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삶
“······씨, 선우씨?”
익숙한 중저음.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흰머리로 가득한 짧은 머리에 온화한 얼굴.
모란 그룹 회장 이재진이 왜 내 앞에···?
“회장님도 죽으신 건가요?”
“······?”
이재진이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가 선우씨 아니었으면 죽었을지 모르는 몸이긴 했는데, 덕분에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지 않은가.”
살아있다고···?
‘뭐지? 꿈을 꾸는 건가?’
마력 부작용을 겪으면서 하루라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갈망 때문인지 단꿈을 자주 꿨었다.
신체가 멀쩡해지고 여느 젊은 사람들처럼 청춘을 즐기는 그런 꿈들.
허나, 이렇게까지 또렷한 꿈을 꾼 적은 없었다.
‘사람이 죽어서도 꿈을 꾼다는 소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이게 꿈이라 해도 위화감이 없다.
콧속에서 맴도는 이재진의 은은한 향수 냄새.
외부의 자극이 온전히 느껴지는 촉감.
생생히 보이는 회장실의 가구들.
무언가 잘 못 되었다.
잘 못 되어도 단단히 잘 못 됐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건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볼을 꼬집어보고.
손을 쥐었다 펴도 보고.
꿈이었다면 인지하지 못 하였을 행동들.
‘모든 정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 가리키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이 꿈도, 사후세계도 아니라면.
회귀라도 했단 말인가?
고개를 내려 팔과 다리를 훑어보았다.
썩어 있어야 할 살가죽이 말끔하다.
‘마력 부작용이 없어···?’
나는 손바닥을 펼쳐 그 위에 마력을 끌어다 모았다.
우웅.
좁쌀만 한 크기의 빛이 일렁이며 몸집을 키우더니 이내 주먹만 한 크기로 커졌다.
“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마력이네.’
게다가.
아아.
입도 크게 벌려지고.
휙휙.
팔다리도 거부감 없이 움직인다.
‘하하.’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단순히 내 신체를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열락을 느낄 줄이야!
마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내게 삶을 구원받았던 사람들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그러던 중,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마력 부작용이 없는 몸이라면 최소 2년 전이라는 말일 텐데···.
‘핸드폰이··· 아, 여기 있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
[2024년 4월 21일.]
불과 조금 전만 해도 2026년이었는데···.
‘왜 갑자기 과거로 돌아온 거지? 나 말고도 회귀한 사람이 있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를 과거로 보내준 존재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그저 많은 생명을 살린 보답이라 생각하는 수밖에.’
나는 죽었고, 과거로 되돌아왔다.
그뿐이다.
고민해봐야 나오는 답은 없다.
기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선우씨,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나? 갑자기 정신을 놓질 않나, 한숨을 쉬더니 이내 웃음을 짓질 않나. 게다가 팔은 왜 그렇게 흔들어대는 건가? 괜찮은 건가?”
이재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네. 아무튼, 오늘도 봐줘서 고맙네. 그리고 매번 말하지만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하게. 대기업 회장으로서 빚지고 살 수 없으니 말이야.”
모란 그룹 회장 이재진.
그는 심각한 부정맥 때문에 담당 의사를 비서처럼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내가 치료해준 이후로는 완치돼서 드디어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나한테 연신 고마워했지.’
서울아산병원, 미국의 유명한 병원들조차도 쉽사리 손 쓰지 못했던 병을 의사도 아닌 자가 단번에 완치시켜버렸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재진 회장과는 오늘로 열 번째 대면이던가?’
이재진뿐만 아니다.
다른 대기업의 회장들도 내 손을 거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근데 회장님. 죄송한 말이지만 오늘이 마지막 방문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일부로 은퇴할 겁니다.”
“크하하하!”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이재진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
“젊은 녀석이 항상 다 죽어가는 얼굴이었는데, 잘 생각했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흔히 가는 영화관이나, 카페에 가본 기억이 없다.
시간이 아까웠다.
영화관이나 카페를 안 가면 그 시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치료해줄 수 있었으니까.
헌데 마력 부작용 때문에 고통받아 보니 삶에 대한 후회가 들더라.
여유로운 삶.
죽기 전에 다짐했었던 말이다.
“은퇴하고 나서는 뭘 한 건가? 내 주치의로 일해 볼 생각 없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나 지으며 삶을 즐길 생각입니다.”
“고향이라···, 말만 들어도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는 마법의 단어지.”
이재진은 자리로 돌아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내게 말했다.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나?”
“말씀하세요.”
“고향이 내려간다 하더라도 검진 정도는 해 줄 수 있겠나? 아, 물론 내 직접 선우씨를 찾아가지.”
부정맥이 완치됐다고 해도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네.
하긴 의사야 오랜 기간 쌓아온 지식과 의학 장비를 토대로 완치판정을 내려서 신빙성이 높지만, 그에 비해 나는 마력을 이용해 치료한다.
당연히 불안한 면이 있겠지.
“네,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요.”
“고맙네. 자네 차는 있나? 없으면 그간의 보답으론 한참 모자라지만, 고향까지 차량과 기사를 붙여주겠네.”
서울에 올라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굳이 차를 사진 않았었다.
교통편이 잘 되어 있을뿐더러 차를 사도 탈 일이 별로 없다고 해서 대중교통만 이용했었다.
“자가가 없긴 한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괜히 기사랑 둘이서 어색하게 가고 싶진 않다.
복잡하고 불편하더라도 버스나 열차 타고 가는 게 낫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난 이재진에게 인사를 건네고 건물 밖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화원 길드장을 만나 은퇴하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때아닌 은퇴 선언에 이재준은 적잖이 당황하는 듯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의외였다.
“잘 생각했다. 네가 무슨 테레사 수녀가 되는 마냥 사람들을 보살펴주는데, 그건 의무가 아니야. 너 스스로 희생을 강요하지 마.”
모란 그룹 회장이나 이재준이나 잘했다는 반응을 보이니 적잖이 당황스럽다.
나는 당연히.
“네가 일을 그만둬서 생길 여파는 생각해봤나?”
“너에게 치료받길 기다렸던 사람들은?”
“너 때문에 불행해질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거지?”
이런 반응을 생각했었다.
헌데 생각해보면 저 말들은 ‘일 그만둘까?’라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을 옭아매던 내 생각들이었다.
저런 말들뿐만 아니라.
‘내가 없었다면 이 사람은 평생 외발로 살았겠지.’
‘내가 없었다면 이 사람은 평생 심장병으로 고생했겠지.’
‘내가 없었다면 이 사람은 평생 원인도 못 찾고 위장병으로 고생했겠지.’
이런 생각들 때문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게 아닌가 싶다.
은퇴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시원섭섭하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하나만 목 놓아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허나 그 감정도 잠시.
“남은 인생 편히 살 생각하니 설렌다.”
시골로 내려가서 뭐부터 하지?
4월이니까 소소하게 봄 작물 좀 심어볼까?
봄 작물이 뭐가 있더라?
“옥수수랑 상추, 대파, 시금치, 완두콩 정도 있나?”
음···, 완두콩은 콩이니까 제외하고.
아, 그리고 심심할 때 타게 자전거도 한 대 사놔야겠다.
“시골 생각하니까 돌아가신 할아버지랑 할머니 생각나네···.”
조부모님은 2021년에 한 달 텀을 두고 두 분 다 돌아가셨다.
“매번 전화할 때마다 찾아뵌다고 말만 하고 선물세트만 보냈었지.”
서울에 상경한 이후로 고향에 내려간 게 고작 세 번이었다.
일 시작한 다음 연도에 한 번.
할머니 돌아가시고 한 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한 번.
그럼에도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 손주 끼니는 잘 챙겨 먹고 있냐고 물으셨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 얼굴 보는 게 최고의 선물이었을 건데···.”
효도하긴 너무 늦었지만 앞으로 제사라도 잘 지낼게요.
뚜르르르.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처를 보는데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이성현]
성현이는 우진이처럼 어릴 적부터 같이 컸던 아랫동네 친구.
친구 사이에 전화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만, 이 타이밍에 전화하는 이유를 대충 알 거 같다.
-야 너 은퇴하냐?
역시나.
“어떻게 알았냐?”
-본 건 아니고 들었지. 너 때문에 전국이 떠들썩해. 인터넷에 다 네 이야기밖에 없어.
길드장한테 은퇴한다고 말 한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전 국민이 알 정도라고?
빠르다, 빨라. 현대사회.
-어쨌든 노예 생활 탈출이네. 근데 은퇴하고 뭐 할 거냐?
“그냥 시골에 내려가서 한량처럼 살려고.”
돈은 억 단위로 벌어놨으니 당장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당장은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봐야지.
-나도 마침 서울에서 일보고 내일 점심쯤에 내려갈 건데 같이 갈래?
“나야 좋지! 근데 촌놈이 서울에는 무슨 일로 왔냐?”
-나 어릴 때부터 허리 안 좋았던 거 알지? 최근에 통증이 심해져서 병원 가보니까, 서울에 있는 병원 소개해 줄 테니 가보라 하더라고. 그래서 왔지.
“허리 아픈 건 나한테 부탁하면 됐잖아?”
-바쁘다고 전화도 잘 안 받으면서 무슨. 그리고 큰 병원에서 검사했는데 의외로 간단한 병일 수도 있잖아?
서울에 올라온 거 자체가 별 게 아닌데 무슨.
생각해보니 회귀 전에 이맘때쯤 성현이한테 전화가 몇 번 왔었는데 바빠서 넘겼던 기억이 있다.
‘깜빡하고 있다가 며칠 뒤에 전화하니까 별일 아니었다고 안부만 묻고 끊었었지.’
그게 허리 때문이었구나.
남한테 민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현이 성격상 내가 전화도 안 받겠다, 그냥 혼자 해결했었겠지.
‘친구니까 도와달라고 달달 볶았어야지. 내가 안 해줄 사람도 아니고.’
돌이켜보면 바쁘다고 전화 넘긴 내가 나쁜 놈일지도.
괜스레 미안해지네.
“병원 가지 마. 내가 치료해줄게.”
-오, 진짜냐? 공짜지?
“아니, 밥 사야지. 그것도 비싼 거로.”
-야 이 치사한 놈아, 친구한테 돈 받아먹냐?
“나한테 치료받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아? 그냥 번호표 값이라 생각해.”
-뭐냐 그 거만한 말투는? 알았다 알았어. 밥쯤이야 뭐, 내일 점심쯤에 너희 집 앞으로 갈게. 주소 보내놔.
“오키.”
뚝.
전화가 끊기고, 나는 고향으로 내려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음···, 챙길 게 많진 않네?”
어차피 집이랑 살림은 길드에서 구해준 거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옷이랑 나머지 잡다한 짐은 이사 업체에 전화해서 내일 아침에 용달로 보내기로 했고.
그래서인지 30분 만에 정리가 끝났다.
집 비울 준비를 모두 끝내고, 큰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기대앉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가 죽었었던 곳.
“고생했다. 과거의 나.”
한 번 죽었던 나를 기리는 묵념을 올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기다려라, 국민 간식아.”
나는 지갑을 챙기며 혀로 입술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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