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가보자!”
정수는 왼손에 묻힌 로진 가루를 탁탁, 털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오른쪽 다리를 높게 들며 공을 투구했다.
“흐읍!”
정수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크게 기합을 넣으면서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속구이지? 뻔하다 뻔해.’
우타석에 서 있던 차병장은 재빠르게 배트를 휘둘렀다. 더그아웃에서부터 대기 타석에서 봐온, 정수의 속구는 눈에 익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차병장과 달랐으니.
“스트라이크!”
“콜!”
심판은 곧바로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른 차병장은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트는 공을 맞히기는커녕, 그 어떤 것도 맞추지 못한 것이었다.
‘정수, 네 녀석 재미있군.’
차병장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장갑에 찍찍이를 뗐다가 붙였다. 동시에 그윽한 눈빛으로 정수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야, 지금 정수는 왼손으로 느려도 거북이처럼 느린 슬로우 커브를 던졌으니까.
‘어떠십니까. 차병장님. 타이밍을 뺏기 위해서 가끔 던지는 이퓨스 볼 맛이 어떻습니까!’
정수는 오른손으로 공을 받아서 들었다. 그러고는 사악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차병장을 쳐다봤다. 벙쪄 있기만 한 그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도박수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정수.’
‘별말씀을요. 최일병님, 이번에는 어떤 공을 던져야 합니까?’
정수는 최일병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려 사인을 교환했다. 최일병은 차병장을 향해서 고개를 흠칫 돌렸다. 그러고는 정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하단으로 꽂히는 강속구. 이번에도 아예 타이밍을 뺏어보자.‘
최일병은 글러브를 아래로 내리면서 말했다. 이를 보고 정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제구가 흔들리더라도, 저 정도 코스라면 최일병의 프레이밍 실력으로 스트라이크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갑니다!’
정수는 오른쪽 다리를 높게 들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기합을 넣으면서 왼팔을 거세게 내휘둘렀다.
“투 스트라이크!”
곧바로 심판은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정수와 최일병, 두 배터리는 흡족한 듯이 웃기만 했다. 공이 제구된 지점, 그리고 최일병의 프레이밍 실력까지. 모든 게, 완벽하기만 했다.
“후우, 새끼. 제법 공격적으로 나오네. 역시 파워피처는 파워피처인가?”
타석에 서 있던 차병장은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핥으면서 말했다. 자신에게도 정수가 공격적인 피칭 스타일을 고수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이번에는 어느 쪽으로 던져봐야겠습니까. 최일병님?“
정수는 허리를 숙인 채로 최일병과 사인을 교환했다. 최일병은 몸을 바깥쪽으로 내빼며 글러브를 들이댔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투심 부탁한다.’
최일병은 평범한 직구와는 다른 투심을 요구했다. 이를 본, 정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을 다시 바로 잡았다.
“흐읍!”
저웃는 거세게 기합을 넣으면서 투구를 이어 갔다. 공은 이번에도 다행히 제구한 코스로 날아갔고, 자연스럽게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재길!’
타석에 서 있던 차병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직구인 줄 알고 스윙을 가져갔는데. 공이 그대로 바깥쪽으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됐다!’
공을 던진 직후, 차병장의 배트가 제법 길게 튀어나오는 걸 보고, 정수는 헛스윙 삼진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타석에 서 있던 차병장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파울!”
심판은 파울 콜을 외쳤다. 정수는 충격 섞인 표정을 지은 채로 마운드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니, 분명히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는 거였는데··· 저기에서 기어코 배트를 휘둘러서 파울을 만든다고?’
정수는 순간, 자신이 본 것이 현실이 맞는지 의심했다. 배트를 헛스윙하면서 삼진으로 물러나려던 순간, 차병장은 모양 빠지게 무게 중심을 앞으로 내빼며 배트를 휘둘러 파울을 만든 것이었다.
‘하아, 나 참. 차병장님 생각보다 쉽게 끝내실 생각이 없구먼.’
정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공을 받고 다시 피칭을 준비했다.
‘흠, 이번에는 상단으로 날아가는 하이 패스트볼이라··· 알겠습니다.’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칭을 이어 갔다. 공은 최일병이 가져다 댄 코스로 완벽하게 제구되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차병장의 배트가 끌려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볼!”
‘아, 이건 조금 아까운데.’
정수는 잔디에 침을 뱉으면서 공을 받았다. 그러고는 피칭을 준비했다. 공을 걸러내는 선구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흐읍!”
정수는 억세게 기합을 넣으면서 투구를 이어 갔다. 공은 엄청난 속도로 공기 중을 갈랐고, 그대로 차병장의 몸쪽을 찔렀다.
“투 볼!”
심판은 곧바로 볼 판정을 내렸다. 공은 몸쪽을 향했지만, 스트라이크 존에는 걸치지 않는 유인구였기 때문이었다.
‘씨발. 선구안 하나는 더럽게 좋으시네.’
정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공을 내던졌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던진 걸까? 정수의 손끝을 떠난 공은 거세게 바닥을 내리쳤다.
“쓰리볼!”
“······.”
정수는 낯빛은 새까맣게 흐렸다. 또, 한 번의 실수로, 한 번의 제구 난조로 위기 상황을 겪게 되었으니까.
‘후우, 그래 일단은 침착하자. 침착해야만 해.’
정수는 크게 여러 차례 심호흡을 내뱉으며 피칭을 준비했다. 최일병은 글러브를 주먹으로 때리면서 사인을 보냈다.
‘몸쪽 하단으로 투심이라···.’
사인을 들은 정수는 고민했다. 저 코스로 공을 제구하기에는 너무나도 까다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차했다가, 차병장님의 정강이라도 맞춰서 부상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나는 이 야구부에서 대역죄인이 된다.’
정수는 침을 꼴깍, 하고 삼키면서 크게 긴장했다. 그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인을 거절했다.
‘다른 공, 다른 공은 없습니까?’
‘다른 공?’
정수가 사인을 거절하자. 최일병은 당황 섞인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해당 공을 초구부터 결정구로 잡아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조금만 위로 올려서 몸쪽으로 그냥 재빠른 직구를 하나 꽂아줘.’
‘알겠습니다.’
최일병의 사인을 본,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피칭을 준비했다. 지금, 그가 말한 차병장의 몸쪽으로 제법 묵직한 직구를···.
“흐읍!”
정수는 기합을 넣으며 왼팔을 휘둘렀다. 공은 아무 이상 없이 완벽하게 제구되었다. 공은 150km 후반대의 빠른 속도로 몸쪽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루킹 삼진!’
정수는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지금 자신이 던진 공이 이 승부를 끝내는 마침표 찍기를 말이다.
‘걸렸다. 요놈!’
차병장은 환희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면서 배트를 휘둘렀다. 그렇다. 차병장은 계속해서 스트라이크존에 걸치는 강속구를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수, 수비!”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허공으로 떠오르자. 정수는 큰 목소리로 수비를 불렀다. 그러자 내야, 외야에 있던 수비수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죽더라도 무작정 달리고 본다.’
타구가 하늘 높이 떠오른 순간, 차병장은 1루 베이스부터 2루 베이스까지 재빠르게 달렸다. 그 속도고, 얼마나 빠른지. 정수는 속으로 저게 4번 타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제발, 그냥 플라이로 처리해야 한다.’
정수는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차병장은 2루로 만족을 못 한 건지, 이젠 하다 하다 3루까지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수, 걱정하지 말아라. 어떻게든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정수가 간절하게 마운드 위에 주저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정수의 귓가에는 황이병의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 황이병님?”
정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유격수 자리에서 천천히 뒤로 뒷걸음질을 치는 황이병이 있었다.
“이러면···됐다!”
정수는 파악, 하고 허공에 떠오른 공을 가볍게 포구했다. 곧이어 심판은 아웃 콜을 외쳤고, 정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하마터면 조질 뻔했네.”
정수는 천천히 마운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청팀 더그아웃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이 새끼야. 괜찮아. 공은 좋았어. 차병장의 파워보다. 네 공의 구위가 더 좋았던 모양이지.”
최일병은 기가 죽어있는 정수를 천천히 어깨를 툭툭, 쳐줬다. 정수는 그제야 웅크려뒀던 어깨를 펼 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최일병님.”
“에이, 자식 겸손하기는 그래. 그 태도 변치 말고 계속 쭉, 가보도록 하거라.”
최일병은 무거운 포수 장비를 해제하면서 말했다. 정수는 그런 최일병의 포수 장비를 받아, 거치대에 걸었다. 공격에서의 주인공은 정수가 아니라, 저 타자들이었으니까.
“······ 오케이.”
마운드 위에 선 박상병은 기계처럼 딱딱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왼발을 가볍게 들며 공을 내던졌다.
“파울, 투 스트라이크!”
박상병의 공은 타자의 배트에 타격 되었다. 다만, 타구는 그리 멀리 뻗지 못하고 수비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이런 개 같은···.”
좌타석에 서 있던 배상병은 썩은 눈빛으로 박상병을 노려봤다. 박상병은 어쩌라는 듯이 입꼬리만 스윽, 올려댈 뿐이었다.
“제대로 한 번 더 던져줄 테니까. 칠 수 있으면 한번 쳐봐라.”
박상병은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타석에 서 있던 배상병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한번 쳐 봐라!’
박상병은 이번에도 오른쪽 다리를 가볍게 들며 투구를 이어 갔다. 배상병도 질 수는 없다는 것처럼 제법 크게 스윙을 가져갔다. 그 스윙이 얼마나 컸는지, 맞기만 한다면 담장을 넘길 기세였다.
따악, 하고 배트가 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박상병과 배상병의 표정에는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배상병은 두 눈썹을 찌푸린 채로 1루를 향해서 달렸다. 공은 그대로 이상하게 말려들면서, 야수들이 처리하기 쉬운 범타가 된 것이었다.
“마이볼!”
외야에 나가 있던 조병장은 큰 목소리로 외치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외야 한 가운데에서 가볍게 배상병의 타구를 처리해 냈다.
“에휴, 뭐 별거 없구먼.”
박상병은 배상병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배상병은 이에 양손의 주먹만 움켜쥐기만 할 뿐, 그다음으로는 나서지 못했다.
‘역시나 피네스 피처 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네. 구속은 확실히 느린 편이지만, 공의 회전수를 나보다는 몇 배 더 많이 만들어서, 야수들이 최대한 처리하기 쉬운 범타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어.’
박상병의 투구 내용을 본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지금 박상병의 투구 내용은 흔히들 맞혀 잡는다, 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과연 점수를 낼 수는 있으려나?’
정수는 혀를 끌끌, 차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야구에서 클린업 트리오라고 하는 3- 4- 5번 타자가 이렇게 제대로 손도 못 쓸 줄은 몰라서였다.
‘아무래도, 박상병님이 먼저 쓰러지느냐, 아니면 내가 먼저 쓰러지냐. 결국에는 그 싸움이겠네.’
정수는 새침한 눈빛으로 박상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박상병도 유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새기의 라이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 작가의말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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