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림과 속임수

그 두려움에 찬 외침이 있기 반 시간쯤 전, 뤼델은 스스로의 부속지가 쌓여 만들어진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를 여러 의미에서 구속하는 성물들을 제거해 나가며.
차가운 감옥 속에서 행해지는 광기 어린 자기파괴.
그의 주변엔 날카롭게 부러진 채 살점이 찢어져 있는 사지와 칼날에 묻어 나와 흩뿌려진 피, 살점, 기름이 흥건했다.
억압되었던 팔다리를 뜯어버리는 식으로 자유를 되찾게 된 뤼델은 제 몸에 박힌 성스러운 날붙이들을 뽑아내었다.
작열하는 통증과 희열은 그 안의 마기를 더욱 몰아치게 하고, 그를 따라 성물은 더 사납게 백열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찰나 동안만 경험해도 영혼에 거대한 해를 입고 폐인이 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뤼델은 그렇게 되지 않았고, 애초부터 될 수도 없다.
이미 무너진 건물을 철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뤼델은 거친 숨을 토하며 복부를 꿰뚫고 들어선 신성한 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접촉면이 늘어나자 타들어가는 소리 또한 하나가 더해졌다.
치이이이이이이익ㅡ
"ㅡ카하."
이젠 차라리 익숙하다.
뤼델은 찢어질 듯 올라가 있는 입꼬리 사이로 붉은 침을 질질 흘리며 웅얼거렸다.
헐떡임과 낄낄거림으로 점철된 그것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것은 수를 세는 말이었다.
"하아, 커허, 두을... 세엣ㅡ!"
치이이이이이이이익ㅡ!
성물은 비명지르듯 발광했지만 뤼델의 손아귀는 거침없이 그것을 뽑아 내었다.
그리고 칼몸이 그의 복부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순간, 그 진귀한 보배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캉, 카강, 캉!
"커, 커흐, 허어, 후우..."
그나마의 여유를 되찾은 뤼델은 턱을 타고 흐르는 피와 침을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이제 그의 몸에는 어떤 성물도 남아 있지 않다.
뤼델은 감옥의 바닥을 둘러보았다.
지하의 이름이 무색하게도, 바닥에 흥건한 자신의 피와 살점들을 똑똑히 볼 수 있을 만큼 밝았다.
성물들이 발하는 성스러운 빛살들이 감옥의 어둠을 쫓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뤼델은 그 기묘한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은유적이군, 응?"
성물의 빛으로 비출 수 있는 장면은, 피와 살점과 어둠뿐일 것이다.
뤼델은 즐거운 어린아이처럼 낄낄대다가 천천히 의식을 가라앉히고 목표를 갈무리했다.
뤼델은 성물이 다 쫓아내지 못한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어둠의 뒤에 도사리고 있을 백색의 군사들과 성직자들의 기도들과 추기경의 위선들을 떠올렸다.
뤼델은 그렇게 죽여야 할 것들을 차분하게 정리했지만, 그의 의식은 한 사람의 얼굴을 추가로 비췄다.
앤의 금백색 머리칼이었다.
"...?"
뤼델은 갑자기 그녀를 떠올린 자신에 대해 천천히 고민하다, 그 고민에 할애하는 시간에 조소를 날려 주었다.
"얼굴은 직접 보면 되지."
뤼델은 쭈그린 감옥 속에서 손가락으로 눈알을 후벼팠다.
그리고 그의 사악하고 잔학한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듀크}"
시야 저편의 어둠이 지독하게 음울한 마기에 감화되며 회돌이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더 검게 타들어가는 그 칠흑은 어떤 윤곽을 띠며 뤼델에게 날아왔다.
천천히, 무성의하게, 돌이킬 수 없게.
뤼델은 지하 감옥의 수감자들이 기묘한 비탄을 뱉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칠흑의 그것이 음영의 깊이로만 구성된 어둠 속에서 뤼델의 시계가 닿는 세계까지 다가왔을 때, 그것은 검회색의 깃털을 가진 시체매가 되었다.
놈은 고아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표표한 날갯짓으로 차가운 감옥 앞에 내려앉아 눈알을 쪼아먹었다.
그리고 시체매가 눈알의 마지막 조각을 삼키자 주변을 회돌던 짙은 마기가 놈을 향해 일제히 쇄도했다.
뤼델은 마기가 정제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기다렸다.
시체매의 껍데기가 벌쳐의 부리를 벌렸다.
[더러운 곳으로 초대해 주었군, 꼬맹이. 질문하라. 세 번까지 허용한다.]
뤼델은 씩 웃으며 핏덩이가 앉은 입가를 훔쳤다.
"이거 고마운데. 슬슬 기억해 주는 건가, 응?"
[방자한 말투를 고치지 않으면 조장(鳥葬)해 주겠다. 질문하라.]
뤼델은 이미 아문 상처들에 굳어 엉겨붙은 핏자국들을 손톱으로 긁으며 말했다.
"이 성 내부에 당장 출동할 수 있는 세례자가 몇이나 있지?"
[삼천 명. 그들 중 최소한의 무장도 갖추지 않은 자들은 현재 없다.]
"흐음, 이런. 그럼, 앤은 어디 있지?"
[성의 제 삼 층, 응접실. 그리로 도달하기만 해도 그 규모를 보고 알아볼 수 있다.]
뤼델은 좁은 새장 같은 감옥 속에서 힘겹게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하기 위해 남겨 두었던 위험한 질문을 입에 올렸다.
"악마를 복속시키기 위한 물건, 이 성 안에 있나?"
뤼델의 질문 이후, 벌쳐는 부리를 열지 않았다.
뤼델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동이자 현상이었다.
그가 약간 당황하여 자세를 고쳐앉을 때, 벌쳐의 부리가 쩍 벌어졌다.
[ㅤㅤㅤ]
"...뭐야?"
[ㅤㅤㅤㅤㅤ]
"왜, 왜 이래, 이거?"
{ㅤㅤㅤㅤㅤㅤㅤㅤㅤ}
{너... 그거, 어디서 알았지?}
감옥의 모든 어둠이 몰아치는 폭풍처럼 매섭게 일렁였다.
고요가 메운 공백에 열독으로 으르릉대는 마기가 들어서고, 지하 감옥에 수감된 모든 이들이 끔찍한 환각을 보며 비명지른다.
그 공포의 재림에 도처에 널브러진 성물들의 광휘마저 미약하게 푸들거리는 것이 보인다.
뤼델은 전율했고, 또 실소했다.
진노한 악마가 페일의 거성 아래에 강림했다.
검붉은 핏덩이가 엉겨붙은 깃털들이 너울대며 떨어진다.
밤을 도려낸 듯한 적막감과 감옥의 천정에 닿도록 드높은 거구는,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분명히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살점 썩는 냄새.
그것이 천천히 다가오며 푸들대는 성물의 빛에 형상을 비추어 내자, 뤼델은 그 끔찍스러운 얼굴을 낯낯이 볼 수 있었다.
듀크의 낯은 살갗을 벗겨낸 인간의 얼굴인 동시에 무도하게 난도질당한 시체매들의 사체 떼였다.
으깨지고, 제 피로 엉겨붙고, 들러붙은 깃털로 바느질되고, 담즙과 혈액과 고름으로 얇게 펴발린, 악의로 건축된 조각상 같은 얼굴.
그것의 숨결이 닿아 오자 뤼델은 쭈뼛할 정도로 날카로운 마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쪽의 수감자들이 발작할 만 하군.
시체매 공작은 자연재해 같은 위엄과 살끝으로 느껴지는 살의를 드러내보이며 말했다.
{차의 물음에 답하라. 그 지식을 어디에서 얻었지?}
"...이봐, 듀크. 일단 진정하고, 응? 일단 답부터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계약을 맺었으면ㅡ"
듀크가 저주로 포효했다.
어둠이 소스라치듯 광포하게 전율했고 수감자들은 죽음 같은 비명과 함께 혼절했다.
{그것은 차의 호의일 뿐, 그 따위 것에 얽매일 줄 아는가! 대답하라! 그 저주받을 지식을 어디에서 습득했지!}
뤼델조차도 그 지독한 살의를 완전히 마주볼 수 없었다.
뤼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듀크, 잠까..."
헌 번 더, 끔찍한 괴성.
드디어 비틀대기 시작하는 뤼델을 향해 시체매 공작의 끔찍한 윤곽이 다가왔다.
{차의 기회는 끝났다.}
"이ㅡ"
망토 같은 것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듀크의 피비린내 나는 깃털들이 칼날처럼 내쏘아져 뤼델을 꿰뚫었다.
어둠을 에는, 바람이 흐느끼는 소리.
꿰뚫린 살갗 사이로 뤼델의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뤼델은 피에 사무치는 끔찍한 저주에 감탄했다.
"커학...! 이봐, 이런 식으로... 하는 법 있나?"
듀크는 대답을 대신하여 뤼델의 몸에 꽂힌 깃털들을 일시에 돌아오게 했다.
"크...!"
넝마짝처럼 된 뤼델이 상처를 문지르며 혀를 차는 사이, 시체매 공작은 그 피에 젖은 깃털들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로서, 그의 무한한 권능인 전지성(全知性)이 발현되었다.
{...봉황의 끄나풀들. 그것들이 알아내었군. 네놈이 바로 악마를 찌를 칼이었구나, 저주받은 생이여.}
듀크의 말에는 거꾸로 뤼델이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이 섞여 있었다.
"...뭐? 무슨 말이야?"
그때, 감옥의 어둠 저편에서 금속성의 발소리들이 일제히 들려왔다.
시체매 공작은 잿빛 깃털들을 수그려 어둠에 스며들며 말했다.
{질문은 하나 남았다. 이미 네놈을 위시한 신의 지팡이들이 알고 있는 이상, 당장은 무의미하다. 질문하라. 첫 번째의 것, 혹은 두 번째, 방금의 것.}
뤼델은 이를 갈았다.
"...첫 번째. 이 성 안에 있나?"
듀크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악마의 한숨은, 무기력보다 음울함이 짙다.
{그래.}
그 말과 함께 듀크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감옥에 만연한 마기가 그와 함께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 뤼델은 그제서야 그 발소리들이 악마의 강림을 느끼고 몰려온 성직자들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점도.
애초에 권능부터 전지성인 악마가, 답을 얻기 위해 노호하며 강림한다...?
"너...!"
채 다 사라지지 않은 어둠이 웅혼하며 악의찬 웃음을 흘렸다.
뤼델은 잇몸이 틀어져라 이를 갈았다.
"제기랄, 알고 있었으면서 분노를 가장해? 정신 나간 놈...!"
악마의 속삭임에 홀려 속아넘어간 자들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악마의 노성에 속아넘어간 자의 이야기도 있을까.
뤼델은 괴상한 잡념을 떠올렸다.
뤼델은 그것을 진즉에 알아차려 내지 못한 자신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지의 권능을 가진 악마가 자신에게 답을 얻기 위해 윽박지르는 꼴을 믿었다니.
하지만, 뭘 위해? 저 정도의 존재가 고작 장난 따위를 치려고 차원을 찢으며 나타났다는 건가.
뤼델이 새로 생겨난 수수께끼에 몰두하려는 참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ㅡ!
분명히 거대해진 발소리들.
"...젠장!"
이미 백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감옥 내부를 환하게 비출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뤼델은 기다란 머리칼을 거칠게 긁으며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감옥에서 일어서며 마귀의 이름을 불렀다.
"[루디알]"
뤼델은 그대로 조각조각 찢어발겨지며 감옥의 창살 사이로 툭툭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감옥을 둘러싼 형태로 떨어진 제 조각들을 혈관과 근섬유를 늘려 다시 이어붙였다.
조야하게 비유하자면 밀가루 반죽을 갈퀴로 갈랐다가 다시 뭉쳐 반죽해 놓는 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온 뤼델은, 루디알의 권능으로 갈라지며 흘린 흥건한 핏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뭔가 오랜만에 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참. 그년이랑 동행하며 너무 올바르게 살았군, 응?"
뤼델의 의지에 따라 그가 흘린 피들이 하늘을 나는 피조물로 승화되어 퍼드득댔다.
"고민은 나중에 하고... 할 것 부터 해야지, 응"
루디알의 권능으로, 뤼델은 장미가 개화하듯 갈라지며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피와 살점으로 질퍽한 발자취 뒤로 끔찍한 길동무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후드득대며 떨어지는 손톱.
총 네 조각으로 찢어진 입가 아래로 떨어져 구르는 이빨들.
흥건한 피, 몰아치는 마기, 위험한 의지들.
[음웨웨웨웨웨웨웨웨웨ㅡ]
[끄우ㅡ웨웨웨웨웨웨웨ㅡ]
[커르ㅡ카하하하학ㅡ!]
푸드드드드드드드드ㅡ
좁다란 지하 감옥의 길목, 뤼델과 성기사들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