를 파헤치고 올라온 지렁이 같은 그것들이 휘감아 쥐고 있는 말고삐들을 엉겁결에 받아든 앤은 다시 들려오는 뤼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수레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어. 너도 몰랐을 것 같으니."
앤은 입술을 깨물었다.
뤼델의 짐작대로였다.
그녀는 방향보다 별을 보며 현실에서 멀어지기 위해 무작정 움직이고 있었다.
뤼델은 혈관들이 완전히 되돌아와 평범한 인간의 손이 된 오른팔로 앤의 머리칼을 쓸었다.
"페일로 가자고, 앤. 그리고 내가 갇힌 곳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찾아와 보도록 하고, 응?"
금빛 머리칼에 살며시 닿아 있던 손이 떨어진다.
앤은 영문 모를 상실감을 느끼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우린 아마도, 나눌 말이 많을 것 같으니."
"..."
밤바람이 스치운다.
암흑의 피륙처럼 살갗을 쓸어만지는 바람은, 하지만 별을 가리지는 못한다.
지평선의 끝자락까지 흩뿌려져 명멸하는 별들 속에서 방향을 찾는 손가락이 있었다.
그 손가락을 따라, 사탄마귀와 페일의 여인은 교황성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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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력 522년 10월 10일, 페일은 사상 최악의 손님을 맞았다.
그 위대한 거성을 향하는 사절은 온갖 휘황한 성물들과 신성 무구들, 세례자들로 둘러싸여 있어 낮 속의 또 다른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물다섯 개의 거대한 군용 마차의 행렬.
끝없이 울리는 신성한 나팔의 낮은 울음과 날카로운 눈빛들.
그 모든 것들은, 대행렬의 중간 부분에 실린 채 호송되고 있는 어떤 남자 때문이었다.
나지막이 들리는 지글대는 소리.
치이이이이이익ㅡ
신성한 검날과 쇠사슬, 심지어 급하게 주조된 신성한 족쇄로 둘러싸인 남자는 마치 대장간의 백열하는 쇳덩이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사악한 영혼을 징벌하는 신의 진노, 성물의 반응이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푸념했다.
"이봐, 끄윽...! 응? 제기랄,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카악! 내내 화형당하는 기분이라구, 이 개자..."
콰앙!
마차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무장한 성기사가 즉시 뤼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철제 군화가 뼈를 으스러뜨릴 듯 부딪치자 뤼델은 이를 악물며 입을 다물었다.
그 끝에 부서진 성물 조각이 융해되어 부착된 갑주는 그 접촉만으로 버거운 것이었다.
뤼델은 아무래도 악문 이가 부러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크읍ㅡ 후우우..."
그를 앞에 둔 성기사이자 세례자, 마빈은 그 유명한 사탄마귀를 앞두고 있음에 극히 긴장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사탄마귀의 온 몸에 도열한 문신들, 검게 그려진 교회의 문양들이 그를 완벽히 억제할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주박은 그의 마기 운용에 마치 성물처럼 반응하며 그의 영혼을 불사른다 했던가.
그러한 상황에 사탄마귀가 취한 행동은 입에 담기에도 끔찍한 짓이었더랬다.
'...저 자신이 할 수 없으니 부서진 성물에 주술을 가해 마귀들을 부렸다니, 저 참람되기 그지없는 놈.'
마빈은 본래 '추적자' 신성한 나팔이었던 성물 조각들이 곳곳에 부착된 자신의 갑주를 돌아보았다.
황금 원석처럼 백색의 갑주에 비죽비죽 땜질되어 있는 성물 조각들은 정혀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위대한 권위를 한없이 드높이고 있었다.
ㅡ고 생각하던 마빈과 달리, 뤼델은 끔찍하게 머저리처럼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달밤을 지나는 수레 위에서 그와 앤이 짜맞춘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덜떨어진 놈에겐 아까운 성능의 갑옷이라고 덧붙여 중얼대며.
뤼델은 마빈이 제 갑옷을 둘러보느라 주의를 빼앗긴 틈을 타 자신의 새로 덧그린 주박을 돌아보았다.
짜증이 치솟으며 다시금 성물의 분노가 격통으로 다가왔다.
치이이이이이ㅡ
"ㅡ끄...!"
반 세기 동안 마주하고 있던 지긋지긋한 주박들은 잊을래도 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달캉거리는 수레 위, 그 증오스러운 세월들의 버젓한 증거물을 제 의지로 몸에 새긴 뤼델은 그 사이로 시커먼 잉크를 들이부었다.
미림의 문방구 상인은 그의 잉크 병이 신의 눈을 속이는 장난질이 될 거라 예상했을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뤼델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주박의 모사품이 있고 그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그스토랑의 중앙 교회에 다다라 사탄마귀의 생포를 밝혔던 그의 '포획자' 앤은 그 교회의 주교에게 뤼델이 읊은 대로 설명했고, 그 순간부터 앤은 위대해졌다.
'이 극악한 자는 교황 성하의 성스러운 손 안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의 이름으로 새겨진 주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탄마귀가 한 짓은 가히 참람되다못해 저주받아 마땅했습니다.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주교님? 이자는 기운이 다 된 성물을 빌어 모종의 주술적 간교를 부려 마귀들에게 그 더러운 목소리를 전했던 것입니다...'
웃기는 일이지.
"후우우..."
성물의 고통이 약간 사그라들었다.
뤼델은 그 잠깐 동안의 여유 속에서 쓸모 있는 생각을 짜내기로 했다.
앞으로 행할 계획들을 되짚는 일과 눈앞의 성기사 놈은 언제까지 제 갑옷을 훑어보고 있을는지, 그리고 앤은 어떤 상황일지 등의.
앤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가 태어난 이래 가장 극진한 대접을 받는 중이었다.
그녀 자신도 당혹할 정도의.
앤은 어지간한 농민들의 오두막 거실보다 넓을 듯한 휘황한 마차 안에서 그녀의 찻잔에 주전자를 기울이는 세례자의 손길을 무덤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내면은 인지 부조화와 당혹감, 그보다 더 큰 혐오로 얼룩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드시지요, 샤렐 공."
수십 년간 허락되지 않던 그 성이 너무도 간단히 허용되는 순간.
일곱 살에 교회의 아이가 된 이래 21년간 그저 앤이었던 앤 샤렐은 그토록이나 허무하게 되찾아진 그녀의 성에 대해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앤은 부드럽게 웃으며 목례하고 찻잔에 입을 가져다댔다.
차는 따스하고 부드러웠으며, 또 역겨웠다.
뤼델이 만든 시나리오에 의하면 '사탄마귀를 단신으로 잡아족쳐 페일의 발치에 내던진 세기의 영웅'이 되어 있게 된 앤은 그 하루아침에 생긴 위상이 거북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거북함의 주 원인인, 세례자 시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갑주를 착용하고 계시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샤렐 공?"
"괜찮아요. 오히려 이 편이 봉황님께 더 가까이 닿아 있는 듯하여 기쁩니다."
시녀는 감명받은 듯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 맞은편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주위에는 다섯 명의 시녀가 추가로 앉아 있었다.
단아한 시녀복 아래로 비쳐 보이는 은은한 광휘, 옷 아래 속옷 대신 갑옷을 받쳐 입은 것이다.
앤은 질리는 기분을 느끼며 엷은 숨을 토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안정감이었다.
실패한다면 신의 이름으로 시신조차 남지 않도록 지워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눈 밖에 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도 없는 공포에 떨 필요도 없는.
그리고 뤼델이 그녀가 가지게 될까 꽤나 걱정한, 그 감정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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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또 다시 엄청난 소식에 들썩였다.
먼젓번의 온갖 사건들에 비하면 가히 열광적일 정도로 격렬하게.
당연하다. 패전 소식보다 승전 소식에 지르는 함성이 더 큰 것이 옳으니까.
제국력 522년 10월 11일, 페일은 공식적으로 반백년의 역사 동안 전설로 남아 있었던 사탄마귀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공포했다.
제국은 다시 금빛 영화에 물들 것이었으며, 더 이상 신의 권위에 드리워지는 간특한 그림자 따위는 존재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생각들은 타당했고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흰빛의 비둘기의 발목에 묶여 전 제국으로 흩어진 그 소식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이들은 꼽아 봐야 열 명도 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레드랑 라인의 '아타락' 트롬 위허일이나 제국 칠그쉬의 황제 락사자르 2세, 그리고 앤이 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력한 의심을.
즉 체포의 실패에 대해 가장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 자는, 레드랑의 트롬이었다.
"분명하다. 그가 말했던 자야."
발밑은 가볍게 흔들린다. 대지의 요철들이 빚는 거친 덜컹임이 아닌, 태동 같은 움직임으로.
하늘 아래로 가득한 갈매기 소리, 지상에는 철썩이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
제국 동부의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땅 전부를 타넘고 앉은 대연합 레드랑 라인의 상징 같은 배경이다.
그 레드랑 라인의 수장격 도시, 레드랑의 보석 같은 항구에 정박한 배의 선실에서 한 트롬이 걸어나왔다.
"하팔 선장!"
"트롬? 어쩐 일로 이 시간에 갑판으로 나오셨습니까?"
"그동안 안 나왔던 게 변덕이었던 거지. 지금까지 왔던 페일의 '언사'들을 가져오게. 확인해 볼 것이 있어."
배 위에선 왕으로 군림하는 선장도 그에겐 고개를 조아린다.
유사시엔 선장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도 있는 조타수도, 자신이 없다면 승선한 전원이 꼼짝없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일항사도 그에겐 대들 수 없다.
'파도를 헤치는 자' 아타락의 지위를 가진 트롬 위허일은 배 위의 선장보다 드높으며, 지상의 대공보다도 막강하다.
그런 그에게 하팔 선장은 깍듯이 고개를 숙인 뒤 말단 선원처럼 갑판 너머로 달려갔다.
트롬은 갑판을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배의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물에 부딪쳐 부서져내리는 파도가 규칙적으로 철썩인다.
세상을 담아보인 지 150년이 지난 아타락의 눈에도, 그것은 여전히 질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 오래 된 눈은 파도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어떤 다른 것을 보고 있기도 했다.
나무로 된 가면.
트롬은 파도를 향해, 그 가면을 향해 중얼거렸다.
"...렐린. 당신을 한번 더 만나고 싶군요."
하팔 선장이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트롬 위허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당신이 했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으니까."
신문을 받아든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이는 선장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첫 줄을 읽어내려갔다.
"뤼델..."
- 작가의말
돌아왔습니다. 너무 늦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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