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운동으로 이룬 성장, 어느 쪽이든

"쓰읍...."
모든 수업이 끝난 후, 태율은 일어나지 않고 고민에 잠겼다.
"흐음..........
.............
........
....아."
꽤 긴 시간 동안 고민하던 태율은 마침내 뭔가를 떠올린 듯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 나갈 준비를 마친 조르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이, 이봐."
"응?"
태율이 먼저 말을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조르딘은 태율의 부름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부탁이 있는데."
"어어... 부탁?"
"오늘 우리 동아리에 와줄 수 있겠어?"
"응?"
갑작스러운 권유에 조르딘은 커피색 눈을 크게 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어? 아니, 아니야~ 괜찮아."
얼른 대답을 못 받자 그냥 빠져 버리려는 태율을 조르딘이 얼른 잡았다.
"복싱 동아리에 들어가겠다고 해놓고, 아직 약속을 못 지켰네. 미안해. 와타로 동아리 회장하곤 친한 사이라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건 괜찮아."
"어디로 가면 될까? 장소는 빌려놨어?"
"정식 동아리가 아니라 그런 건 없다. 기숙사 저택 마당에서 할 거야."
"나... 남자 기숙사 저택 말이야?"
조르딘이 놀라서 되묻는 순간, 태율의 피부는 마치 교실 전체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가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형들도 가끔 동아리 참가해준답시고 오면 다 거기서 하는데. 물론 그 인간들은 운동은 안 하고 빈둥거리기만 하지만."
"아아...."
"...? ....! 아, 남자 기숙사라 그러니까 불편하겠구나. 그 생각을 못 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교무실에 가서..."
"아니?! 괜찮아! 번거롭게 그렇게 안 해도 돼!"
"...그러냐?"
태율은 조르딘이 말리자 마음이 놓였다.
"그럼 그냥 해도 된다는 거지?"
"응."
"좋아, 잘 됐네."
귀찮은 일이 없어진 태율은 한결 표정이 편해졌지만, 곤두선 듯한 교실의 분위기는 더욱 날이 날카롭게 변해가는 것도 느껴졌다.
혼자만의 감각일 뿐이라며 그 분위기를 무시한 태율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조르딘에게 감사의 표시를 해야만 했다.
"진짜 고맙다. 와타로 동아리 회장하고 그렇게 친하면, 다른 동아리에 가는 것도 눈치가 보일 텐데."
"아니, 뭘... 한번 가보고 싶긴 했거든. 회장님에겐 끈질기게 부탁 받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되지~ 후후."
조르딘은 기분이 좋은 듯 특유의 밝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냐. 그럼 잘 좀 부탁할게."
"........?"
조르딘은 태율이 마지막에 말한 '부탁'에서 어쩐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음... 태율아."
"왜."
"혹시 부탁이란 게, 동아리 참석 말고 다른 게 있는 거야?"
"와오, 말도 안 했는데.... 눈치 빠르네."
태율은 조르딘에게 감탄하며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새로 동아리에 들어올 것 같은 애가 있거든. 그런데 여자애다보니 내가 잘 해줄 자신이 없어서. 저번처럼 내가 또 오버하다가 기껏 찾아온 지원자를 쫓아내면 안 되니까."
"...."
"너는 한번 우리 동아리에 왔었으니까 대충 어떻게 하는지 알잖아? 혹시 내가 이번에도 너무 심하게 할 것 같으면 옆에서 좀 끊어줬으면 해서. 그리고 아무래도 남자 놈 하나 있는 것보단 같은 여자애도 있는 게 신입 입장에서도 편하지 않을까?"
"........"
"그... 어.... 이번에 그 친구가 가입을 결정하면, 나중에 너까지 오면 형들하고 시현이까지 합쳐서 딱 다섯 명이야. 그럼 정식 동아리로... 가능하겠지...?"
"............"
"그...러니까, 오늘 올 친구가... 어... 잘 정착할 수 있게... 도, 도와 달라는 거지."
어쩐지 말없이 가만히 듣기만 하는 조르딘에게 점점 말을 건네기가 불편해지는 태율은 가면 갈수록 조금씩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태율이 말을 더듬고 조르딘의 표정이 굳어갈 수록, 태율의 피부를 찌릿찌릿 찌르던 이상한 교실 분위기가 점차 사라져 갔다.
"미안,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뭐... 뭐??!"
조르딘이 갑자기 말을 바꿔 거절하자, 태율은 당황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쉬고 싶어."
"가... 갑자기???"
"미안, 갈게."
조르딘은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로 이걸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평소보다 가까이 태율 근처에 서있던 솔레나와 쥬드미네와 제로디아가 한꺼번에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아... 아니... 조르딘? 하아........"
"아하하하하하하~~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있지만 말고 얼른 가서 잡아야지~~"
이 꼴을 구경하고 있던 올리야가 웃겨 죽겠다는 듯 폭소하며 참견했다.
"몸이 아파서 간다는데 어떻게 잡아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 너는 정말~ 야~ 정말이지 쥬드미네도 고생 좀 하겠네~"
또 뜬금없이 쥬드미네를 입에 올리는 올리야가 무척 불편했지만, 태율은 그냥 입 꾹 다물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각자의 동아리로 흩어진 아라미레스와 폴트스 없이, 태율은 혼자 터벅터벅 교문으로 걸어갔다.
"저... 저기...!"
"으웃?"
교문에 다다랐을 때, 뒤에 숨어 있던 음침 단발이 귀신처럼 스르륵 머리를 내밀자, 태율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복... 복싱 동아리... 물어보니까... 학교 안에서 하는 게 아니라고..."
"어? 어어... 맞아요. 남자 기숙사 저택 마당에서 할 거예요."
"나... 남자 기숙사 저택...??"
"그렇기는 한데, 어른들도 다 계시고,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으...."
태율의 말에도 음침 단발은 걱정되고 긴장되는지 가뜩이나 쪼그라든 어깨를 더욱 움츠리고 태율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남자 기숙사 저택 마당으로 걸어갔다. 침묵 속에 조용이 두 다리만 움직이던 그들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운동 기구들이 즐비한 마당에 도착했다.
"여기입니다."
"....네에...."
"오늘은 처음이니까, 가볍게 할 겁니다. 가벼업게~"
"네에.... 가볍..게...."
"체육복은 있나요?"
"네에... 운동 동아리라고 하셔서.... 혹시나 하고...."
"좋습니다. 일단 갈아입고 그 다음에 시작할게요."
차례로 저택에 들어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은,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 속에 서로 마주보며 섰다.
"어... 일단 서로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1학년C반 최태율입니다..."
"아... 알아요..."
"아아... 아시는 군요.... 그쪽은...?"
"저... 저는... 2학년D반 시에라 킨 바즈릴입니다."
"아, 아이고~ 누나셨네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아... 아뇨, 아니에요...."
자기소개 후 한결 더 어색해진 두 사람,
"저기... 그럼 시작할까요...?"
"....네...."
"우선 몸부터 풀고...."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살얼음 같은 분위기 그대로, 태율의 구령에 따라 시에라가 준비 운동을 따라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가량이 지났을 때...
"한 번 더!!!!"
"와아아아아아아!!!!"
"좋아, 좋아요!!!! 더 힘차게!!!"
"하악!! 하아악!!! 하악!!! 학!!!!"
"숨이 차면 찰수록!!! 기합을 크게!!!!"
"와아아악!!!"
"더 크게!!! 따라하세요!!!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우렁찬 기합을 지르는 두 사람에게서 튕겨 나오는 땀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아 무지개를 그렸다.
"껙...께엑... 껙... 껙...."
버피 테스트 100개를 완료했을 때, 시에라는 완전히 엎어진 자세 그대로 숨만 헐떡거리며 움직이지 못했다.
"껙... 했어... 껙...껙.... 했다고오오...."
중후반부턴 비실거리며 그냥 일어섰다 엎어지기나 다름없는 동작의 반복이긴 했지만, 어쨌든 시에라는 실성한 듯 흘려내는 그녀의 말대로 개수는 전부 채웠다.
"자!! .................아...."
초죽음이 되더라도 끝까지 따라 와준 시에라에게 신이 난 태율은 하마터면 다음 운동을 하자고 할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끝났습니다!"
"...엑....엑.... 와아........."
여전히 얼굴을 땅에 처박은 채로, 시에라는 손만 까딱 들어 올리며 몰아쉬는 숨 속에 신음 같은 환호를 섞었다.
야닌이 가져다준 음료와 상당한 시간의 휴식 후, 시에라는 겨우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되찾았다.
"어떠셨나요?"
워낙 시에라가 힘들어 했던 것 때문에 태율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감상을 물었다.
"음.... 생각보다 엄청... 엄~~~청 힘들긴 했지만..."
"읏..."
"좋았어요."
긍정적인 대답을 받자 태율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정말요?!"
"네... 이렇게 뭔가를 해냈다는 기분, 처음 느껴보는 것 같아요..."
시에라는 고개를 들며 땀에 절은 앞머리를 옆으로 넘겼다. 그러자, 지금까지 긴 머리카락에 숨겨져 있던 반짝이는 아름다운 두 눈이 훤히 드러났다.
"이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오오, 바로 이거지요. 이게 바로 우리 복싱 동아리의 진정한 목적 아니겠습니까!"
다시 태어난 듯 음침함에서 약간 벗어나 주먹을 불끈 쥐는 시에라와 옆에서 열심히 장단 맞추며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는 태율.
로델과 야닌은 현관에서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태율 군, 무척 기분이 좋은 것 같네요."
"음."
로델은 야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엄청 크게 소리 지르는 것도 그렇고, 역시 기운이 넘쳐."
"그렇네요."
"오늘은 특별히 태율 군이 좋아하는 스파링을 실컷 해도 좋을 만큼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아."
"네, 그렇군요."
로델의 말에 야닌은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태율은 곧 닥쳐올 운명도 모른 채, 왔을 때보다 훨씬 당당해진 걸음으로 마당을 나서는 시에라를 열심히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으어......"
온몸의 근육에서 지르는 통증과 실컷 얻어맞아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태율은 비틀비틀 학교 안 화장실로 가고 있었다. 이미 두 개의 수업이 끝난 시간이 되었건만, 스파링으로 받은 데미지와 피로가 영 풀리지 않았다. 태율이 신이 난 만큼 로델 또한 신을 낸 결과였다.
"배는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진짜 뒤지겠네.... 응?"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태율은 한곳에 시선을 뺏기고 발을 멈춰 버렸다.
익숙한 붉은 단발머리의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복도 조각상 옆에 몸을 숨긴 상태로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저건...."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어제 운동했던 그녀, 시에라를 태율은 바로 알아보았다. 그녀는 조심히 다가오는 태율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어딘가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율은 호기심에 시에라의 시선을 따라 같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대체 뭘 보는... 엥?"
시에라가 정열적으로 훔쳐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시현이었다.
"이보쇼."
"...."
"어이!!"
"....응옷?"
두 번의 부름에 시에라는 이상한 소릴 내면서 태율을 돌아보았다.
"언제 왔어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 하냐니? 보면 몰라요?"
시에라는 첫 만남 때와는 다르게 아주 당당하게 태율에게 대답했다.
"내가 사모하는 그분을 지켜보고 있잖아요."
"....??"
"나, 태율 군의 도움으로 마침내 깨달았어요. 자신감 없이 홀로 음침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보고 싶을 때마다! 똑바로! 내 마음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계~~속! 정면으로 내 사랑의 모습을 지켜봐야한다는 걸요!!"
"이게 지금..... 정면으로 보는 거라고요...?"
"네! 제가 저의 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저분을 보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시에라는 정말로 똑바로 뜬 눈으로 시현을 다시 정열적으로 훔쳐보았다.
"아참, 복싱 동아리 말인데요.“
이번엔 시에라는 태율 쪽을 보지 않고 시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하곤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네, 그럼 안 오시면 되죠."
"그래도 고마웠어요! 절 자신감 있게 해줘서!"
"아아.... 뭘 그런 걸로..."
아무리 부원이 아쉬워도, 태율은 가볍게 시에라를 포기하고 여전히 시현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우울하고 음침한 스토커에서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스토커로 진화한 그녀를, 굳이 부원으로 받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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