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손님이 끊이질 않네

태율이 4강전 시합을 마무리 지었을 무렵,
"어?"
"어라?"
쥬드미네와 올리야 콤비는 태율이 올라올 라운지석 입구에서 같은 반의 조르딘과 제로디아와 마주쳤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하하하하,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올리야는 조르딘에게 천연덕스럽게 대꾸했지만, 다른 세 사람의 분위기는 달랐다. 쥬드미네와 조르딘과 제로디아 사이에선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라운지석은 두 명까지 초대 가능해."
"네, 알고 왔어요."
고요하고 차갑게 입을 연 쥬드미네에게 제로디아가 얌전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려가."
"싫어요."
인형같이 예쁘지만 딱딱한 표정의 쥬드미네와 길가의 꽃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고집을 꺾지 않는 제로디아는 짧은 한마디를 주고받으며 서로 팽팽하게 맞섰다.
"아하하하하하~ 이런~ 너무 인상 쓰지 말자고~"
지나치게 고조되는 긴장감 때문에 두고 볼 수 없어진 올리야가 끼어들었다.
"쥬드미네가 꼭 태율이와 만나고 싶어 해서 말이야, 오늘도 엄청 기대하면서 왔다고~ 한 번만 양보 해주면 안 될까?"
"선배들은 어제도 라운지석에 들어갔었잖아요... 오늘은 저희도 가보고 싶어요..."
"아하하하... 이거 차암... 부탁 좀 할게~ 쥬드미네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저... 아니, 저희에게도 중요해요..."
제로디아가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자, 올리야마저 살짝 눈에 냉기가 돌았다.
"...얌전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꽤 고집쟁이네?"
"....."
쥬드미네와 올리야, 그리고 제로디아와 조르딘이 서로 입을 다물고 쏘아볼 때였다.
퍼엉!!
"꺄아아아아악!"
태율이 샬레니엔을 옮긴답시고 [질풍의 권]을 터뜨린 때가 딱 그 시점이었다.
"잠깐만요!"
비명 소리에 다른 쪽으로 달려가서 태율이 시합장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내다본 조르딘이 서둘러 다른 소녀들에게로 돌아왔다.
"태율이가 오고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건가요?"
조르딘은 반문하는 쥬드미네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태율이는 서로 자기 곁에 오겠다고 싸우는 꼴을 보면 분명 질색할 거라고요!"
그 순간 소녀들의 머릿속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태율의 얼굴이 딱 떠오르며, 조르딘의 말대로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네 사람 모두에게 동시에 들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쥬드미네 선배, 이번만 양보해 주세요."
"싫어."
"선배... 오늘 또 오는 게 절대로 선배한테 좋은 결정이 아니에요!"
".....?"
쥬드미네는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애원하는 것에 가까운 조르딘의 호소에 말을 멈추었다.
"선배.... 솔직히 위험했잖아요! 사실 저희도 다 보고 있었어요."
".....!"
태율이 선빵으로 쥬드미네를 차버리려는 걸 [꼭두각시] 마법으로 억지로 막았던 것을 뜻하는 걸 알아차린 쥬드미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조르딘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만약에 선배가 자꾸 집착한다고 태율이가 확신하게 되면, 지금의 태율이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요?"
쥬드미네와 올리야는 조르딘의 지적에 말없이 그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또 선빵거절을 시도하던가, 아니면 서서히 멀어지거나...
어떻게 생각해 봐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쉬어가는 게 좋아요, 쥬드미네 선배..."
"왜 그렇게 쥬드미네를 생각해 주는 거야?"
이번엔 올리야가 조르딘에게 반문했다.
"너희 말대로라면 쥬드미네가 아예 차여버릴 수도 있다는 건데, 그럼 너희에게 좋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니라고?"
"올리야 선배, 태율이는요... 지금도 여자애들이 부담스러워서 잘 가까워지려 하질 않아요."
"뭐,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그게 지금 무슨 상관..."
"그런데 만약 그런 태율이가 거기에 몇 배나 되는 부담감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부담은 선배 한 명에게 받았지만, 완전히 부담감 자체를 안 느끼고 싶어서 아예 통째로 여자애들 전체를 신경 쓰지 않으려 들 거예요. 그렇게 되었을 때, 지금보다 철벽을 더 세게 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나요?"
조르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올리야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을 꺼냈다.
"확실히... 그 녀석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요, 태율이는... 저 시현이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은 상대예요. 시현이는 그냥 둔하기만 하지, 태율이는 조금만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 상태라고요."
태율이 전학 온 후 2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태율과 얘기를 나눠보며 나름대로 그를 자세하게 파악했던 조르딘에 분석에, 나머지 소녀들은 모두 설득되었다.
"아하하하하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모두의 파멸을 막기 위한 잠깐의 휴식이라고 해주세요."
"쥬드미네, 그렇다는데? 넌 어떻게 할래?"
쥬드미네는 눈을 내리깔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편, 모양이 좀 그렇긴 했어도, 어쨌든 시현에게 샬레니엔을 떠넘기는 데 성공한 태율은 피로감으로 뭉친 어깨를 쭉 펴며 짐승처럼 소리 질렀다.
"으와아아~~~! 피곤해애!!!"
그는 라운지석을 향해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아오, 일단 뭐라도 좀 마셔야겠... 어?"
라운지석이 있는 꼭대기 층에 다다른 태율은 라운지석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소녀를 보고 발을 멈췄다.
"조르딘, 그리고.... 어.... 아, 제로디아! 너희들이 여기 어쩐 일로....?"
"안녕~ 태율아."
조르딘에 친절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라운지석 관람 초대받고 싶어서 왔어~"
"라운지석 관람을...?"
혼자 편안하게 있고 싶었던 태율은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잠깐만.'
거의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했던 태율은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였다.
'라운지석 초대가 최대 2명이었지? 그럼 쟤네들을 받으면, 그 누나들은 안 받을 수 있는 거잖아?'
상대적으로 쥬드미네보다 덜 부담스러운 조르딘과 제로디아가 태율에게 더 나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뭐, 들어가라. 전망은 좋더라."
태율은 결국 조르딘과 제로디아를 라운지석으로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고마워~"
"고... 고마워..."
친근하게 씩 웃는 조르딘과 다소 쑥스러운 듯 작게 목소리를 낸 제로디아가 태율을 따라 라운지석으로 들어갔다.
"오늘 이긴 거 축하해~"
라운지석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메뉴판을 고르는 태율에게 조르딘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 어, 고맙다."
"멋진 시합이었어. 대단하던걸?"
아저씨 응원단을 제외한 90퍼센트 이상의 관중들에게 싸늘한 반응을 실컷 먹고 온 태율은 조르딘의 말을 듣자마자 '겉치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하~ 너 지금 내가 빈말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어...? 아니, 빈말이라니..."
"뭔가 넌 얼굴에 티가 나~"
태율은 조르딘의 장난스러운 지적에 당황했다. 표정이 몇 개 안 되는 그는 감정 같은 게 잘 드러나지 않는단 말만 잔뜩 들어왔는데, 조르딘에게 처음으로 '얼굴에 티 난다'라는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내가 그런 줄은 몰랐는데..."
"나도 처음엔 잘 몰랐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알겠더라고~"
"쯥..."
태율은 혀를 찼다. 감정이 안 드러나는 포커페이스는 시합이나 실전 때 상당히 유리한 요소였기 때문에, 무뚝뚝한 얼굴은 내심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조르딘이 보면 다 안다고 하니, 무기 하나가 휙 날아간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조르딘이 자신을 계속 보고 있었다고 어필한 속뜻 같은 건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저... 저기, 축하해...!"
태율이 조르딘하고만 얘기하는 걸 초조하게 보고 있던 제로디아가 뒤늦게 축하를 건네며 끼어 들었다.
"아, 어, 고맙다."
제로디아에게로 눈을 돌린 태율은 덤덤하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조르딘에 비해, 옆에 앉아 있다는 걸 빼곤 크게 접점이 없는(태율의 주관적 느낌으론) 제로디아가 굳이 라운지석에 찾아왔다는 사실에서 태율은 약간이지만 감이 오는 게 있었다.
'남자 마법사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접근해 오는 애들이 많다라....'
태율은 아라미레스와 폴트스가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희소성의 원칙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벌써부터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골라야하다니, 쟤들도 피곤하겠구만.'
오늘따라 유달리 우물쭈물하며 소극적으로 보이는 제로디아를 보는 태율은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차피 저렇게 소심한 애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내버려 두면 섣부른 짓은 못할 거야. 오히려 너무 의식하는 편이 더 자극 시킬 가능성이 크지.'
나름대로 제로디아에 대한 판단을 내린 태율은 제로디아에 대한 태도도 결정을 내렸다. 예전처럼 남학교가 아닌 이상, 좋든 싫든 드란지엘의 여학생들과는 어울려 지내긴 해야 한다는 건 이젠 태율도 알고 있었다.
배척받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도 않는, 태율이 원하는 건 딱 그 정도의 적절한 거리감이었다.
"뭐라도 골라보지 그래?"
그렇게 마음먹은 태율은 그 '적절한 거리감'을 위한 사소한 친절함으로 제로디아에게 손수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아, 고... 고마워..."
제로디아는 얼른 넘겨 받으며 태율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제로디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태율은 눈초리가 살짝 올라간 조르딘은 전혀 눈치채지 못 했는데, 건네는 순서마저도 고려해야할 요소라는 사실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그는 나름 자신의 행동에 만족하고 시합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1학년, 이시현!!"
"좋아, 시작한다."
태율은 입장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현을 응원하기 위해 잠깐 앉았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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