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태율과 쥬드미네

“우으응...”
태율의 몸 위에 올라가 곤히 자고 있던 쥬드미네는 태율이 내지른 씨발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는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우으응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 아니, 아.... 그러니까, 누나가 여기 왜 있는 겁니까?”
“...???”
쥬드미네는 태율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특유의 무표정인 그녀는 태율의 위에서 전혀 내려올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아니, 거기 있지 말고 내려오라고요!”
“....??”
“아오, 존나 무겁다니까요?”
평소엔 여자에겐 잘 뱉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상소리까지 섞으며 태율이 계속 주절거렸건만, 쥬드미네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버티고 있었다.
‘저 인간이 대체 왜 저렇게 병신같이 구는 거야? 진짜 대가리라도 존나 깨진 건가?
.....응? 어라?’
쥬드미네에 대한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르려는 찰나, 태율은 귓구멍이 허전한 걸 느꼈다. 그는 붕대공 손으로 귀 쪽을 문질러 만져 보았다.
‘엑? 번역 마도구는...??’
항상 귓구멍에 신체의 일부처럼 박혀있던 번역 마도구가 없었다. 그제야 태율은 쥬드미네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번역 마도구가 없는 그는 지금까지 계속 한국어로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있지?’
태율은 베개 위의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며 번역 마도구를 찾았다. 하지만 누워 있는 채인 그는 그게 어디 있는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아이 썅... 이걸 어쩌냐...?’
곤란해하던 태율은 별수 없이 수업시간에 배우긴 했지만 잘 하지는 못하는, 그룬마가트의 표준어인 황도어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회화를 시도했다.
“나... 이거, 이거 없어졌어... 그래서 이해 못 해... 그리고 말 못 해.”
“....!”
표정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쥬드미네의 눈이 좀 커지긴 했다. 그녀도 겨우 태율의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폴짝 뛰어내려 병실 안 탁자에 놓인 태율의 번역 마도구를 들고 왔다.
“자.”
쥬드미네는 태율의 귀에 번역마도구를 하나씩 꽂아주었다.
“잘 들려?”
쥬드미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태율은 자신이 제대로 번역마도구를 착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
“그런데, 누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신세를 진 태율은 마음이 약간 누그러져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한 쥬드미네에게 그나마 침착하게 물을 수 있었다.
“입원했어.”
“입원? 누나도 다쳤어요?”
“응.”
“어쩌다가...?”
“....”
쥬드미네는 인형 같은 눈으로 태율을 잠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방어벽을 열기 위해 코어룸으로 갔다가... 그곳을 지키던 테러리스트에게 당했어.”
“어어...? 테러리스트에게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은 사연을 들은 태율은, 불현듯 방어장벽에 가로막혀 시합장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던 입장로의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앗, 아아... 설마, 방어벽을 열어서 저희를 도와주려고...?”
“.....”
쥬드미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태율은 그때 새삼 쥬드미네의 이마를 감고 있는 붕대가 눈에 보였다.
“....많이 다쳤어요?”
“한 대 맞고 기절했을 뿐이야. 많이 안 다쳤어.”
쥬드미네는 태율이 못 보게 하려는 듯 두 손을 들어 붕대를 가리며 대답했다.
“아아.... 그... 고맙습니다... 저를, 그러니까 저희를 구해주려고 다치기까지 하고...”
사정도 모르고 그녀에게 속으로 욕을 한 것이 미안해진 태율의 말투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괜찮아.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걸. 해결은 결국 너희 둘이 해냈으니까.”
“아니,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나서 주신 것만 해도 굉장한 걸요...!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닌데...!”
“....”
태율이 쓸데없이 덧붙인 마지막 말에 그렇지 않아도 무표정인 쥬드미네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실망감 같은 것을 읽어낸 태율은 순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니, 아... 그러니까... 누나가 그렇게 다쳐가면서까지 구해줄 만한 가치가 저한테 없다는.... 제가 올리야 누나도 아니고...”
“....”
“아니, 아니지...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인형 같은 외모의 쥬드미네는 더더욱 진짜 인형처럼 창백하게 굳어갔고, 무슨 말을 해도 수습이 안 되는 상황에 몰린 태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아....”
쥬드미네가 가진 감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태율은 될 수 있으면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구하려고 부상까지 무릅쓴 쥬드미네를 속상한 채로 내버려 두기도 영 뭐 했다. 이를테면, 양심에 찔렸다.
“저기...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
“고맙습니다. 뭐, 이렇게 말하는 게 좀 웃기긴 한데.. 친하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친해지면 되죠. 그렇죠?”
“....?”
“그런 의미에 감사의 표현까지 더해서... 퇴원하면 제가 누나한테 밥이라도 한 번 살게요.”
“.....!”
쥬드미네의 연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어... 그러니까, 제가 한 말은 용서해 주고 마음 푸세요.”
쥬드미네는 그녀치곤 제법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그녀의 뺨엔 약간이지만 붉은 기운이 돌았다.
“에휴....”
그런 쥬드미네를 보는 태율의 입에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너무 가까워지는 건 그가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별 수 있냐... 거리 조절을 잘 해야지... 거리 조절은 아웃 복싱의 기본이더라~’
자신을 깔고 자던 쥬드미네의 행동은 따져 보지도 못하고, 태율은 속으로나 한탄 같은 말을 씨부릴 뿐이었다.
덜컹
“어이, 괜찮냐?”
쥬드미네와 비슷하게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라미레스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 형?”
“꼬라지 봐라. 아주 볼만하네.”
“형은 또 왜 그 꼴인데?”
두 사람은 서로 다친 모습을 야유했고, 아라미레스가 들어오자 쥬드미네는 조용히 태율의 옆 침대로 가 누웠다.
“네놈 새끼 구하려다 이렇게 됐다. 폴트스는 아예 나자빠져서 링거 맞고 있어.”
아라미레스는 코어룸에서의 싸움에 대해 태율에게 얘기하였다.
“그러니까 형 말은, 방어벽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게 테러리스트 짓이란 말이지? 형들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해제하려다가 거기 지키던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거고?”
“그래.”
“아니, 얼마나 강한 사람이길래 그렇게 여럿이 달려갔는데도 다 깨졌어?”
“...괴물이었지.”
아라미레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있는 쥬드미네를 곁눈질로 슥 보았다.
“그거에 대해선 나중에 집에 가서 자세히 얘기해 주마.”
“왜? 뭐가 더 있어?”
“가서 해준다고.”
“궁금한데...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
“아 이 새끼!! 나중에 해준다니까?”
“저 성질머리... 알았다, 알았어!”
아라미레스가 버럭 짜증을 내자, 태율도 멋대로 하라는 식으로 대꾸해버렸다.
“난 먼저 간다.”
“뭐야, 형은 입원 안 했어?”
“폴트스가 치료해 준 덕에. 대신 폴트스가 뻗었지만. 나중에 폴트스랑 같이 퇴원하던가.”
“그래야겠네...”
“조금 있으면 여기도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까 난 지금 갈 거야.”
“엥? 왜?”
“간다.”
태율은 대답도 잘 안 해주고 쌩 가버린 아라미레스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으호오! 우리 슈퍼스타!! 몸은 멀쩡하신가?!”
“보아하니 이만하면 별일 없구만!!”
“이런 건 고기 먹으면 낫는다, 고기!!”
아저씨 응원단들이 태율의 병실로 들이닥쳐 시끌벅적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태율의 활약을 요란하게 칭찬하며, 앞으로도 계속 태율을 응원하겠다는 말을 아주 정신 사납게 쏟아냈다.
“그럼 몸조리 잘하거라, 슈퍼스타!!”
“나중에 우리 가게 놀러 오너라! 고기 먹여주마!!”
아저씨들은 나갈 때까지 시끄럽게 떠들며, 그야말로 태풍처럼 닥쳤다가 태풍처럼 떠나갔다.
“...시끄러워...”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쥬드미네가 아주 조용히 중얼대자, 태율은 괜시리 미안해졌다.
덜컹
태율과 쥬드미네의 병실에 세 번째 방문객이 찾아왔다.
“쥬드미네~”
쥬드미네와 아라미레스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붕대를 감은 올리야가 밝은 미소와 함께 병실에 들어왔다.
“아까 그 아저씨들은 뭐야?”
“....태율이 찾아온 사람들.”
쥬드미네의 대답을 들은 올리야는 웃기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녀는 병원에 들어오기 전, 로헬리느를 비롯한 하렘 멤버들에게 한참 달콤한 걱정의 말을 받던 시현을 보고 왔던 것이다.
“아하하하하하하~ 저기 앞에 시현이는 여자애들한테 둘러싸여 있던데~ 이쪽은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였네?”
“아까 그 아저씨들, 태율이 엄청 좋아했어.”
쥬드미네까지 한 마디를 더 얹고 나서자, 사실 그때까지 썩 괜찮았던 태율의 기분은 굉장히 복잡미묘해졌다. 같은 지구 출신에 같은 적과 함께 싸운 친구지만, 그 이후에 한 사람은 화사한 꽃밭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쿠리쿠리한 냄새 나는 지하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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