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깔끔하게 부셔 드렸습니다

휘이이이익
오레비아가 손을 높이 치켜들자, 팔을 따라 반투명 회색막이 길게 주욱 늘어났다. 그녀는 기대로 강하게 들었던 팔을 앞으로 내려 그었다.
타아앙!!!
콰지직!
오레비아의 팔 궤적을 따라 굵직한 철기둥 같이 내리 꽂힌 반투명 회색막은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경기장 바닥을 때려 부쉈다.
'와오~'
앞으로 나가는 척하며 오레비아의 공격을 끌어냈던 태율은 공격이 닿기 전에 뒤로 물러서며 그에게로 향했던 공격의 위력을 체크하였다.
'무슨 기중기 같은 걸로 후려갈기는 것 같네. 제대로 맞았다간 골로 가.... 려나?'
태율은 좌우로 슬금슬금 돌다가 불시에 나갈 듯 말 듯 움찔거리는 행동을 반복하며 오레비아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오레비아 쪽에서 먼저 앞으로 나서기도 애매한 것이, 어차피 자신의 사정거리가 더 길기 때문에 공격을 위해선 언젠가 반드시 앞으로 나와야만 하는 태율을 기다리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타탓
태율이 이번엔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가자, 이번엔 후려치는 게 아니라 가래떡 모양의 긴 원통형 반투명막이 스트레이트처럼 쭉 뻗는 공격이 날아왔다.
탕!
타이밍을 읽은 태율은 [강철의 권]이 걸린 왼팔로 가래떡 공격을 쳐냈다. 그때,
슈웅!
쳐낸 첫 번째 공격에 이어 두 번째 가래떡이 태율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퍼억!!
태율이 얼른 몸을 돌려 가드를 내리고 있지 않은 오른쪽을 내밀며 뒤로 백스텝을 밟았고, 가래떡은 오른팔 가드에 부딪혔다.
찌르르르...
가드를 한 팔이 저려왔다. 뒤로 물러서면서 막아냈음에도 오레비아의 공격은 상당한 충격을 태율의 팔에 남겼던 것이다.
두 번의 방어 후 다시 사정범위 밖으로 물러선 태율을 본 오레비아는 회심의 연속 공격이 실패한 데에 대해 "칫..."소리를 내며 불만을 표시했다.
'저 촉수 같은 걸 두 개 뽑아내는 것도 가능하구나. 그럼 세 개, 네 개도 가능할 수 있겠네. 이 정도의 위력을 가진 공격이 두 개 이상.... 그럼 쉽지는 않겠는데.'
태율은 또다시 빙빙 돌며 움찔대기를 시전했다. 상대의 능력을 최대한 파악해낼 때까지 그는 절대 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우우..."
시합을 보고 있는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오기 시작했다. 단단한 방어와 강력한 공격을 겸비한 마법사를 상대해야 하는 태율이야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이었지만, 관중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전개였다. 경기 시간 6~7분이 넘어 가도록 태율이 계속 페이크만 주다가 가끔씩 어쩌다 들어가나 싶으면 공격을 피해 빠져나오기만 하니, 박진감 넘치는 마법 대결을 보러 온 사람들의 기대를 엄청나게 저버리는 그런 경기였던 것이다.
'이기는 게 최고입니다, 이기는 게!'
태율은 로델의 말을 되새기며 귀 닫고 야유에 신경을 꺼버렸다. 그리고 눈앞의 상대를 어떻게 요리할 지에 대해서나 집중적으로 생각했다.
'자아, 이제 어쩔까? 저 회색막, 내 손에 닿는 느낌으론 돌덩이처럼 단단했지. 늘어나는 모양새로 보면 꼭 고무 같은 느낌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좀 싸우란 말이야!!"라는 어느 아저씨의 고함이 섞인 야유를 뒤로 하고, 태율은 다시 한 번 페이크를 줬다.
쉬이익!!
태율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회색막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한 방 제대로 먹일 생각이었던 듯, 세 줄기의 가래떡 촉수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태율은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해냈다.
"우우우~~!"
쏟아지는 야유.
하지만 태율은 지금 그런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야유 따위야 원래도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 순간 끈질기게 오레비아를 흔들던 그의 눈에 마침내 특이점이 보인 것이다.
'방어벽이 얇아졌다?'
태율이 본 그대로였다. 세 줄기의 촉수를 내밀었던 오레비아의 방어벽이 눈에 띄게 얇아져 있었다. 잠시 후에 오레비아가 다시 촉수를 거둬들이자, 방어벽은 본래의 두께로 돌아왔다.
'아하, 공격에 사용한 만큼 방어벽이 줄어든다 이 말이렸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건 정해졌지.'
태율은 발목과 무릎을 재차 풀어준 뒤 두어 번 콩콩 뛰어 주었다. 그리고 자세를 갖춘 뒤, 한층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요란하게 좌우 횡이동과 페이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처음에는 신중했던 오레비아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태율이 계속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간잽이스러운 동작으로 신경을 긁어대자, 마침내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질려버린 그녀의 짜증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이제 지겨워!!"
오레비아가 소리를 지르며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태율이 더 뒤로 물러나 피할 수 없는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흥분한 그녀에겐 반격의 가능성 따윈 잊혀진 지 오래였다.
"이걸로 끝장이야!!!"
그와 동시에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후와아아아아아
이번 시합이 시작된 이래 가장 굵은, 어지간한 건물 기둥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회색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받아라!!!"
오레비아는 분통 섞인 고함을 지르며 있는 힘껏 들어 올린 손을 내리쳤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회색 기둥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무겁게 바람을 짓누르는 소리를 내며 내리 찍히는,
경기장 끝까지 닿고도 남을 정도로 긴,
그 기세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한 방으로 태율 뿐만 아니라 경기장까지 박살을 내버리겠단 작심이 가득한,
너무나도 똑바른 직선적인 큰 공격...
태율이 기다리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파앗!!
양손으로 가드를 굳힌 태율은 신속하게 닥쳐오는 공격의 궤도에서 벗어나며 대각선으로 뛰었다. 그리고 오레비아의 일격이 건물이라도 무너지는 듯한 "쿠콰가가강"하는 굉음을 내며 경기장의 일부를 짓뭉개 무너뜨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번개같이 오레비아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앗!"
오레비아가 뒤늦게 외마디 소리를 지른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그녀가 눈을 돌렸을 때, 태율은 이미 그녀의 코앞에 접근하여 주먹을 내밀었다.
쿵!! 콰앙!!
태율의 원투 펀치가 오레비아의 방어막에 때려 박히자, 거대한 쇠망치로 돌 부수는 소리가 울렸다.
"아아...!!!"
태율이 가한 타격에 방어벽이 강풍에 흔들리는 텐트 모양으로 흔들거리자, 오레비아의 입에서 질겁하는 외마디가 튀어 나왔다.
쾅!!! 쾅!!!
무게를 실은 두 방의 [강철의 권]이 더해졌다.
콰직 콰지직
얇아진 방어벽이 날아온 돌에 부딪혀 깨진 유리창처럼, 타격점을 중심으로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쾅!!!!!!!!
다섯 번째에 때려박힌 태율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벽 부숴지는 굉음을 터뜨리며 마침내 오레비아의 방어벽에 구멍을 뚫었다.
"아... 어서, 어서...!"
사색이 된 오레비아는 서둘러 공격을 회수해 방어벽을 복구하려 하였다. 하지만 일단 깨지기 시작한 방어벽은 그녀의 뜻대로 쉽게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때려 부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보는 이로 하여금 '살벌하다'란 생각 외엔 할 수 없게 만드는 무식하리만치 강인한 좌우 연타가 소나기 같이 쏟아졌다. 태율이 퍼붓는 강펀치들은 이미 깨진 오레비아의 방어벽이 약간이라도 복구 될 만하면 다시 깨뜨려 버리고, 조금 회복되나 싶으면 도로 박살을 내버렸다.
콰캉!! 쾅!! 콰캉!! 쾅쾅!! 쾅!! 쾅!!!
공사장에서 중장비들이 건물 부술 때나 들릴 법한 무지막지한 파열음이 시합장을 뒤덮었다.
"....."
".....!"
야유를 퍼붓던 관객들은 폭발적이고 폭력적인 태율의 펀치 러쉬에 모두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룬마가트 최고의 명문 드란지엘의 시합에서 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압도적으로 폭력적인 광경은, 관객들의 넋을 앗아가 버렸다.
쿠왕!!!!!
태율이 체중을 잔뜩 실어 크게 날린 오른손 훅이 거대한 파도가 방파제를 집어 삼키는 기세로 방어벽을 강타했다.
콰장창창!!
태율의 훅은 결정타가 되었고, 간신히 버티던 오레비아의 반투명한 회색 방어벽은 유리창이 허물어지듯 깨져 나갔다.
털썩
"아.... 아아....."
깨진 방어벽이 완전히 소멸해 사라지자, 얼굴이 하얀 종이보다 하얗게 보일 정도로 질려버린 오레비아가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누가 봐도 전의를 상실한 오레비아의 모습은 그녀가 더 이상 시합을 진행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관중 중에는 가련한 그녀의 모습에 순간 동정심마저 느낀 이가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런 오레비아를 앞둔 태율은 어떠했는가 하면,
'아직 항복을 외치지 않았어.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이 따위 생각을 하며 전혀 투기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웨어울프 워리어와의 결투로 방심하는 마음에 대해 반성한 그는 정말 끝까지 방심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주... 중지!!! 중지!!!!"
원래는 그렇게 서두를 생각도, 서두를 필요도 없었던 심판이 태율의 심상치 않은 투기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뛰어들어 시합을 중지 시켰다.
"....!"
"중지!! 최태율 군! 마법 거둬들여요! 어서!!"
심판이 소리치자, 태율은 그제야 주먹을 풀며 [강철의 권]을 해제시켰다.
"휴우...."
덩달아 긴장했던 관객석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쉬는 안도의 한숨 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흐... 흑...."
태율로부터 무서운 기세가 사라지자, 잔뜩 겁을 먹었다가 맥이 풀려버린 오레비아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흐으윽... 어허어어어엉...."
울음을 펑펑 터뜨리고야 말았다. 날카로운 첫 인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서러운 울음소리를 폭포처럼 쏟아냈다.
심판은 당황하며 오레비아가 혹시 많이 다친 건 아닌지 살피고 그녀의 상태를 체크하였다. 다행히 몸에 별 이상은 없었고, 그것을 확인한 심판은 태율의 승리를 대충 선언한 다음, 스텝들을 불러 오레비아를 조심히 부축하여 퇴장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
또 울려버린 상대방, 말도 없이 자신 쪽을 지켜보기만 하는 관중, 성의 없기 짝이 없는 승리콜...
태율은 어째 이겨도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네네~ 감~~~사합니다~~"
다음 시합을 위해 나가 달라는 진행 요원의 부름을 받은 태율은 조용한 관중들에게 저 혼자 태평하게 휘적휘적 팔을 흔들어 보이며 퇴장했다.
"아까 그거...."
태율이 시합장 밖으로 나간 직후, 멍하니 있던 어느 관객이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카... 칼루 아냐?"
"칼루...?"
"어, 칼루."
"그...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대화는 옆에서 옆으로 퍼져, 곧 관객석 전체에 웅성거림을 만들어 냈다.
"최태율 군이 사용한 기술이 칼루가 아니냐고들 하네요?"
남색 포니테일이 사람들이 설왕설래하는 소리를 듣고 귀족 부인에게 말했다.
"칼루라... 뭐, 비슷해 보이긴 했지."
"그렇군요... 설마 드란지엘의 결투 대회에서 칼루를 볼 줄이야..."
"역시 특이하지?"
귀족 부인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해져 있었다.
"최태율 군의 데이터, 수정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아, 말씀해 주세요. 적어 두겠습니다."
"마력 A는 동일하지만, 특기 마법의 등급을 조정해야겠어. 최태율이 가진 특기 마법, 이제 보니 단순한 바람 사출 마법이 아니었네."
"여... 역시 그렇죠? 하긴 칼루 만으로 로테미네스 일족의 A급 마법을 부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너, 최태율의 특기 마법이 뭔지 알아낸 거야?"
"네...? 어.... 저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으니까.... 굉장히 등급 높은 파괴 마법이 아닐까... 요....?"
"하아....."
포니테일의 자신 없는 대답에 귀족 부인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넌 아직도 더 열심히 배워야겠다."
"으... 역시 틀렸군요... 그럼 뭐죠....?"
"속성 강화. 현재까지 확인된 바론 두 가지 속성이니까, B등급이야."
"B.... 겨우 B등급이요???"
귀족 부인의 대답에 깜짝 놀란 포니테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흐음... 저 아이 하나 때문에 내 기준도 흔들리고 있어. 아무래도 다른 평가 기준을 더 추가해야 하나할 정도로."
"그... 그런가요?"
"물론 안 할 거지만."
"아.... 안 하실 거군요..."
귀족 부인의 말에 혼란스러워진 포니테일은 어쨌든 수첩에 변경된 태율의 등급을 끄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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