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결승 진출자 확정

시현은 한 귀퉁이가 완전히 박살난 시합장 위로 올라왔다. 시합장의 파손도 경기의 일부로 포함하는 룰 때문에, 경기는 그 상태로 다시 재개되었다.
"7분 정도 남았나..."
태율은 경기장 상단의 전광판을 보며 남은 시간을 체크했다.
"저쪽이 같은 방식으로 또 시현이를 장외시켜버릴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냥 판정까지 질질 끌면서 도망 다닐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시현이한테 불리한 상황이 된 건 확실한걸."
두 소녀는 태율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마 요시몬 선배가 저런 마법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분명 작년엔 없던 마법이었어. 아마 1년 사이에 특기 마법이 강화된 것 같아."
제로디아의 말에 태율은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렸다.
"근데 너도 유급했냐?"
"어?? 유... 유급이라니...?"
"1학년인데 작년 경기를 어떻게 봐?"
"아니...! 드란지엘의 결투 경연은 누구라도 와서 볼 수 있거든...!"
제로디아가 보기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관중석을 가리켰다.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태율은 시합에만 집중하다가 생각의 시야가 좁아진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미리 와서 볼 수 있던 거였군. 과연... 귀족의 조기교육 같은 건가."
"정말.... 우리 부모님께서 이 대회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왔던 거지, 교육 같은 딱딱한 게 아니었다고..."
"그래?"
제로디아의 말을 들은 태율은 '어라?'하는 생각이 들었고, 잠시 뒤 제로디아에게 물었다.
"그럼 오늘도 부모님께서 관람하러 오셨나?"
"응? 어..."
"근데 넌 부모님하고 안 있고 여기 와있는 거야?"
"응..."
제로디아는 살짝 몸을 비비꼬며 대답했다.
"허허... 그러면 쓰나. 기숙사에 있으면서 부모님과 잘 만나지 못했을 거 아냐?"
"으...응??"
"기껏 부모님께서 너랑 같이 하시려고 오셨는데, 넌 여기 있으면 되겠나?"
"어...???"
느닷없이 태율이 근엄하게 나무라자, 제로디아는 얼이 빠져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꼴을 보던 조르딘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 나왔다.
"으아... 꼰대..."
태율은 조르딘의 혼잣말을 들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할아버지와 붙어 다니면서 그분의 인생 철학을 배워온 그는,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따금 어린 꼰대 소리를 듣고 살아왔다. 이미 익숙한 말이니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꼰대'라는 타이틀에 맞게, 옳은 건 꼬장꼬장하게 밀어 붙이는 게 맞다는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있을 때 같이 시간을 보내야 효녀지. 안 그래?"
"뭐... 뭐야! 갑자기 왜 내가 야단맞는 거야...!"
평소 조용하던 제로디아의 입에서 오늘따라 두 번이나 큰 소리가 났다.
"부모님한테는 벌써 허락 받고 온 거야! 두 분도 흔쾌히 가라고 하셨고!"
"허어~ 당연히 자식을 아끼는 부모님이라면 허락하시겠지만, 너도 그분들을 생각해서..."
"네 얘기를 했더니 꼭 가보라고 하셨단 말이야!!"
"어...허...??"
제로디아의 항변에 태율의 말문이 갑자기 턱 막혔다.
'부모님에게 내 얘길 했더니 꼭 가보라고 했다고...?'
제로디아가 한 말을 들은 태율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이거 그건가? 딸을 부추겨서 희귀한 남자 마법사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귀족 부모의 속셈? 그렇지... 그것도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
자기 멋대로 추측을 완성한 태율은, 불현듯 제로디아가 껄끄러우면서도 측은하게 느껴졌다.
'과연 귀족... 벌써부터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아니, 뭐, 제로디아의 태도를 보면 좋은 부모인 것 같기도 한데... 그것과 이것은 별개라는 건가?"
결국 '제로디아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건 귀족인 부모 때문이다.'라고 판단한 태율은 '그렇다면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없으니, 그냥 모르는 척 적당하게 지내자.'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뭐, 너 좋을 대로 해라."
"후후, 그럴게..."
약간 난처한 표정의 태율과 그의 대답에 살며시 미소 짓는 제로디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조르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뭐야, 제로디아? 그렇게 얌전한 척하더니, 벌써 부모님한테까지 다 얘기해 놓고 접근하는 거였어?!'
눈에서 불꽃이 튀는 조르딘과 그런 그녀를 눈치 챘으면서도 슬쩍 모른 체 해버린 제로디아, 두 소녀 사이에서 흐르는 불편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태율은 서둘러 다시 시합 쪽으로 온 신경을 돌려버렸다.
'시간은 얼마 안 남았고, 판정은 불리하다. 뭔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시현아.'
태율이 그렇게 생각을 하자마자, 그의 생각이 전달이라도 된 것처럼 시현의 움직임이 지금까지와는 달라졌다. 먼 거리에서 [레드 블라스터]로 승부하던 그가 바위 거인을 향해 앞으로 돌진해 나가는 것이었다.
'근접해서 최대 화력을 퍼붓겠다는 건가?'
태율은 시현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시현과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에선 최대한 강하게 바위 거인을 때려 부숴 재생 시간을 늦추고 그때 발생한 틈을 타 본체인 세르첼을 쳤을 터였다.
'저렇게 나온다는 건 [레드 블라스터] 연사 이상의 폭발력을 보일 수 있다는 뜻이렷다? 어디 한번 보여 줘봐!'
태율 뿐만 아니라 모든 관중들의 기대감과 궁금증이 섞인 시선 아래, 시현이 드디어 주문을 외쳤다.
"[나의 대적을 베는 은색의 검이여]!!"
시현의 오른손에서 찬란한 은빛 마법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들 사이로 놀라움의 파도가 일며 웅성거림이 퍼졌다.
"차아앗!"
시현은 은빛 검을 앞으로 내밀고 바위 거인의 지근거리로 뛰어 들었다.
슈와아아아아!
바위 거인이 육중한 주먹을 내리 꽂았다.
촤아악!
집채만 한 돌주먹이 시현에게 닿기 직전, 시현은 은빛 검을 휘둘러 돌주먹을 받아낸 뒤 옆으로 흘려냈다. 그리고,
"[레드 블라스터]!!"
콰캉!
제로거리 [레드 블라스터]가 작렬하자, 바위 거인의 팔이 송두리째 박살이 났다.
"와... 와타로?!"
시현이 사용한 근접전 기술을 알아본 조르딘이 놀란 소리를 냈다.
"와타로? 네가 하는 그 동아리?"
"어! 단검이 아니라 마법검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저건 분명 와타로의 동작이야!"
콰카카캉!
그 순간, 거인이 하나 남은 주먹으로 가한 공격을 은빛 검으로 또 흘려낸 시현이 아까와 똑같이 [레드 블라스터]를 발사해 두 번째 팔도 완전히 분쇄해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와타로를 저런 식으로 사용할 줄이야..."
태율은 경악하는 조르딘과 그녀에 못지않게 놀라서 감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제로디아를 본 뒤, 다시 시현을 보았다. 시현은 빠른 속도로 움직여 재생되려는 거인의 왼팔 부분을 검으로 후려친 다음 연속으로 [레드 블라스터]를 쏴버리는 이중 타격을 가했다.
콰직 콰카캉!!
"아...아아!"
파괴음과 동시에 바위 거인의 재생에 힘을 쏟던 세르첼의 비명 같은 한탄이 터져 나왔다. 거인의 재생이 막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체의 절반 정도가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아하, 너희들이 왜 놀랐는지 알겠다."
태율은 또 다시 검과 레이저의 이중타격으로 바위 거인의 한쪽 다리를 박살내는 시현을 보며 말했다.
"와타로를 저런 식으로 사용한 인간이 없었던 거구나? 검이나 둔기로 해야 할 걸 소환한 마법검으로 해대는 미친놈은."
"마... 맞아. 저 움직임 자체는 와타로지만, 마법검과 또 다른 마법이라니, 특기 마법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돼...!"
"마력이 두 배는 들어가는 짓이겠지. 아니, 소환한 마법검을 계속 유지해야 하니 그 이상이려나? 하여간..."
쿠쿠쿠쿠쿵 쿠와아앙!!
시현이 바위 거인의 하체를 완전히 부수었고, 두 팔에 이어 두 다리까지 모두 잃은 바위 거인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며 으스러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진동하였다.
"대단한 녀석이야."
태율은 흩날리는 돌조각들과 잔해의 먼지 속에서 빛나는 은색 마검을 들고 폼나게 서있는 시현을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승리를 눈앞에 둔 친구에 대한 축하이자, 이제 결승에서 맞붙게 될 강적에 대한 도전의식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파괴된 바위 거인이 머리와 가슴 부위만 남아 땅바닥에 나뒹굴었을 때, 시합 시간을 가리키는 타이머는 1분 정도가 남았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첼은 그 1분을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가진 마력의 대부분 소모하였고, 그녀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였다.
"승자, 이시현!!"
승리자인 시현의 이름이 경기장에 메아리치자, 어마어마한 함성이 시합장을 뒤덮었다. 마법의 본산인 그룬마가트 사람들조차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인 시현에 대한 격한 갈채였다. 박수를 보내는 이들 중에는 언제나 관중석에 자리 잡아왔던 남색 포니테일도 있었고, 그녀 옆의 노란 올림머리 귀족 부인도 어처구니없는 괴물을 봤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약속은 지켰구만."
태율은 기분 좋게 라운지석을 나섰다. 그의 뒤로 조르딘과 제로디아가 잽싸게 따라 붙었다.
"약속?"
"결승에서 만나자고 했거든."
"헤.... 그렇구나. 친구가 올라와서 기분은 좋겠지만, 우승은 힘들어진 거 아니야?"
태율은 조르딘의 물음에 딱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근접전 능력은 내가 앞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것도 장담할 수가 없겠어."
"무기를 들 수 없는 경연에선 와타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무술인데, 그런 식으로 해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지."
"와타로... 솔직히 잘 모르는 무술이긴 한데..."
얼른 집에 돌아가서 로델과 야닌에게 와타로에 대한 대처법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태율에게, 조르딘이 슬쩍 말을 붙였다.
"어... 혹시 따로 약속이나 바쁜 일 있어?"
"? 아니, 집에 갈 건데."
"음, 그럼 가는 길에 와타로에 대해서 내가 조언 좀 해줄까?"
"네가?"
태율은 그녀가 와타로 동아리 소속이란 점이 떠올랐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원래 혼자 돌아가고 싶었던 태율의 마음이 조금 쉽게 흔들렸다. 태율이 조르딘의 제안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조르딘의 노력이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최대한 태율에게 부담을 안 주려고 지나치게 다가서지 않았던 탓에, 조르딘에 대한 태율의 경계심이 쥬드미네나 제로디아에 비해 훨씬 낮았던 것이다.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아니~ 나도 기왕이면 우리 반에서 우승자가 나오는 게 좋으니까."
"그래, 그럼 사양하지 않고 질문 좀 할게."
생각보다 훨씬 쉽게 조르딘이 귀갓길 동행을 허락받자, 이를 지켜본 제로디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는 얼른 통신용 마도구를 꺼내 그녀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태율아...!"
제로디아는 앞서가는 두 사람을 서둘러 따라잡았다.
"나도... 같이 가!"
"너, 부모님하고 같이 왔다고 하지 않았어? 기다리실 텐데?"
태율의 말에 제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하하... 두 분이 따로 시간을 가지신다고 먼저 가셨어...!"
"아... 그러냐...?"
"저기... 우리 아빠가 공립 마법 연구소 소속이거든...? 그래서 마법에 대해서 라면 나도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저기, 같이 가도 될까?"
조르딘에 비해 제로디아는 태율에게 훨씬 부담스러운 친구였지만, 그렇다고 이미 부모님이 먼저 가버렸다는 그녀를 혼자 두기도 좀 뭐했다.
"알았어. 그럼 부탁하지."
"헤헤..."
제로디아는 마지못해 승낙한 태율의 옆에 웃으며 다가갔다. 태율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에 선 조르딘이 제로디아를 슬쩍 쏘아봤지만, 제로디아는 또 천연덕스럽게 전혀 모르는 척 순수한 얼굴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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