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느껴지는 너의 힘

잠시 얼어붙었던 관객석의 분위기는 시현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불가사의한 마법 능력으로 드란지엘의 수재들을 연달아 격파한 그는 이 시합의 주요 화젯거리였다. 물론 입장만 따지자면 태율도 시현과 같았지만, 관객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경기 스타일과 놀라움과 화끈함을 느끼게 해주는 스타일의 차이가 하늘과 땅 정도의 관객 반응 차이로 이어졌다.
"2학년, 세르첼 닐드라모 요시몬!"
시현의 뒤를 이어, 상대 선수가 소개되었을 때 비로소 관객들 사이에서 다시 환호성이 나와 주었다.
"역시 요시몬 선배... 엄청난 인기야."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장한 붉은 머리 소녀에게 조르딘은 감탄하며 말했다.
"유명한가?"
"요시몬 선배도 천상급 12족인 닐드라모 일족인데다가, 작년 8강까지 진출한 실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선배의 강한 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조르딘이 태율에게 세르첼의 인기에 대해 설명해주는 동안, 시합장 위에 오른 세르첼과 시현은 각자의 코너에 자리 잡았다.
"4강전 제2시합, 이시현 대 세르첼 닐드라모 요시몬, 경기 시작!!"
심판의 시작 신호는 관중들의 열기를 더욱 부채질 하였고, 관중들은 아까의 찝찝함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엄청난 환성을 두 학생에 쏟아내 주었다.
"[대지 속에 잠든 그대, 나를 위해 모습을 드러내라]!"
온몸이 바위로 이루어진 3m 정도의 커다란 바위거인이 세르첼 앞 지면으로부터 솟아올랐다.
"거인이라...."
경기를 분석하며 관람하는 태율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냥 본체를 노리면 끝나는 거 아닌가?"
그 순간 시현이 크게 원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태율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한 그는 바위 거인 뒤에 있는 세르첼을 직접 노릴 수 있는 위치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콰드드드드
그런데 바위 거인의 움직임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다. 바위 거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이동해 세르첼을 자신의 뒤로 숨김과 동시에 시현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빠른데?"
바위 거인의 재빠른 움직임을 예상 못했던 태율은 놀랐다.
"요시몬 선배의 바위 거인 마법은 이미 대단한 수준에 올라있어..."
이번엔 제로디아가 태율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저런 종류의 소환 마법은 시전자의 마력이나 숙련도에 따라 성능이 결정되거든."
"그래서 저 정도로 엄청난 움직임을 보이는 거구나. 저 큰 덩치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본체를 커버한다면, 결국 거인을 먼저 치우지 않고선 본체를 치기 어렵단 소리네."
태율은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응할까에 대해 생각함과 동시에 시현과 세르첼의 반응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레드 블라스터]!"
시현의 왼쪽 눈에서 발사된 붉은색 광선이 바위 거인의 몸통 정중앙에 적중하였다.
쿠콰캉!
육중한 바위 거인이 광선에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부스스스...
부서진 거인의 가슴에서 잔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전 시합까지 다른 학생들은 제대로 흠집조차 내지 못했던 거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이다.
"대... 대단하다, 시현이... 도대체 마력이 얼마나 강한 거야...?"
"...하지만 저걸로는..."
제로디아와 조르딘은 시현이 선보인 위력에 놀라긴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시합을 지켜보던 태율은 곧 그녀들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쿠드드드득
바위 거인의 가슴이 재생된 것이다.
"요시몬 선배의 마력이 계속 되는 한 거인은 계속 회복될 거야."
조르딘의 설명을 들은 태율은 팔짱까지 끼고 집중해서 시합의 흐름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바위 거인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현이 퍼붓는 공격들의 굉음이 줄기차게 태율의 귀를 울렸다.
'...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태율에게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느껴졌다. 마법을 사용하여 겨루고 있는 시현과 세르첼에게서, 아직 아지랑이처럼 두루뭉술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기운의 차이'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은 태율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뭐지? 기 같은 게 느껴지는 건가? 무슨 만화도 아니고...'
처음엔 잘못 느낀 건가 싶었지만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엔 실체가 없는 연기 같았던 감각이 시현과 세르첼이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사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태율은 고개를 돌려 가까이에 있는 조르딘과 제로디아를 슥 살펴보았다. 그녀들에게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시합장으로 눈을 돌리자, 마법을 사용하는 시현과 세르첼에게서는 확실히 조르딘과 제로디아와는 다르게 요동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혹시... 내가 마력을 느끼는 건가?'
태율은 갑자기 왜 자신이 그런 걸 느끼게 된 건지 의아했다. 일단 마력을 느끼는 게 맞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우선 지금 느끼고 있는 감각을 차분히 살피며 시합의 상황과 대조해 보기로 하였다.
세르첼은 바위 거인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둘이 서로 연결된 듯한 미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은 바위 거인이 빠르고 큰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스파크가 튀듯 강해졌다.
시현 쪽은 세르첼과 다른 감각이었다. 훨씬 더 크고 묵직한 느낌이었는데, 시현이 바위 거인을 향해 [레드 블라스터]를 발사할 때마다 그 느낌이 더욱 거칠고 매섭게 느껴졌다.
'어... 어째 맞는 것 같은데?'
세르첼의 바위 거인과 시현의 공방전 상황을 몇 차례 비교해본 결과, 태율은 자신이 마력을 감지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느낌에 집중해보니, 상당히 신기한 감각이었다. 체급이나 신장 혹은 몸상태 같은 상대의 스펙을 눈이 아니라 육감으로 체크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어이."
"어?"
"응?"
이름은 안 부르고 그냥 "어이"라고 불러대니, 조르딘과 제로디아가 동시에 태율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마력을 느끼거나 할 수도 있는 건가?"
"마력?"
"어.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마법을 쓸 때 마력이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던가..."
태율이 말하는 걸 듣던 조르딘과 제로디아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그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태율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태율이, 너 지금 다른 사람의 마력이 느껴진다는 거야?"
"어...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저기 시합하는 두 사람에게서 좀 그런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 좀..."
제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력 측정하는 마도구를 사용하면 마력의 움직임 같은 걸 알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걸 사람이 직접 느낄 수 있는 건지는..."
"뭐,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고.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그냥 신경 꺼라."
의심하는 듯한 제로디아의 말에 태율은 그냥 자신의 착각으로 치부하고 이야기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조르딘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진짜로 느끼는 걸 수도 있어."
"참말로?"
"응, 우리 와타로 동아리에 제일 실력 있는 선배가 해준 얘긴데,"
"응."
"상대와 대치할 때 집중을 하다보면, 상대가 가진 마력의 크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고 했어."
"응."
"아마 마력이 강한 사람이 상대를 이기기 위해 전념하며 단련하다 보면, 이따금 그런 감각이 깨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고 했어. 태율이가 하는 복싱이란 것도 와타로처럼 1대1 대결에 특화된 무술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조르딘은 전에 없이 태율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쑥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살짝 눈을 돌리며 말을 마무리하였다.
"흐음...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렸다? 근데 그게 왜 갑자기 지금..."
콰카캉!!
그 순간, 시현이 날린 강력한 붉은 광선이 바위 거인의 상체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계속 반복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강한 힘을 쏟아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시현의 마력이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며, 강력한 파장이 태율을 덮쳤다.
시현의 엄청난 파워에 관객들이 모두 놀라고 환호하고 있는 동안, 태율은 그제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때문이었구나...'
태율이 눈을 둔 쪽은 시현이었다. 지금의 시현은 태율의 피부까지 약간 저려올 정도로 막강한 마력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가진 졸라 큰 힘... 그게 내 감각을 자극했나 본데?'
다른 사람의 잠재력까지 깨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라니... 그런 생각이 들자 태율은 헛웃음이 나왔다.
"태율아, 왜 그래?"
"아니, 뭐 그냥 생각나는 게 있어서."
"흐응..."
조르딘은 태율이 왜 웃었는지 궁금했지만, 그가 자신을 귀찮게 여기게 되는 것이 걱정이 되어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래선 타임오버 될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아..."
제로디아가 부서진 상체가 수복되고 있는 바위 거인을 보며 말했다. 이번엔 꽤 결정타를 먹인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데도 바위 거인이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태율은 제로디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느낀 게 맞다면 시현이가 어렵지 않게 이길 거야."
"응?"
"마력 차이가 거의 어른과 아이 수준이야.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큰가? 어쨌든, 저렇게 거인 부수기만 반복해도 저걸 고치려고 마력을 쓰는 상대방이 먼저 쓰러지겠어."
지친 기색이 슬슬 드러나는 세르첼과 여전히 쌩쌩한 시현의 모습을 본 조르딘과 제로디아는 태율의 예측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 굉장해... 요시몬 선배도 천상급 12족 출신의 마법사야... 결코 마력이 적은 사람이 아닐텐데...!"
"그러게. 사실상 저 시합은 시현이 마력으로 찍어 누른 거나 다름없잖아...! 대체 얼마나 괴물인거야?"
제로디아와 조르딘이 번갈아 놀라움을 표현하였다.
'...응?'
그런데, 승부가 거의 결정되었다고 여기고 좀 느슨하게 관전을 하려 했던 태율은 지쳐 있는 세르첼에게서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눈빛을 더욱 칼날처럼 빛내며 이를 악물었다.
'저거 무슨 짓을 하려고...?'
태율이 미처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거의 다 회복된 세르첼의 바위 거인이 움직였다. 그것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시현을 잡기 위해 앞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것 같았다.
"[레드 블라스터]!"
그러자 시현은 이제야말로 끝을 내겠다는 듯 왼눈으로 강하게 붉은 광선을 쏘았다.
그런데, 앞으로 오려는 것처럼 보였던 바위 거인이 전진하는 대신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파앙!!!
시현의 붉은 광선은 그대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관중석을 보호하기 위해 쳐진 방어막을 때렸다.
"앗!"
"먹어랏!!!!"
빗나간 붉은 광선에 시현이 당황할 때, 세르첼의 일갈이 시합장에 울려 퍼졌다.
쿠쿵!!
그녀의 호령에 호응하듯 바위 거인이 힘차게 바닥에 두 팔을 찔러 넣었다.
콰카카카카카카카
땅이 울컥하고 뒤집히며 바위 파편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되었고, 바위의 파도는 시현을 덮치기 위해 무서운 기세로 나아갔다. 땅에서 치솟는 그것들에 얻어맞는다면 그야말로 온몸이 부서질 듯한 그런 기세였다.
"[리... 리플렉션 쉴드]!!"
타앙!!!
시현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리플렉션 쉴드]를 펼쳐 그의 바로 앞에서 솟구치는 바위 파도를 막아냈다. 그로 인해 간신히 방어를 해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타다다다당!!
밀려오는 바위 파도는 1번으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현이 튕겨낸 바위 파도는 뒤이어 따라오는 파도와 부딪혔고 그 때문에 생겨난 충돌이 시합장을 뒤흔들었다.
쿠궁... 쿠구구구구궁...!
바위 파도들의 충돌로 인해 시합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득!
"으앗....!"
이윽고 시현의 발밑마저 무너져 내리고 말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시현은 그만 시합장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일어난 반전 같은 상황에 순간적으로 관객들이 조용해졌고, 짧은 침묵을 비집고 심판의 선언이 울려 퍼졌다.
"장외!!"
세르첼이 역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외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순간, 그녀를 응원하는 이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시합장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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