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드란지엘 경연 결투 분야 본선, 8강전

"이겼다고? 잘 했네..."
"그래, 계속 이기거라..."
학문 분야의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온 아라미레스와 예술 분야에서 혼을 불사르고 온 폴트스는 태율의 승전보에 참으로 성의 없기 짝이 없는 반응을 내놓았다.
"난 잔다..."
"나도... 흐아암..."
비실대며 저녁을 먹은 두 형은 세상 피곤한 얼굴로 침실에 들어갔다.
"뭐 저렇게 허약해?"
"허허, 머리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랍니다. 몸보다도 정신이 지치셨을 테지요."
태율이 투덜거리자, 집사인 플리 씨가 대신 아라미레스를 부드러운 어투로 변호해 주었다.
"태율 군은 힘이 남은 모양이군요."
"코치님!"
"그렇다면 트레이닝 할 힘도 당연히 있겠지요?"
"네, 부탁드립니다!"
태율은 그대로 로델을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로델에게 한차례 폭풍 같은 스파링 수업을 받은 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야닌이었다.
"내일 쓸 마법을 어떻게 쓸지 같이 한번 점검해 볼까요?"
"네, 감사합니다, 사모님!"
태율은 대충 물을 끼얹은 후 야닌과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았다.
"[바람의 권]으로 마법 발동을 막고, [돌풍의 권]으로 상대를 날리는 전략은 기본으로 가져가는 건가요?"
"네, 그게 상대를 가장 적게 다치게 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겠군요. 하지만 장외 룰을 이용한 승리 방법이다 보니 그거에 당한 상대는 자존심이 좀 상했겠는걸요. 제대로 된 마법 대결이 아니라고 여겼을 테니까요."
"...."
경기 후 질질 짜던 아르메이다가 생각난 태율은 입을 다물었다.
"태율 군은 잘한 거예요. 룰이 있는 시합에서 룰을 이용한 게 무슨 잘못이겠어요."
로델이 편들어 주자 약간 시무룩했던 태율의 얼굴이 금방 활짝 펴졌다.
"태율 군이 잘못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마법사들에게 장외 룰이란 건, 태율 군처럼 적극적으로 활용할 만한 규칙이라기보단 정면 대결 중에 밀리는 쪽에게 따라오는 일종의 벌칙같이 여겨지는 것이라서요. 그런 인식 차이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뿐이에요."
"...쓸데없는 자존심이야."
"물론 실리적인 마법사들도 얼마든지 존재해요. 당신 와이프도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렇긴 하지요."
툭 내뱉듯 대답하는 남편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 야닌은 다시 태율에게 말을 건넸다.
"태율 군의 전략은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미 많이 노출된 상황에서 [돌풍의 권]이 먹히지 않을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해요. 경연의 결투 분야 8강이란 건, 정말 어지간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자리이니까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태율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야닌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반쯤 졸고 있는 아라미레스와 잔뜩 눈이 부어서 대체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폴트스가 먼저 앉아 있었다. 비실거리며 밥을 먹는 두 형과 아침부터 잘도 먹는 태율은 각기 다른 이유로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자,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간다."
"가라..."
힘차게 화이팅을 외친 태율에게 흐느적거리는 형들의 짧은 한마디가 되돌아왔다.
"아이 썅, 힘들 좀 내라고!!"
"...너나 내."
"간다고..."
태율이 재차 호령했지만, 퉁명스러운 반응은 두 배가 되었다.
어쨌든 형들과 헤어지고, 태율은 시내에 위치한 공립 경기장으로 향했다. 콜로세움 모양의 경기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 첫날과 둘째 날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파가 오전부터 콜로세움으로 몰려드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태율아!"
"오오~ 이시현!"
때마침 도착한 시현이 태율을 부르자 태율은 반갑게 손을 들어 그를 맞았다.
"첫 경기구나. 부담되지 않아?"
"첫 경기인 게 낫더라고 나는. 그나마 빨리 끝나니까. 너야말로 부담스럽겠다. 마지막 경기... 메인이벤트잖아?"
"하하...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좋네~ 너나 나나 오늘과 내일 두 번 이기면 결승인데, 거기에서 만나자고. 어때? 한국에서 온 두 놈이 이세계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 먹는 거라고. 좀 멋지지 않냐?"
"하하하하, 그렇네~ 그렇게 되면 진짜 멋지겠어."
"해볼까?"
"최선을 다해 볼게."
"좋았어."
게다가 마법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이방인으로 마법을 배운 지 6개월조차 안 된 애송이들이 그룬마가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회를 잡아먹겠다는 포부를 주고받는 장면은, 그룬마가트 사람들이 봤을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아마 시현이는 정말로 결승까지 가겠지.'
그래도 태율은 그렇게 확신했다. 시현의 마력이나 마법이 보통을 아득히 넘는다는 것은, 16강전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과 그것을 본 관중들의 반응으로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냥 놀랐다 혹은 감탄했다 정도가 아니라 경악이었지, 그 표정들은... 그 짧은 공격만으로 그런 반응을 끌어낸 시현은 단순히 '재능이 있다' 수준이 아닐 거야.'
태율은 8강전 첫 시합에 나설 선수로 호명을 받고, 시현의 배웅을 받으며 안내 요원을 따라 시합장으로 향했다.
'자아~~ 그렇다면 그런 괴물과 꼭대기에서 만나기 위해, 나도 힘을 내야겠지. 그렇게 말했으니 쪽팔리지 않게 말이야!'
시현과의 결승전 약속은 태율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강력한 동기였던 것이다. 그는 관중들의 뜨뜻미지근한 반응 속에 시합장으로 나섰다.
"나왔네요, 실리주의 소년."
오늘도 역시 참관하는 남색 포니테일이 그녀의 사장에게 말했다.
"응, 그렇네."
곱게 올린 노란 머리의 귀족 부인이 흥미롭게 태율을 내려 보았다.
"사장님은 저 소년에게도 관심이 있으시죠?"
"남자 마법사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주목받을 가치가 있지만, 저 아이는 그중에서도 또 다른 맛이 있거든."
"저번 시합을 기초로 평가된 최태율은 마력 A, 보유 마법 C였죠. 데이터상으론 특출나지 않은 마법사라고 할 수밖엔 없네요."
"최태율에겐 데이터론 표현 못 할 그런 게 있어. 너도 봤잖아?"
"네, 그래서 굳이 '데이터상으론'이란 말을 덧붙인 거죠."
"오늘 최태율의 상대는?"
"오레비아 로테미네스 발데시스입니다."
"아하~ 상당한 강적이 나타났네~"
태율의 상대 이름을 들은 귀족 부인은 흥미가 더욱 올라갔다는 듯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마력만 높은 C급 마법으론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어디 어떻게 할지 지켜볼까~?"
"꽤 기대가 되시나 보네요?"
"그럼~ 그냥 재미만 있는 돌덩어리인지, 정말 빛나는 보석일지 이제야말로 밝혀질 테니까~"
태율이 등장할 때와는 다르게 크게 울려 퍼지는 환호를 받으며 등장하는 연두색 머리칼에 170cm 정도의 큰 키와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오레비아 쪽도 흘깃 보면서, 귀족 부인은 대답했다.
관중 보호를 위한 장막이 펼쳐지고, 태율과 오레비아가 각자의 코너에 서자, 심판은 시합 개시를 선언하였다.
"이제부터 8강 제1시합, 최태율 대 오레비아 로테미네스 발데시스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심판의 선언을 듣는 동안, 태율은 오레비아의 특이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마치 갈대처럼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하, 이것 봐라?'
태율은 오레비아의 행동이 극초반 [바람의 권]을 피하기 위한 것임을 눈치챘다.
삐이이이익!
"[바람의 권]!"
오레비아의 의도를 알면서도 태율은 굳이 [바람의 권]을 날렸다.
쉬익
오레비아는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다. 이는 그녀의 생각대로 바람의 권을 피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바람의 권]을 날리자마자 달리기 시작한 태율은 그 사이 오레비아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벌써 다다라 있었다.
'꼭 바람으로 입을 막지 않더라도, 마법 발동 자체를 늦추면 그걸로 성공이지!'
바람을 피하고 나서 마법을 쓰려했던 오레비아의 작전은 오히려 태율이 예상했던 상황 중 하나였다.
"[돌풍의 권]!!!"
태율은 손쉽게 장외 1회를 따내기 위해 강력한 바람을 뿜어내는 주문을 발동시켰다.
"[불침의 외투]."
파아아
태율과 거의 같은 타이밍에 주문을 외친 오레비아의 오른손에서 반투명한 회색막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반투명한 회색 인형탈과 인형옷을 입은 모양새가 된 오레비아를 향해 [돌풍의 권] 바람이 덮쳤다.
후우우우우우우웅!
바람은 정통으로 오레비아를 밀어붙였지만, 회색 반투명막을 입은 오레비아는 날려가지 않았다.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바람을 튕겨내며 태율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퓨융
오레비아의 왼손 쪽 회색 반투명막이 가래떡처럼 쭈욱 늘어나 태율에게로 날아갔다.
"...!"
태율은 반사적으로 가드를 올리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후웅!
고개를 숙인 태율의 머리 위에서 들리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반투명막 타격이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 주었다.
'사모님이 말씀하신 꼼수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바로 나오고 말았네.'
태율의 상체가 있던 곳을 타격했던 회색 반투명막은 고무줄같이 다시 줄어들어 원래대로 오레비아의 팔 정도의 길이가 되었다.
'딱 보기에도 갑옷 같은 역할을 할 것 같은 마법, 그런데 공격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단 말이지?'
태율이 생각을 정리하련는 찰나, 오레비아가 다시 반투명막을 늘려 태율을 공격했다.
"[강철의 권]!"
태율은 신속하게 양팔을 강화시킨 뒤 가드를 붙이고 서둘러 백스텝을 밟았다.
텅
가래떡 공격이 물러나는 태율의 가드 위를 때렸다.
후욱
두 번째 가래떡 공격은 더욱 물러선 태율을 따라잡지 못하고 허공을 가른 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사정거리는 여기까지로군.'
오레비아의 가래떡 공격 유효 범위를 확인한 태율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그은 뒤, 아슬아슬한 지점에 자리 잡고 옆으로 스텝을 밟으며 돌았다.
"방금... 마법이 바뀐 것 같은데?"
태율이 빠르게 [강철의 권]으로 전환한 후 공격을 막아낸 짧은 장면을 놓치지 않고 확인한 귀족 부인은 아까보다도 더 집중하는 눈이 되었다. 단순한 흥미 위주의 표정이었던 그녀의 얼굴은 좀 더 진지한 빛을 띠었다.
"마법이 바뀌었다고요?"
"바뀌었어. 너도 제대로 확인해. 방금처럼 정신 빼놓다가 놓치지 말고."
"앗... 죄송합니다, 사장님..."
포니테일은 그녀의 사장처럼 눈에 힘을 빡 주고 태율의 움직임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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