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강

현악기는 그 줄의 떨림만으론 풍부한 선율을 다 담아보이지 못해 울림통을 아래에 둔다.
울림통은 현의 미세한 공명을 증폭시켜 일파만파 퍼지는 음악으로 만들고, 그로써 거장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드러내보일 수 있게 된다.
ㅡ이러한 음악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날. 페일의 대거성 아래의 지하는 거대한 울림통이었다.
음량을 증폭하여 어떤 의도가 일파만파 퍼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현의 떨림은 성대의 찢어지는 진동으로, 기품 있는 운지법은 무지스러운 폭력행위들로. 거장의 예술세계는 각자가 가진 단순명료한 살의들로 비유된다.
협소한 지하 감옥의 복도를 따라 무수한 괴성들이 쩌렁쩌렁 공명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마귀 울부짖는 소리와 영창 외치는 소리.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뚜렷한 비명소리.
그리고 그들 중 단 하나, 웃음소리.
사탄마귀는 미친 듯이 웃으며 갈가리 찢어진 제 몸을 휘둘러 선혈을 흩뿌렸다.
그 무수한 인원들을 수용하기엔 지나치게 협소한 지하를 따라 날아간 선혈은 그대로 끔찍한 피조물로 변모해 어둠 속을 날아다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메뚜기들은 강한 신성적 파장에 휩쓸려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봉황께 신도들을 대표하는 위대한 장소 아래에서 추악한 주술을 부린 사탄마귀를 죽여라ㅡ!"
세례자들은 이뉘빌의 개떼를 쳐부수고 비루먹은 짐승들을 으깨 버리며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왔다.
그들은 육체의 고통에 비명지를지언정 공포에 자신들의 신앙심을 먹이로 던져주지 않는 이들이었다.
뤼델은 그들의 그 대책 없는 교조적인 태도가, 죽어도 이겼다고 생각하는 더러운 정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뤼델은 손바닥을 들어올려 펼쳤다.
그리고, 오른손의 약지를 움켜쥐었다.
거명되는 악마의 이름.
"{아디젤}"
악마의 의지가 권능으로서 사탄마귀에 깃들었다.
동시에 사방이 매캐해질 정도로 농밀한 마기가 휘감아돌았다.
세례자들마저도 당혹에 멈춰설 만큼.
뤼델이 먼젓번에 윈덴의 대로에서 벌였던 대전투와 다른 점은 공간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그를 구속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려넣은 기만이 있을 뿐.
뤼델은 사방에 자욱한 그리운 마기를 함뿍 들이마셨다.
그리고, 악마의 권능을 실현했다.
약지를 쥔 왼팔뚝이 쑥 들어올려진다.
그리고 그를 따라, 오른손의 약지가 거짓말처럼 뽑혀 나왔다.
칡뿌리가 흙더미 아래에서 지상의 몸보다 훨씬 거대한 뿌리를 달고 나오듯, 그의 살갗 아래에서 손가락을 머리 부분으로 하는 짚단 인형이 딸려 나왔다.
지푸라기를 끈으로 엮어 팔다리를 만들어놓은 조잡한 인형이었지만 그 짚단들의 결은 기묘하리만치 인간의 근육과 골격을 닮아 있었다.
세례자들은 폭풍 같은 기세를 잊고 얼어붙었다.
그 인형의 모양에서가 아닌, 그것으로 모여드는 차가운 마기의 흐름을 보았기에.
일반인이었다면, 하다못해 일반 성직자였다면 뒤돌아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광기에 가까운 신앙으로 명을 바쳐 은총을 받은 세례자들.
그들은 차츰 서로의 결속을 확인하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장난질을 치는 건지는 몰라도, 저자는 주박에 구속되고 있다."
"사특한 술법에 걸리지 마라, 더러운 기만책일 뿐이다!"
"형제들이여, 신의 성소에서 설치는 저 악한을 징벌해야 한다!"
그들은 곧 신앙이라는 광기에 결속되어 다시 전격적인 위세를 되찾았다.
신의 이름을 빌린 무구들에 피를 먹이겠노라며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뤼델은 차갑게 웃어 주었다.
뤼델은 그의 뽑혀나간 손가락을 머리로 달고 있는 짚 인형을 들어올려 세례자들과 자신의 사이에 놓았다.
그리고 그것의 왼쪽 무릎을 앞으로 접었다.
파삭!
이어서 무지스러운 대혼란이 일어났다.
뤼델의 시야에 있던 모든 세례자들의 왼쪽 무릎이 본래의 방향과 반대로 뒤꺾인 것이다.
휘황한 백색 군단이 붉게 물들며 일제히 쓰러져내리는 광경은 적사 해변에 부서져내리는 파도의 물거품 같다.
하지만 그 광경은 파도의 싸르락거림 대신 육성의 비명을 동반했다.
처절한 비명의 외침이 깊은 지하를 울림통 삼아 미친 듯이 진동했다.
뤼델은 황홀한 음악을 듣는 표정으로 그것을 즐기며 무릎을 꿇었다.
그 거명만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닌 악마의 권능은, 주술자의 의지를 되돌려주는 식으로 대가를 앗아가기 마련이다.
진실을 탐하는 자에겐 그 답변의 값으로 세상을 비추는 창을 가져가는 시체매 공작처럼.
그러한 이치에 따라 뤼델은 그 자신의 무릎 또한 부서진 채 무릎꿇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한한 제물을 가진 자.
뤼델은 짙게 웃었다.
모든 소음이 공명하는 지하에.
이제는 마귀의 그르렁댐과 영창의 외침보다 비명의 울림이 더욱 짙어진 그 지하에는 웃음소리도 있었다.
뤼델은 인형을 다시 치켜들었다. 그의 무릎은 이미 아물어 가고 있었다.
.
.
.
세례자들이 일제 출격한 이후 그들의 미귀환에 의아해한 성직자 몇몇이 지하를 내려가본 것은 이미 한바탕의 소란이 잦아든 이후였다.
세 명의 신부는 지하 깊숙이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으며 내려갔고, 걸음을 딛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 조금씩의 수심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의 철문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이미 뇌리를 찌르는 자욱한 피비린내와 음산한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들은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그 저주받을 횃불의 빛이 새어드는 것은 가차없이 이루어진다.
세 신부 앞에, 그들이 그 무엇보다 믿고 의지했던 강대한 형제들의 피반죽이 드러났다.
신부들은 비명과 혼절을 쥐어삼키며 아직까지 끊이지 않은 신음의 발원지를 찾았고,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 세례자는 토혈하듯 속삭였다.
사탄마귀를 찾아.
신부들을 그대로 도망치듯 계단을 뛰쳐올랐다.
외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생각에 하릴없이 형제의 말을 따르며.
"사탄마귀가 사라졌다ㅡ!"
.
.
.
앤은 그녀 주위의 시녀들이 눈빛을 달리하며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며 당황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반 걸음 늦게 문밖에서 들려온 처절한 외침에 대해 생각했다.
'...뤼델.'
시녀들 중 하나는 그녀의 허벅지께의 치마를 초조한 듯 쓸어내리며 앤에게 억지로 웃어보였다.
"샤렐 공, 아무래도 일련의 소요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이 축복의 거성에서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나, 그 투르샤먼 사태의 역사가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에, 다른 방으로 귀공을..."
"익숙찮은 존댓말 집어치워. 듣는 내가 다 거북하군, 응?"
세례자들은 눈을 부릅뜨며 앤을 바라보았다.
앤은 당황하거나 그 말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볼 것이었기에.
"기회가 되면 찾아와 보라니까 차나 마시고 있었군, 응?"
차원을 가르며 나타난 뤼델이 교황성 2층의 응접실에 서서 앤의 어깨를 짚었다.
앤은 그녀 자신도 기뻐해야 할지 곤란해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뤼델."
그리고, 당혹에서 풀려난 세례자들도.
"사탄 마귀!"
뤼델은 공간을 이어 걷는 가니온의 권능을 위해 끊어낸 발목을 절뚝이며 한 발자국 걸었다.
"동작 그만, 지금부터 허튼 짓거리 하면 이 여자 죽는ㅡ"
뤼델이 앤의 목을 그러쥐는 시늉을 하려는 참이었다.
스무 명의 세례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뤼델은 앤을 끌어안고 훌쩍 뛰었다. 앤은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그녀가 찰나 전까지 앉아 있었던 소파가 성스러운 주먹에 의해 완전히 박살나는 것을 보며 뤼델은 혀를 찼다.
"뭘 기대했는진 몰라도 저렇게 된다구, 앤."
앤이 대답할 틈은 없었다. 무지스러운 외침과 함께 성물이 날아들었다.
"네년도 한 패였구나, 신의 이름으로 언도하리라ㅡ!"
눈부신 성배(聖杯)가 몽둥이인 양 뤼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루디알]"
뤼델은 허리를 젖히는 목을 꺾어 그것을 피해 냈다.
정수리가 뒷목에 닿도록 꺾이며 한계까지 늘어난 살갗에 짓눌린 뤼델의 성대가 괴상한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뒤집힌 뤼델의 시야는 등 뒤를 보게 되었고, 덕분에 후방에서 달려드는 신성한 칼날을 볼 수 있었다.
뤼델이 그 칼을 든 세례자가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벌레를 뿜게 만들어주려 했을 때, 앤이 움직였다.
아직까지 뤼델의 팔을 허리에 감은 채였던 앤은 뤼델에게 안긴 자세 그대로 두 발 모두를 땅에서 들어 세례자의 칼등과 관자놀이를 멋지게 가격했다.
그 번개 같은 동작에 세례자는 피 섞인 침을 흩날리며 나가떨어졌다.
뤼델은 그녀에게 짧은 감탄을 토했다.
"카하, 이런!"
"...당신이 날 괴상하게 만들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고민은 나중에, 응?"
부두술사의 말대로였다.
분노한 스무 명의 세례자들이 황소 같은 분노와 그보다 더한 위력으로 쇄도해 왔다.
뤼델은 춤추는 듯한 동작으로 앤을 품에서 놓았다.
그리고 지하의 일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폭풍 같은 저주와 비명들, 사그라들지 않는 혼란.
앤은 아름답고도 고즈넉했던 응접실이 순식간에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되는 것을 보며 생침을 삼켰다.
하지만 어쩐지 끔찍함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 그녀 자신에 대한 의문보다 목숨을 먼저 챙기기로 한 앤은, 잠시 기절한 세례자가 놓친 신성한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악마를 거든 저주받을 년에게 덤벼오는 신의 사자들에게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일생 동안 바라마지 않던 짓이었다.
잠시 후. 구체적 단위로는 약 칠 분 후, 응접실은 어두워졌다.
튀어오르고 흩뿌려진 피와 살점이 창문을 가리고 날아간 신체 부위들이 조명을 후려쳐 떨어뜨렸기에.
끔찍하고 질척대는 어둠 속에서 여즉 그 빛을 유지하고 있는 성물과 신성 갑주들만이 고고하게 빛났다.
뤼델은 그 꼴을 보며 속삭였다.
"너도 이제 한패군, 앤 아가씨."
앤은 칠 분 전과 달리 부분적으로 빛나게 된 신성한 검을 떨구며 말했다.
"성직자를 베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뤼델은 피와 기름이 묻어 군데군데의 광휘가 가려지는 그 검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불행해 보이진 않는데, 응?"
"부정하진 않겠어요."
뤼델은 자신의 것과 아닌 것이 뒤섞여 흐르는 얼굴의 피를 훔쳐 내며 낄낄댔다.
"좋은 자세야."
뤼델은 그의 발밑에 떨어져 있는 누군가의 장딴지를 집어들었다.
앤은 아직 뜨거운 피와 골수가 두드러지는 그것을 보고 약간 뒷걸음질쳤다.
뤼델은 그런 그녀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여준 뒤, 그것을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종아리는 칼날과 달리 검광 대신 피비린내를 흩뿌렸다.
콰당탕!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짝이 박살났다. 세례자의 강력한 육신은 망치 수준의 위력을 발휘했다.
뤼델은 내부가 으스러져 버린 고깃덩이를 던져 버린 후 앤에게 손을 뻗었다.
"나와 봐.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구경은 하고 가야지. 응?"
앤은 그것이 농담임을 눈치챘지만 뤼델이 무슨 짓을 할 작정인지는 알지 못했다.
"..."
무슨 의미인가. 어차피 그녀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앤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뤼델의 붉은기가 남은 손을 잡았다.
기품 있는 동작으로 응접실을 나선 두 벼락 맞을 남녀는 페일의 거성 복도에 핏자국을 떨어뜨리며 질주했다.
그런 그들의 뒤로, 그들을 발견한 백색의 대군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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