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사라지다

고스트 드래곤이 막 시현을 향해 안개 브레스를 내뿜으려는 것을 보자마자, 공중으로 날아 놈을 막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한 태율은 [질풍의 권]을 터뜨려 시현 쪽으로 몸을 날렸었다. 그의 빠른 판단 덕에 브레스가 시현과 심판들을 집어삼키기 직전에 시현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초조차 너무 긴 촉박한 순간이었기에, 태율은 [강철의 권]으로 전환하여 방어할 시간도 허락받지 못했다.
퍼어엉!!
태율은 곧장 강풍을 터뜨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지만, 몰려오는 브레스를 막아내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다. 하얀 안개 뭉치는 잠깐 멈칫하며 조금 흔들렸을 뿐, 다시 전진을 해왔다.
이제 시현과 심판들뿐만 아니라 태율까지 몽땅 브레스의 제물이 될 찰나, 위기를 이겨내려는 태율의 본능은 봉인해 두었던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후와아아아아아
마력 폭주.
태율의 손으로 그가 가진 대량의 마력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댐이 터져 격류가 휘몰아치듯 태율의 두 주먹에 급격히 집중된 마력이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콰카캉!!
마력 폭주의 강력한 폭발은 연무의 브레스를 흐트러뜨리는데 성공하여, 절반이상의 브레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가량의 브레스가 뒤이어 날아와 태율을 덮쳤다.
화아아악!! 파앙!!
브레스 자체가 가진 물리력에 태율의 몸이 튕겨 날아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내동댕이 쳐졌다.
"끄...으...아아...."
이 세상 것이 아닐 정도로 한없는 냉기가 태율의 전신에 퍼졌고, 그에 따라 갈라져 찢길 듯한 고통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았다.
고스트 드래곤의 브레스가 선사하는 격통에도 불구하고,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냈던 전투와 마지막 마력 폭주로 인해 고갈된 육신은 몸을 비틀며 괴로워할만한 여력도 갖지 못 했다. 그는 고깃 덩어리처럼 축 놓인 채 희미해져 가는 의식과 함께 신음했다.
"어...어억....억...."
거의 정신을 잃고 기절할 무렵, 뺨을 스치는 이질적인 감각이 태율의 눈꺼풀을 붙잡았다.
‘....이...건...?'
마력의 감각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달랐다. 보통의 인간들에게서 느껴지던 그런 감각이 아니었다. 사람의 것이 아닌 뭔가가 섞인 듯한 그런 미묘한 느낌이었다.
'어디야....?'
태율은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동자를 굴려 마력의 발신지를 찾았다. 힘겹게 옮겨가던 눈이 멈춘 곳은 시현의 등이었다.
'...뭐야... 저게....?'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시현의 뒤에 솟아나 있었다. 시현의 머리보다도 작은 사이즈의 그것은, 흐릿한 태율의 눈엔 언뜻 자라다 만 날개처럼 보이기도 했다.
"....블라스터]!!"
브레스에 직격당한 영향으로 청각도 마비가 왔는지, 시현이 주문을 외치는 소리도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눈과 귀로도 시현이 내지른 마법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쿠와아아아앙!
각각이 사람 몸통만한 굵기의 [블루 블라스터] 세 줄기가 굉음을 울리며 발사되었다.
콰자작 콰아아아아 쿠웅
고스트 드래곤을 산산조각 내 가루로 만들어 버린 세 줄기의 [블루 블라스터]는 내외부의 숱한 마법에도 절대 뚫리지 않았던 방어벽 상단까지 구멍을 뚫고 나아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흐아아.... 괴물 새끼....”
태율은 이 장면을 목격한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보는 이들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가공할 일격을 가한 후, 시현의 등에선 검은 날개 형상의 연기가 스륵 사라졌다. 그렇게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시현은 곧바로 태율에게 달려갔고, 그는 두 손이 피범벅이 된 채 기절한 태율을 안아올렸다.
“태율아! 태율아!!!”
그렇게 시현이 태율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을 때,
“아누스 로바넬 엘브로펜.”
한 무리의 무장한 경비대원들이 관객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은 상식을 넘어선 위력의 마법을 목격하고 넋을 잃은 관중들 사이를 지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던 회색 머리의 중년 남자를 포위했다.
“겁도 없이 이런 곳에 대놓고 나타나다니.”
대장 격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중년 남자에게 검을 뽑아 겨누자, 나머지 대원들도 그녀를 따라 일제히 검을 뽑았다.
“아? 아아... 들키고 만 건가?”
깜짝 놀라 물러서는 관중들의 시선 속에서, 아누스 로바넬 엘브로펜이라 불린 중년 남자는 주머니에 들고 있던 구슬을 넣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는 마석이 박힌 검들이 살벌하게 자신을 겨누고 있음에도, 태연한 얼굴로 왼손 약지의 붉은 돌이 박힌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만하면 외모를 꽤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수염 좀 기른 정도론 어림도 없었나 보군.”
“시시한 소리는 집어치워라. 널 체포하겠다.”
“하하하, 고작 이 정도 병력으로 날 체포하겠다니... 관중들 사이라 내가 날뛰지 않을 거라 믿은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날 우습게 본 건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입을 놀리는 중년 남자의 손가락이 매만지던 반지의 붉은 돌을 꾹 눌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가운데 버튼이 달린 타원형의 손가락만 한 물체를 꺼냈다.
“난 좀 반골 기질이 있어서 말이야~ 어느 쪽이든 너희들 원하는 대로는 하기 싫다고. 싸울 생각도, 잡힐 생각도 없지.”
“체포해!”
경비대원들이 엘브로펜을 잡으려고 접근하려 하자, 그는 물체에 박힌 스위치를 꾹 눌렀다.
파바바밧
남자의 몸이 백색 빛에 휩싸이며 흐려져 갔다.
“순간이동 마도구다! 빨리 막아!”
경비대장이 뒤늦게 달려들었지만, 엘브로펜은 여유로운 웃음을 남기고 그녀들의 손이 미처 닿기 전에 빛과 함께 사라졌다.
엘브로펜이 경비대원들에게 막 포위당했을 무렵, 콜로세움 경기장 지하의 방어벽 생성 마석이 있는 코어룸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헉... 헉....”
방어벽을 해제하고 태율을 구하기 위해 코어룸으로 달려왔던 아라미레스가 코어룸 한쪽 구석에서 이마에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비....빌어먹을....!”
그가 노려보는 자는 회색 머리 중년 남자와 함께 있었던 마스크를 낀 금발 여자였다. 그녀는 코어 마석을 수문장처럼 가로막고 서있었다. 마스크 여자의 등 뒤에는 두 줄기의 적금색 채찍 같은 것들이 솟아나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아라미레스를 포함한 십수 명의 경비대원과 마법사들을 쓰러뜨리고 제압한 그녀의 마법이었다.
“너무... 강해...!”
아라미레스와 같은 목적으로 달려왔다가 마스크 여자에게 당해 기절한 쥬드미네를 끌어안고 코어룸 구석에 주저앉아 있던 올리야가 입술을 덜덜 떨었다. 마스크 여자가 보인 압도적인 전투력에, 올리야는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를 완전히 빼앗겨 버린 상태였다.
“[너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경비대원 하나가 오른손을 뻗어 마스크 여자에게 마법을 날렸고, 그녀의 옆에 있던 동료가 마석으로 강화된 검을 치켜들고 덤벼들었다.
취리릭!
적금색 줄기 두 개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공중을 갈랐다.
팡!
첫 번째 줄기는 경비대원이 날린 마법을 깼고,
“아아악!”
두 번째 줄기는 또 다른 경비대원이 내리치는 검을 부수며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취릭!
포박 마법을 부순 첫 번째 줄기가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경비대원을 끝장내기 위해 날아들었다.
“[레드 블라스터]!”
쥬웅! 탕!!
아슬아슬한 순간, 아라미레스가 발사한 광선이 줄기를 때려 쳐냈다. 그 사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폴트스가 얼른 부상입은 경비대원을 낚아채 뒤로 빠졌다.
“헉... 헉.... 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빛]!”
폴트스는 신속하게 주문을 사용해 경비대원의 어깨를 복구시켜 주었다. 마스크 여자에게 부상당한 사람들을 연속으로 치료해야만 했던 그는 어마어마한 피로에 얼굴빛은 창백해지고 눈밑이 검게 변해 있었다.
“....”
마스크 여자는 자신을 방해한 아라미레스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적금색 줄기들을 거둬들인 뒤 아라미레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아라미레스가 섬뜩한 느낌에 몸이 굳는 순간, 마스크 여자가 갑자기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붉게 빛나는 마석이 박힌 펜던트를 꺼내 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펜던트를 집어넣고 다른 주머니에서 엘브로펜의 것과 같은 스위치 달린 물건을 꺼낸 그녀는, 엘브로펜과 마찬가지로 순간이동을 시작하였다.
파바바밧
마스크 여자가 백색 빛과 함께 사라지고 난 후, 위기감이 가득했던 코어룸이 너무나도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털썩
아라미레스는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없어지며,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이날의 모든 사건이 끝이 났다.
전 대륙에 널리 알려진 화제의 이벤트이자, 유서 깊은 드란지엘 경연의 피날레를 장식해야 했던 결승전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끝나버렸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그 사건을 마무리 지은 시현의 능력 또한 같이 목격한 탓에, 관객들은 놀라움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꽤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현에 대한 소문은 점차 넓게 퍼져나가게 되었다.
드란지엘의 결승전에 습격이 벌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공국 정부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이후 보고를 받은 대공이 직접 내린 명령으로, 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진 것은 결승전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코어룸에서의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크게 다치거나 목숨까지 잃을 뻔했지만, 폴트스가 활약한 덕택에 심각한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능력으로도 모든 부상은 막을 수 없었다. 구급대원들은 코어룸에서 결국 기절한 폴트스를 포함한 몇몇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호송해야만 했다.
한계 이상의 힘을 쏟아낸데다가 마지막엔 몸 바쳐 시현을 구해내기까지 했던 태율 또한 병원으로 실려간 부상자 중 하나였다.
“아으....으....”
병원으로 실려간 날 저녁, 태율은 전신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신음하며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는 어리둥절한 채로 주위를 살피며 상항 판단을 해야만 했다.
하얗고 적당히 푹신한 침대, 가슴까지 덮여진 이불, 그리고 미묘하게 느껴지는 약 냄새...
‘...병원인가?’
태율은 한참만에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욱....!”
온몸이 아팠지만, 특히 강한 통증이 양손에서 느껴졌다. 이불 밖에 내놓은 두 손을 올려보니, 거의 권투장갑 정도로 두텁게 감긴 붕대가 눈에 보였다.
“아으... 안 아픈 데가 없네...”
두 손에 이어 다른 곳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는데, 특히 이불로 덮인 몸 쪽에 상당한 압박감이 있었다.
“....?”
그런데 단순히 압박감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이불로 덮인 태율의 몸이 상당히 크게 불뚝 솟아 있었다.
“...뭐야... 뭘 눌러 놓은 거야?”
태율은 누운 채로 붕대로 만든 공이 달린 두 손을 어찌저찌 움직여 이불을 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머나, 씨발! 깜짝이야!!!”
그는 누워있는 자신의 몸 위에 고양이처럼 올라가 자고 있는 쥬드미네를 발견하고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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