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직은 이 감각이 아주 낯설기만 한 건가?’
정수는 조심스럽게 왼팔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왼팔로는 닭살이 솟구쳐 있었다. 지금, 이 느낌이 마냥 낯설기만 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는 수 없겠네. 일단은 계속된 피칭을 통해서 이 감각은 조금만 더 선명하게 팔에 익혀보는 수밖에 없겠어.’
정수는 왼손의 손목을 돌리며 스트레칭하면서 말했다. 해당 증상은 투수 지망생이던 정수의 초등학생 시절에도 많이 보였던 증상이었으니까.
‘아직 팔에 제대로 벨런스가 잡히지 않았을 때나 나오는 증상이니. 슬슬 웨이트 트래이닝을 병행하면서 왼팔에도 근육을 붙여야겠네.’
정수는 왼손에 쥔 공을 위로 던졌다가 받으면서 생각했다. 지금 들끓는 육체가 진정한 이후에야 제대로 된 투구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수, 너 엄청 대단하다.”
그렇게 정수가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정수의 귀에는 제법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정이병님?”
정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동그란 알의 안경을 쓴, 정이병이 정수를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각판을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반갑습니다. 정이병님.”
정수는 마운드에서 내려가 정이병의 손을 맞잡으면서 악수를 가졌다. 이에 정이병은 달갑다는 듯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반갑다. 박이병.”
정이병은 정수와 악수한 오른손을 흔들면서 반가움을 표했다.
“이야, 세상일이라는 게 참 모르는 일이구나. 첫날에 그렇게 야구를 관두려고 했던 녀석이 이렇게 매서운 공을 던지는 녀석이 되었다니. 정말 대단해 박이병!”
정이병은 정수를 향해서 엄지를 치켜들면서 말을 이어 갔다. 정수는 이에 멋쩍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체 그날 내가 왜 그랬던 걸까.’
며칠 전의 일을 머릿속에서 떠올린, 정수는 당황한 듯이 얼굴을 대추처럼 붉혔다. 꼴에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서였다.
“정이병님, 그날 범한 결례는 죄송합니다.”
“에이 아냐. 사람 살면서 실수도 할 수 있고, 뭐 그런 거 아니겠냐? 그냥 편하게 생각해.”
정이병은 정수에게 새하얀 건치가 드러날 정도로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화답했다. 정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 정이병님, 이곳에는 갑자기 무슨 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려는 그 순간, 정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며 물었다.
‘정이병님께서는 분명히 이 야구부에서 맞고 있는 역할은 코치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여기에 오신 거지?’
정수는 손으로 턱을 부여잡으면서 고민했다. 투수 코치라는 보직에는 이하사라는 확실한 인물이 있었으니까. 또 다른 코치인 정이병이 이곳에 올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아, 나? 다른 게 아니고 이하사님께서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내가 대신해서 왔지.”
정이병은 자신도 어색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정수는 그런 정이병을 따라서 허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네. 그렇게 투수 피칭을 보고 조언하는 데에 진심인 이하사님께서 대체 무슨 일이 생기셨길래. 자리를 비우셨데?’
정수는 의문을 표했다. 이하사, 즉 이 야구부의 매인 투수 코치인 그가 단순한 게으름과 같은 이유로 야구부에 결장할 확률은 거의 없을 거로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이하사에 대한 의문이 계속해서 깊어지는 가운데. 맞은편에 있던 정이병은 입을 열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맞다. 정수, 너 지금 투구 말이야. 힘 빼고 던진 거지?”
정이병은 그물망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정수에게 물었다. 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속내가 읽히기라도 한 것처럼.
“헉, 정이병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수는 놀람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정이병에게 물었다. 그러자 정이병은 콧대를 높게 들면서 우쭐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냐니. 그냥 지금 네가 던진 공의 무브먼트를 보고 알았지.”
“무, 무브먼트라니. 정이병님, 제 공의 무브먼트가 어땠습니까?”
정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 물었다. 지금 자신이 왼손으로 던진 공은 오직 제구에만 집중했지. 그 외에 구속과 무브먼트 같은 건, 하나도 염두에 두지 않아서였다.
“무브먼트가 어땠냐고?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꽂히는데, 스트라이크 존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왼쪽으로 휘던데?”
정이병은 자신이 본 걸 입을 생생하게 말했다. 한편, 이를 들은 정수는 의심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공이 휘었다고? 이상하네. 나는 분명히 직구 그립을 잡고 공을 던졌는데.’
정수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곰곰이 고민했다. 동시에 왼손으로 다시 공을 잡아보며 그립을 재차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그런데 박이병,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이병 박정수? 물어보실 게 있으십니까?”
“어. 당연히 있고말고. 박이병과 나는 아직 만난 지 고작 몇 일밖에 채 되지 않았잖아. 아직 서로 알지 못하는 게 태산처럼 많다니까?”
정이병은 눈에 불을 켜면서 정수에게 물었다. 정수는 이런 반응이 거북하기만 하다는 듯이 계속 쓴웃음만 지었다.
“정수, 너. 구속에만 집중하고 던지면 최대 몇 km까지 던질 수 있니?”
정이병은 강렬한 눈빛의 방향을 정수의 얼굴에서 팔로 돌렸다. 정수는 그제야 쓴웃음을 멈추고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또 무슨 사회에서 있던 일이나, 여자 얘기라도 하는 줄 알았잖아···.’
정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크게 안도했다. 저런 이야기를 꺼내면, 정수는 목각인형처럼 상황을 지켜보는 것밖에 못 하니까.
“정이병님, 그 구속이라는 게. 왼팔의 구속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반대쪽 팔인 이 오른팔을 말하시는 겁니까?”
정수는 검지로 오른팔을 가리키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정이병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우, 박이병. 개그 센스 좋네. 당연히 왼팔이지!”
정이병은 입가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와 동시에 정수의 왼팔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아, 역시나. 이 왼팔의 구속이 궁금하신 거구나.’
정수는 정이병의 말에 공감한다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저 물음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는 것처럼.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아직 정확하게 측정해 본 적은 없습니다. 왼손으로 공을 던진 지 아직 며칠도 채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정수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아, 맞아. 박이병. 왼팔로 공을 던진 지 얼마 안 되었지.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이걸 지금이 아닌 나중에야 한번 물어봐야 했는데···.”
“아, 아닙니다. 정이병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한 번 측정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정수는 공을 쥔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면서 말했다. 그러자 실망으로 가득 차 있던 정이병의 얼굴에는 환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정말, 나를 위해서 한번 던져준다는 거야?”
“그, 그렇습니다. 어차피 할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저도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정수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정이병의 비위를 맞췄다. 같은 이등병이라도 정수와 정이병의 짬밥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니까.
‘거기에 팔도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뭐, 한 번쯤은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정수는 자신의 왼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왼팔은 평소와 같은 살굿빛을 띠고 있었다. 뭉쳐있던 근육이 풀린 것처럼.
“물론, 그 전에 몸 좀 풀도록 하겠습니다. 정이병님. 혼신의 투구를 하기 전에 기를 모은다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정수는 양손에 깍지를 끼고 쭈욱 내밀거나, 팔을 꺾어 스트래칭하는 등. 꽤나 다양한 방식으로 왼팔을 풀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최고의 공을 던진다. 최고의 공, 그러니까 정말 불을 던져보는 거야.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을 말이야.’
정수는 몸을 풀면서 머릿속으로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마치 오늘 이후로 이런 전력투구는 없을 거라는 것 같이.
“흐읍!”
정수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소처럼 거세게 기합을 넣었다. 그러고는 오른발을 높게 들며 와인드업을 가져갔다. 그것도 아주 침착하게.
‘오른쪽 발이 내려가는 순간, 그대로 왼팔을 빡, 하고 휘두르는 거다!’
정수는 두 눈의 시선을 그물망에 고정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던질 코스를 생각했다. 과연, 제대로 제구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채로.
‘가보자!’
정수는 그대로 오른팔을 땅에 내디뎠다. 그와 함께 육체에는 반동을 주면서 왼손을 허공에 내 휘둘렀다.
휘잉, 하고 정수의 왼팔은 그대로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휘파람 소리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따악, 하고 공이 바닥을 강타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지.’
정수는 성질이 난다는 것처럼 두 눈썹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이를 등 뒤에서 지켜보던 정이병은 본의 아니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전력투구랍시고 던진 공은 바닥에 꽂혔으니까.’
정수는 쓰라린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꽂혀 있는 공에 손을 댔다. 공은 얼마나 정확하게 박힌 건지, 제법 힘을 줬음에도 제대로 뽑히지 않았다.
“어이 박이병, 헛짓거리하지 말고 나와보도록 하게.”
정이병은 정수에게 어서 나오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 정수는 이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자리를 비켰다. 지금, 정이병은 어디에서 가져온 지 알 수 없는 낫을 손에 들고 있었으니까.
“으휴, 되었다.”
정이병은 바닥에 낫을 휘둘러, 바닥에 박힌 야구공을 손쉽게 꺼내 들었다.
“정이병님. 감사합니다.”
정수는 허리와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만약 공이 박힌 흔적이 계속 남으면, 선임들이 이를 가지고 놀렸을 게 백 퍼센트 확실해서였다.
“에이 별말씀은 사람이 긴장하고 실수 조금 할 수 있지. 안 그러냐?”
“정, 정이병님.”
“그러니까 박이병. 한 번만 더, 다시 전력투구로 던져줄 수 있을까?”
정이병은 노란 박스 안에 들어있던 야구공을 정수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정수는 자연스럽게 그 공을 글러브로 받아서 들었다.
“이병 박정수,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정수는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 들면서 말했다. 마치 방금 실패한 전력투구를 이번에는 성공시킬 자신이 있다는 것처럼.
‘너무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신중하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정수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른쪽 다리를 높게 들었다. 양팔을 머리 뒤로 넘기면서 와인드업을 취했다.
이대로 왼팔을 휘두르면서 공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정수는 투구 동작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당신이 나타날지는 추호도 몰랐으니까.’
때는 바로 왼팔을 휘두르기 직전, 정수는 멈칫하며 왼손으로 쥐고 있던 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등 뒤에서는 사늘하고 날카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으흠, 모두. 피칭 연습은 잘 되어 가고 있나?”
정수의 귓구멍으로는 익숙하고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수는 천천히 고개를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렸다.
‘대. 대대장님이 왜 거기에서 나오시는 겁니까.’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정수는 기겁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뒷짐을 쥐고 편히 서 있는 대대장이 있던 것이었다.
- 작가의말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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