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약속을 지킨 사람과 못 지킨 사람

남색 포니테일은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할 말을 잃었다.
'와... 샬레니엔 드루실 알마크로가 이렇게 무너졌다고...? 설마 이렇게? 진짜로...?'
현실감이 없어진 포니테일은 구급 요원들이 샬레니엔을 체크하는 모습을 보며, 혹시나 샬레니엔이 다시 일어나 시합을 재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오호호호호호호호호!"
그런 포니테일의 당황은 그녀의 귀족 부인 사장님의 웃음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사... 사장님? 뭐가 그렇게 웃기신 거예요?"
"재밌잖아~ 난 저 아이가 정말 재밌는데, 넌 안 그래?"
"재... 재밌다고요?"
시합 내용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비 일변도의 스타일, 기껏 공격하면 마법 시합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투박하면서도 폭력적인 방식, 그리고 경기장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는 결과... 포니테일은 대체 어디에서 재미를 느껴야 할지 몰라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저기... 그거 반어법 아니지요?"
"난 진심인데?"
"어... 아, 물론 마지막에 사용했던 그 마법은 좀 놀랍긴 했어요. 설마 바람을 쏴서 타격하는 마법을 갖고 있었다니..."
"흐음, 물론 그 자체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말이야..."
귀족 부인은 태율의 승리를 선언하는 심판의 콜을 들으며 포니테일에게 대꾸하였다.
"난 네가 저 친구의 싸움 방식을 잘 봐뒀어야 한다고 생각해."
"싸움 방식이요...?"
"아주 철저하게 자신이 가진 무기가 먹힐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 기본이야. 그리고 그 타이밍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움직이고 또 움직이면서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주 몸에 배고도 밴 수비 능력. 칼루... 아니면 칼루 비슷한 무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걸 바탕으로 한 동작에 최태율이 가진 특기 마법을 결합해서 만들어낸 수비 동작이 진짜 까다로워. 알마크로 양을 비롯해서 4강전까지 저걸 제대로 뚫어낸 아이들이 없었잖아, 그치?"
"아, 네... 그러고 보니..."
"드란지엘의 치열한 예선을 이겨내고 올라온 아이들이니만큼. 학생이라 해도 능력은 어지간한 성인 마법사 이상인 친구들인데도 말이지."
귀족 부인이 구급 요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일어서지 못하는 샬레니엔에게로 다가가는 태율을 눈으로 따라가며 계속 말했다.
"수비가 뚫리지 않으니, 최태율 군은 상대가 노출하는 약점을 포착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거야. 알마크로 양이 막판에 마력 소모를 부담스러워하는 걸 눈치챈 것처럼."
"앗, 그, 그랬나요?"
"그랬어. 그러니 알마크로 양의 검이 점점 얇아졌잖아. 엄청나게 공격을 퍼붓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모를 정도긴 했지만.
어쨌든, 최태율 군이 앞으로 치고 나간 게 딱 그 시점이야. 알마크로 양이 바닥을 드러내는 마력 때문에 최후의 공격을 각오해야만 했던 그 시점."
"그럼... 혹시 최태율 군은 알마크로 양이 검을 본래의 사이즈로 되돌릴 걸 알고 그랬다는 건가요?"
"뭐...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래 보이지 않아? 마지막 힘을 내야 하는 때에 멀리 있던 적이 알아서 안으로 들어와 준다... 그럼 당연히 가장 자신 있는 형태의 마법검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들겠지? 알마크로 양이 검 사이즈를 줄이더라도, 어차피 최태율 군의 무기인 주먹보다는 길기도 하고."
"그렇겠죠?"
"그런데 딱 그때였잖아. 최태율 군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던 마법을 시전한 것이. 알마크로 양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별안간 그보다 약간 더 먼거리에서 갑자기 공격이 날아왔어. 완전히 허를 찔렸겠지?"
"아, 아아..."
"대비하지 못한 기습이 남긴 타격의 결과는, 저기 쓰러져 있는 알마크로 양이 잘 보여주고 있네. 최태율 군의 전술이 겉으로 보기엔 막 도망치다가 공격한다는 단순한 것 같지만, 뜯어보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그런 식으로 보면 사장님이 재밌다고 하신 것도 이해는 되네요."
"뭐,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싫어하긴 싫어할 거야. 알아볼 사람은 알아보는 뛰어난 수비 능력이라 해도, 일반인 눈엔 피하거나 막기만 하는 꼴이 지루할 테고... 게다가 기껏 하는 공격도 엄청나게 단순해서 보는 맛도 없는 마법이니. 그나마 오늘 마지막에 보여줬던 그 마법은 좀 봐줄 만했지만, 다른 화려한 특기 마법에 비하면 수수한 건 마찬가지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도 이해는 돼."
"맞아요, 정말 그래요!"
포니테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아주 적극적으로 귀족 부인에게 동의했다.
'그리고 상대를 봐주기까지 했으니... 시합이 질질 늘어진 건 당연하겠지. 어디 결승전 정도 되면 좀 더 재밌어지려나?'
귀족 부인은 흥미로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태율에게서 떼지 않은 채 혼자 생각했다.
한편, 태율은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샬레니엔을 걱정스럽게 살펴보았다.
'이거 팬 많은 녀석을 때려눕혔는데... 갈 때 봉변당하는 거 아냐?'
뒤늦게 샬레니엔을 쓰러뜨린 것이 걱정된 것이다.
'열성 팬이 많은 인간일수록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지... 뒤에서 벽돌 같은 걸 갈기거나 하는 새끼가 없을 거란 보장도 없잖아?'
상상은 조금 더 과격하게 구체화 되었다.
'지금은 최대한 매너를 지키는 모습으로 어떻게든 귀찮고 불행한 미래를 피해 보자.'
그렇게 결심한 태율은 최대한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들고 샬레니엔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기...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
"오늘 시합, 같이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괜찮다면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해도 좋을까?"
태율이 혼자 생각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나이스한 멘트였다. 이제 그의 요청을 수락한 샬레니엔을 도와 그녀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면, 승자와 패자가 서로를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훈훈한 장면의 완성이 될 터였다.
"....."
그런데 샬레니엔은 태율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잠시간 말없이 아래를 보고 있다가 번쩍 고개를 치켜올린 그녀의 눈동자에는 누가 봐도 '증오'라는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나와 시현이 함께 결승 무대에 섰어야 했는데..."
"엑..."
"너.... 너 때문에 다 망했어!!! 너 때문에 다 망쳐버렸다고!!!"
태율을 노려보는 샬레니엔이 눈물까지 질질 흘려가며 악을 바락바락 쓰기 시작했다.
"아... 아니, 잠깐만...!"
"시현이랑 했던 약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어!!! 난 결승에서 시현이에게 내 마음을 보이려 했는데!!! 니 새끼가 다 망쳤단 말이야!!!"
샬레니엔의 독기 서린 폭주는 그야말로 활화산, 태율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구급 요원과 심판들까지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너 때문이야, 이 개새끼야!!! 너 때문이라고!!! 엉엉엉!!"
기어코 샬레니엔은 생전 해본 적 없는 욕설과 함께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이... 이런 빌어먹을...."
태율은 샬레니엔이 발광하자 당혹스러워 미칠 지경이 되었다. 샬레니엔의 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했던 행동이 최악의 결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니, 지가 못해서 져놓곤 왜 지랄이야?'
아주 자연스럽게 불평이 샘솟았지만, 차마 대놓고 말로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상황을 스무스하게 넘겨야만 했다.
'이런 씨브랄... 어쩔 수 없다!'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이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머리를 쥐어짜던 태율은, 당황과 황당이 미처 다 가시지도 않은 상태로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바람의 권]!!"
쏴아아아아아아!!!
태율은 주먹을 뻗어 샬레니엔의 면상에 세찬 바람을 냅다 쏴버렸다.
"엉엉~! 이 씨발 새끠이와아바바바 어붜버버버버법!!"
코앞에서 강풍을 처맞은 샬레니엔의 아름다운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졌고, 개구기라도 문 것처럼 강제로 열린 입으로 마구 빨려 들어간 대량의 바람은 그녀의 울음을 틀어막았다.
"전부 비켜요!!!"
태율의 돌발 행동과 고함에 놀란 심판과 구급 요원들이 반사적으로 비켜서자, 태율이 두 번째 마법을 갈겼다.
"[질풍의 권]!!!"
퍼어엉!!!
"꺄아아아아악!!"
태율은 울음이 막힌 샬레니엔을 [질풍의 권]으로 아예 날려 버렸다. 그리고 붕 떠서 날아가는 그녀의 뒤를 죽어라 뛰어서 쫓아갔다.
날려간 샬레니엔의 다다른 곳은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입구 쪽이었다. 샬레니엔을 따라잡은 태율이 그녀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다시 한번 [질풍의 권]을 발사하였다.
부우우우우웅!!
샬레니엔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엄청난 강도의 바람에 밀려 입구 쪽으로 쏙 들어갔다.
"으와, 씨발!!! 됐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어쨌든 자기 생각대로 된 건지, 태율은 소리를 빡 지르며 샬레니엔을 골인시킨 입구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이야아아!! 됐다, 됐어!!!"
그리고 입구로 들어가자 보인 광경을 확인한 태율은 환호성을 질렀다. 엄청난 우연의 일치로, 통로에 서 있던 시현이 날아든 샬레니엔을 딱 받아 든 채 들이닥친 태율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태율이 당황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서 만든 계획은 이러했다.
그는 샬레니엔의 울음을 멈추게 한 뒤 그녀를 한시라도 빨리 시현이 곁으로 데리고 가서 시현이에게 달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손을 대면 샬레니엔이 더 지랄할 것 같아서,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질풍의 권[으로 그녀를 날려서 옮기는 것이었다.
이 급조된 계획에 있는 많은 문제 (사람에게 그 따위로 바람을 쏴도 좋은가,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났을 때 샬레니엔이 벽이나 바닥에 처박힐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 안 했는가, 바람으로 풍풍 날려버린 그녀가 과연 시현에게 제대로 배달이 될 것인가, 등등...) 따윈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빨리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했던 짓거리가 거의 하늘의 뜻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괜찮은 결과로 이어졌다.
"태... 태율아?"
"야, 시현아! 난 결승 진출했다!! 너도 화이팅이다!"
"어? 어어... 그래..."
"그리고 그 누나 좀 잘 달래줘라, 믿을 게 너밖에 없어!"
태율은 얼떨떨한 시현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쏘고 나서, 쌩하니 자리를 벗어났다.
"어... 저, 괜찮아?"
태율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난 뒤, 시현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품에 안긴 샬레니엔을 내려 보며 물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얼어 있던 샬레니엔은 시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겨우 두 뺨을 슬며시 붉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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