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싼 설전들

'모든 인간들은 신의 아래 평등하다.'
교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이자 성직자들의 그 막강한 권한과 힘을 그들 스스로 억제하는 제어 장치이기도 한 그 이념.
하지만 그런 속 좋은 말들은, 정점에 선 자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위선이 될 뿐이다.
교황과 황제는 그 위대함과 위대함에서 비롯되는 마찰을 비유하는 말로 두 개의 태양이라 불리운다.
그리고 그들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각각 다른 광채들을 거느린다.
제국의 달로 비유되는 황제의 것은 왕의 위세에 준하는 대장군.
그리고 제국의 세 별로 비유되는 교황의 것은, 그 유명한 세 명의 추기경들.
어떤 남자의 생애를 건 증오를 세 몸에 공평히 나누어 받고 있는 그들은, 하지만 평온했다.
신에 가까운 자는 지상의 향기롭지 못한 것들에게 고개를 기울이지 않는 법인 것이다.
ㅡ라고, 추기경 파트라엘 이벤 라시안 페일은 생각하며 짧게 웃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것이 교회의 기본 교리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애당초, 그는 신에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하나였기에 기묘하게도 그런 교리 따위에 얽매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의 도시 페일을 감싼 세 개의 도시들 중 하나인 드윈을 관할하는 그는, 도시 중심의 신성각(神聖閣)의 발코니에 앉아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사로이 부서져내리는 늦가을 오후의 빛살들.
금가락지와 마법적 문양으로 주렁주렁 치장된 손 위로 들려 있는 크리스털 디켄터는 제 안에 담긴 51년 쉬스먼 와인을 은은하게 찰랑이고 있다.
제국 최고의 가구공 파뢰센의 이름이 기품 있게 음각된 성좌(聖座)에 앉은 채, 파트라엘은 최고급 비단 가운을 가볍게 쓸어만졌다.
그리고 그런 성좌 옆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걱정할 것 없어, 차드란 대주교. 선대 추기경 전하들께서 새긴 주박은 아직 건재하다고 하잖나."
"...하지만, 전하."
"아아."
파트라엘은 디켄터를 가락지 가득한 손가락에 끼운 채 손바닥을 보여 대주교의 말을 막았다.
햇살을 온 사방으로 반사시키는 보석투성이의 오른팔이라니.
추기경은 입술을 잘근대는 대주교를 덩그러니 세워둔 채 성좌 왼편에 돌출된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잔을 집어들었다.
손잡이 부분엔 정교하게 도금된 금박 문양이, 받침대 부분엔 섬세한 미적 감각으로 배치된 루비 수정들이 수놓여 있어 아름답고도 사치스러운 잔이었다.
파트라엘은 디켄터에서 일렁이는 오묘한 빛깔의 쉬스먼 와인을 잔에 찰랑찰랑 부어 넣었다.
대주교는 그 간단한 동작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보석의 괴광들에 눈이 찔리는 것을 느끼며 새삼 자신의 검소한 백색 대주교복을 돌아보았다.
잔 아래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 따른 것이 금편 다섯 냥인 쉬스먼 와인을 넘치도록 따른 추기경은 그것을 물처럼 마시며 말했다.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였어, 차드란 대주교. 이 페일이, 위대하고 강대한 페일이 고작 시커먼 형제 하나 따위에 그토록이나 휘둘려 왔다니, 음음, 그간의 패배들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로 일어난 비극들이었을 뿐이지, 진즉에 잡혀서 지하 어딘가에 처박혀 구르고 있었어야 했던 거였지. 안 그런가?"
대주교는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추기경의 말을 교정해 주었다.
"그 모든 것들이 봉황께서 내리시는 시련이지요. 이번 사태는 그 주님의 시련이 특히 담뿍 담겨 있던 것이었고 말입니다. 전하께선 그런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겠지요?"
파트라엘은 그러려니 하라는 표정과 손짓을 하며 와인을 또 한 모금 마셨다.
"...자네는, 그러니까 형제는... 언제나 그렇게 신의 의지를 최우선으로 헤아려 주어서 이 미욱한 깃털을 일깨워 주는군, 음."
대담히 겸손하고도 바람직한 말이었지만 추기경의 눈은 뱀 눈깔 같이 변해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분노는 그의 동공 아래에 깔린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쳐줘 봐야 상급신도 따위가 추기경에게 주제넘게!'
차드란은 등줄기에 돋는 소름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공합니다, 추기경 전하. 저야말로 미욱하고 고르지 못한 깃털이지요. 어줍잖은 믿음과 식견은 이따금씩 주제넘은 교정으로도 불쑥불쑥 이어지곤 하덥디다."
파트라엘은 치켜올라가 있던 눈꼬리를 바로 내렸다.
숙인 대주교의 푸들푸들 떨리는 등줄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은 신의 아래 평등하지. 나 역시도. 다만, 저들이 알아서 조아릴 뿐. 음, 음.'
다시 짓궂은 즐거움으로 기분이 좋아진 추기경은 고개를 들라 말하며 말했다.
"아니, 형제의 그런 점은 신의 은혜를 받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재주이니 그리 자신을 낮출 필요 없어. 그래, 형제가 이리 온 이유가... 보고하러 오는 것도 있었고, 추기경의 확인도 필요하다고 했었지?"
차드란은 뭉텅 잘려 나간 수명이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아, 예. 그렇습니다, 추기경 전하. 사탄마귀의 패배와 감금은 확실하며 재확인의 여지조차 없지만, 위대한 이의 확언이라는 것이 저와 같은 미욱한 깃털들에겐 주의 은총처럼 의심과 위협을 잠재우는지라..."
그 말은 파트라엘의 마음에 들었다.
"좋아, 가 보지."
파트라엘은 성좌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어던졌다.
차드란 대주교는 그것이 더러워질까 허둥대며 받아들려 했지만 가운은 아슬아슬하게 성좌에 걸쳐졌다.
짧게 한숨을 쉰 차드란은 고개를 들어 추기경을 바라보았고, 이번엔 헛숨을 들이켰다.
파트라엘은 천천히 걸으며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그러자 그의 금가락지들에서 황금빛 잔영 같은 것이 물결처럼 퍼져 나오더니 신성적 작용을 하기 시작했다.
성좌의 등받이에 마치 장식품처럼 걸려 있던 갑옷형 망토가 살아 있는 것처럼 날아와 추기경의 등을 감쌌다.
발코니의 한구석에 고아하게 거치되어 있던 신성한 명검이 스스로 제 검집에 들어간 후 추기경의 망토 안으로 소르륵 들어갔다.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차락대며 마찰하는 가락지들.
신성 잔영의 작용이 조금씩 달라지며 테라스의 온갖 요소들이 날아다니며 추기경을 치장한다.
잠시 후, 대주교는 머리에 은백색 개방형 투구를 착용하고 갑옷 망토와 추기경의 검, 강철 장화와 기다란 성배까지 갖춘 파트라엘을 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나태한 대귀족의 모습에서 제국의 별의 모습이 된 추기경을 보며 차드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마,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추기경 전하. 부디 편안히..."
"음? 그런 건 필요 없다. 마차엔 사용인들이나 태워서 날 따라오게 해."
"예, 예? 그게 무슨...?"
"페일을 방문하는 것이 꽤나 된 일이긴 하군, 음음. 이런 질문이나 듣고 말이야. 내려가서 내가 말한 대로 전하기나 해. 따라오기 바쁠 테니까."
이미 기분이 상한 추기경의 뱀 같은 눈을 직전에 봤던 대주교였기에 그는 그에 대해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계단을 따라 달렸다.
그가 살짝 볼 수 있었던 것은 추기경이 발코니 한구석에 쌓여 있는 쇠토막들을 쓸어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카라라라락ㅡ
두꺼운 반지들이 겹쳐 쌓인 철판들에 마찰한다.
곧이어 가락지들을 따라 황금빛 물결이 향을 피운 것처럼 부드럽게 쏟아져내렸다.
가락지 하나하나에 정교하게 음각된 교회의 문장들이 홈을 따라 광선을 그리며 마법 작용을 발현한다.
추기경의 세 도시 중 '요술의 도시'의 이름을 가진 드윈, 그 도시를 관할하는 추기경의 기량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쇠토막들이 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곧이어 강철로 빚어진 철마(鐵馬)가 되었다.
천 개의 철편으로 빚어진 그것은 온갖 이음새들이 벌어졌다 가까워지며 실제 말처럼 터걱대며 걸어왔다.
그것에 올라탄 추기경은, 말을 타고 계단을 내려가는 미련한 짓 따위 하지 않았다.
그는 발코니의 난간을 향해 말을 몰아 뛰어내렸다.
철마는 물 속에서 낙하하는 양 서서히 떨어지며 네 발을 휘저었고, 덕분에 마차 출발 준비를 막 끝낸 대주교는 당혹을 금할 수가 없었다.
"늦군, 늦어."
철마는 드윈의 대로에 닿자 마자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두 대의 마차가 뒤처질세라 내달렸다.
제국 최악의 범죄자를 향해, 제국의 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확실히, 그는 전무후무한 최악의 범죄자이자 사탄이지요."
"그렇기에 당신은 더욱 위대한 것입니다, 샤렐 공. 혹시 옷이 거북하십니까?"
"아, 아뇨. 그저... 조금 얼떨떨할 뿐입니다."
너희의 웃음이.
교황성의 최고급 응접실에서, 앤은 스무 명의 세례자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최고 귀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경량 갑옷은 진즉에 떨어지고 눈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게 되었으며, 엉겨붙은 머리칼이나 핏자국도 완전히 정돈되었다.
건너편 벽에 달린 거울에 어렴풋하게 비치는 자신을 보며, 앤은 만약 그 사탄마귀가 정말로 감옥에서 나와 자신을 찾아온다면 자신을 알아볼 수나 있을지 걱정되었다.
'거짓말인 건 아닐까?'
앤은 억지로 그 생각을 억눌렀다.
하지만 의식은 손에 잡히지 않는 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고 쳐도 가능 여부와는 전혀 달라. 응접을 위해 배치된 인원만 해도 세례자 스무 명이라니.'
앤은 얄팍하게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받치고 깊게 들이켰다.
차는 뜨거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차분한 표정까지 흔들릴 것 같았다.
'교회의 인물이 나에게 존대하는 것 자체도 처음 경험한 일이야. 아예 당장 그가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를 다 말해 주고 끝까지 잡혀 있도록 일조한다면... 나도 이런 대접을...'
'영원히ㅡ'
그때, 찻잔을 내리는 앤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간단한 시녀옷을 입고 있는 세례자들 중 하나의 치마 사이에서 무언가 번득인 것이다.
앤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쏟아지는 찬사의 말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그 번득임이 무엇인지를 찾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알아챘다.
그녀의 빈 찻잔에 차를 따르는 한 여인의 치마 아래도 똑같이 번득였기 때문이다.
앤은 그것을 알아채자 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허벅지에 차는 대거다. 그것도, 신성 무구인.'
허벅지에 띠를 메고 그 사이에 대거를 끼워 놓은 것이다.
실팍하게 번지는 금빛 광휘는 그것이 세례를 받은 무기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앤은 새삼스럽게 그런 것이 떠올랐다.
'신의 은총을 받은 살인 도구라니, 어처구니없어.'
앤은 눈을 감으면 눈꺼풀에 붙은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지하실의 스산함이 다시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에 대한 믿음이 그 본질에 있는 집단임에도, 교회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신의 최흉의 적을 사로잡은 영웅의 시녀들에게 칼을 채워 놓을 정도로.
앤은 잠시 동안 교회에 내조하며 평생을 미망인처럼 살아 볼 생각을 한 자신이 미쳤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고단하다고 하여 칼로 겹쳐 쌓은 침대 위에서 잘 생각을 하는 것은 얼간이 짓이다.
그녀가 그런 다짐을 했을 때, 갑자기 교황성의 복도에서 거대한 발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외침도.
"사탄마귀가 사라졌다ㅡ!"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