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불판은 솥뚜껑 아니겠는가
“어디 가려고?”
성현이가 주섬주섬 신발을 신고 있는 내게 물었다.
“현금 찾을 겸, 삼겹살도 더 사려고. 너도 준비해 같이 가자.”
“선우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같이 가자’가 아니라 운전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야?”
녀석은 자신의 배를 통통거리며 말을 이었다.
“배불러서 귀찮아. 차 빌려줄 테니까 너 혼자 갔다 와.”
“나 사실 장롱면허인데 괜찮겠냐? 네 차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알고 있어. 어제 우리집 앞에 주차해 놓은 꼴을 보니까 왠지 그런 거 같더라.”
“······.”
성현이네 집 앞에는 3대 정도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헌데 대각선으로 주차해 혼자서 2대 자리를 차지해 놨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할지도.
“이 자식아···. 너 때문에 앞집 아저씨한테 혼났어! 주차 공간에 전세 냈냐고 하면서!”
“미안.”
그걸 알면서도 차를 빌려주려고 했던 거야?
‘짜식, 나에 대한 믿음이 깊긴 하나 보네.’
성현이는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나를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거 보니까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차를 순순히 빌려주는 이유는 단 하나야.”
“뭔데?”
“S급 초월자였으면 그동안 돈 많이 모았을 거 아냐. 사고 나도 어떻게든 처리해주겠지? 이왕이면 새 차로 사주면 더 좋고.”
그러니까 친구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산을 믿었다는 말이네?
“그래도 사고는 사전에 방지하는 게 최고잖아? 그냥 네가 운전해주면 안 되냐?”
“지금은 배불러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러니까 혼자 갔다 와. 어차피 차 살 거면 지금부터 연습해 놔야 할 거 아냐?”
녀석은 내 눈길을 휙 피하더니 이제는 대자로 눕는다.
게다가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더니, 내 쪽으로 슬며시 밀어 넣는다.
절대 가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치사한 놈.”
그렇게 자동차 키를 가지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아! 그 방법이 있었네.’
녀석을 움직일 좋은 카드가 생각났다.
“성현아,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내가 허리 근육 풀어준 거 기억하지?”
“그건 왜?”
“네가 운전해주는 대신 그거 10회 이용권 줄게.”
“오케이. 당장 출발하자고.”
* * *
마트에 다녀와서 성현이와 오후 내내 텃밭에 모종을 심었다.
우선은 간단하게 상추와 부추만 심어놨다.
부추는 생육 기간이 길어 한 번 심으면 몇 년 동안 수확할 수 있기에 아예 한쪽 텃밭을 부추용 자리를 만들었다.
“해가 슬슬 존재감을 드러내는 걸 보니 여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네.”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는 이른 저녁.
태양이 지평선 너머를 지나며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지는 중에도 어찌나 밝은지 역광이 진다.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
나는 흙 위에 작물 구분용 푯말을 꽂으며 말했다.
“성현아, 너네 하우스에서 삼겹살에 먹을 상추 좀 뜯어 오면 안 되냐?”
“뭘 또 귀찮게 뜯어 오라고 하냐? 그냥 사 온 거나 먹으면 되지.”
“너희 집 상추 기가 막히잖아. 난 고기 먹을 때마다 너희집 상추가 생각나던데?”
노지에서 키우는 상추라면 아직 재배 시기가 아니지만, 하우스는 이른 봄에 파종하기에 지금이 재배 적기였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갔다 올게.”
성현이 얼굴에 뿌듯함이 엿보인다.
“아, 그리고 통김치랑 부추 무침도 있으면 가져오고.”
“이야, 먹을 줄 아는 놈인데? 알겠어 가져올게.”
작전 성공.
애초에 내 목적은 통김치와 부추 무침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단순한 녀석이다.
‘칭찬이라면 좋아 죽는다니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성현이 집의 상추는 맛있다고 소문나서, 읍에 있는 로컬푸드와 납품 계약까지 했을 정도니까.
성현이가 대문 밖을 떠나고.
나는 핸드폰으로 버스 앱을 열어서 버스가 언제쯤 마을을 지나가는지 확인했다.
[10분 뒤 도착.]
“슬슬 나가 있어야겠네.”
나는 사용했던 농기구들을 정리한 뒤.
옷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집 밖으로 나섰다.
*
정류장에 도착해 핸드폰을 보고 있으니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멈춰 선다.
버스 뒷문이 열리자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를 들고 내리셨다.
“할머니~!”
“잉? 선우 아니냐? 서울 가서 일한다고 들었는디 어째 여깄는겨?”
하얀 백발에 뽀글뽀글 할머니 파마를 하신 할머니.
옆집 이춘애 할머니셨다.
“어제 은퇴하고 곧바로 집으로 내려왔어요.”
“그려? 그런데 왜 여깄는겨? 정류장에서 나 기다렸던 거여?”
“맞아요. 아까 집으로 인사드리러 갔었는데 꼬마애만 있더라고요. 물어보니까 할머니 일 하러 가셨다길래 기다리고 있었죠.”
학창시절, 하굣길에 버스를 타면 시내에서 작물을 팔고 오시는 춘애 할머니를 자주 뵀었다.
그 기억 덕분에 할머니가 언제 돌아오실지 알고 있었던 것.
“보따리 주세요. 제가 들어 드릴게요.”
“아니여. 내가 들게 별로 무겁지도 않구먼.”
펑퍼짐한 보따리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작물을 다 파셨다면 저 보따리가 주머니 속에 있었을 텐데.
“에이, 젊은 놈이 들어야죠. 괜히 할머니가 들고 가시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욕해요. 주세요, 제가 들게요.”
“그려. 그럼 부탁 좀 할게.”
보따리는 작물을 팔지 못하고 온 할머니의 마음을 대변하듯 묵직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보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할머니, 보따리가 무겁네요? 오늘은 많이 못 파셨나 봐요.”
“오늘만이 아니여. 요즘에는 식자재 마트가 겁난디 누가 길거리 노점 채소를 사겄어.”
할머니가 한숨을 푹 쉬더니 착잡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걱정이여. 집에도 아욱이랑 부추, 감자까지 팔게 많은디, 이래서 언제 다 팔꼬. 우리 손주 수학여행도 보내줘야 하는디···.”
“할머니, 그럼 그 농작물들 제가 다 살게요.”
걸음걸이를 멈춰선 춘애 할머니.
굽은 허리를 억지로 피더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네가 다 산다고?”
“네. 집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할머니 밭에서 나오는 거 다 제가 살게요.”
“선우야···, 할미한테 장난치지 마라. 젊은 놈이 뭔 돈이 있다고 그 많은 걸 다 사겠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서울에서 돈 많이 벌었어요.”
나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열 장을 꺼내 춘애 할머니 손에 쥐여 드리며 말했다.
“일단 이 보따리에 있는 거부터 살게요.”
“이게 뭔 돈이고. 아이고 됐다.”
“할머니, 저 초등학생 때 귀엽다고 천 원씩 쥐여주셨던 거 기억나세요? 그때 받았던 돈까지 얹어서 샀다고 생각해주세요.”
할머니는 손에 쥔 돈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주름진 입술을 열었다.
“내가 준 돈이 다 해도 5만 원도 안 될 낀데.”
“10년도 더 넘었는데 물가가 그만큼 올랐으니까요. 대신! 제가 할머니 농작물 다 사드리는 대신에 부탁이 있어요.”
“뭐고?”
“저희 집에 반찬이 없거든요···. 작물 수확하면 그것들로 저 반찬 만들어 주세요! 할머니 음식 잘하시잖아요.”
춘애 할머니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겄다.”
많은 의미가 담긴 답이었다.
홀몸이셨으면 모를까, 손주 생각해서 하신 답이셨을 터.
할머니를 도울 방법을 다방면으로 고민해봤지만, 딱히 방법도 없을뿐더러 잠시 어색해지더라도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누가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할 테지만, 춘애 할머니는 조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상 치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켜주신 고마운 분이다.
아버지가 귀국하는 동안 상주 역할까지 해주셨는데 그때의 은혜에 비하면 이 정도 대가로는 어림도 없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하신 춘애 할머니의 걸음걸이 맞춰 걸었다.
예전에는 허리가 꼿꼿하셨는데 몇 년 사이에 허리가 굽으셨네.
“할머니, 꼬마애 이름이 서시원이던가? 오늘 시원이랑 같이 저녁 식사하러 오세요! 제가 맛있는 고기 구워드릴게요.”
“그래도 돼?”
“당연하죠! 제가 어릴 때 할머니께 얻어먹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집에서 쉬시고 계세요. 준비 다 되면 모시러 갈게요.”
*
나는 집으로 돌아와 성현이와 함께 곡간에 있는 네모난 벽돌들을 마당으로 가지고 나와 삼면으로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벽돌을 무릎 높이 조금 안되게 쌓은 후.
바닥부터 마른 나무를 차곡히 쌓았다.
그리고는 주방에 있는 식탁과 의자를 꺼내와, 벽돌과 적정한 거리에 배치했다.
식탁 위에는 쌈장과 채소, 고기와 식기를 정갈하게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아까 씻어놨던 솥뚜껑의 움푹한 부분이 아래로 가게끔 벽돌 위에 올린 뒤, 그 위에 식용유를 적신 키친타올로 고르게 기름을 입혔다.
“준비 끝! 이제 시작해볼까?”
성현이가 가져온 토치를 이용해 장작에 불을 지폈다.
화르륵!
금세 피어오른 불꽃이 주위를 환하게 비춘다.
장작이 적당히 태워질 동안, 옆집에 가서 춘애 할머니와 시원이를 데리고 왔다.
시원이는 식탁에 올려진 고기와 커다란 솥뚜껑을 보더니 잔뜩 신난 목소리 말했다.
“우와! 아저씨, 여기에 고기 구워 먹는 거예요?”
“아저씨 아니야. 형이라고 해.”
그 말에 피식한 성현이가 식탁에 있는 집게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네가 구울 거지?”
고등학생 시절, 방학 때마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친구들끼리 고깃집을 가면 집게는 항상 내 담당이었다.
치이이이익.
집게를 이용해 통삼겹 세 덩이를 솥뚜껑 위에 연달아 올리자 맛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겹살 위에 소금을 뿌리고 적당한 타이밍에 고기를 뒤집어 반대쪽에도 소금을 뿌렸다.
양쪽 면이 적당히 익은 걸 확인한 뒤, 입에 넣기 좋은 정도로 잘라 솥뚜껑 바깥 부분에 정갈하게 올렸다.
슬슬 고기가 익어가면서 중앙에 기름이 모였다.
대망의 메인디쉬를 요리할 차례.
나는 성현이가 가져온 잘 익은 통김치를 통째로 넣었다.
치이이이익!!
김치가 기름에 닿자, 튀겨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일어났다.
‘여기서 끝나면 섭섭하지.’
부추 무침과 마늘, 손질한 양파와 파를 돼지기름 위에 올렸다.
삼겹살은 식당이나 집에서 불판을 이용해 쉽게 먹을 수 있지만, 돼지기름에 익힌 김치와 채소는 솥뚜껑만이 가진 장점이었다.
“아저씨 맛있는 냄새 나요!”
옆에서 구경하던 시원이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라니까···. 됐다, 맘대로 불러라.”
나는 잘 익은 고기 하나를 집게로 집어서 호호 분 뒤, 시원이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하나 먹어봐.”
녀석은 우물우물 고기를 열심히 씹더니 목으로 채 넘기기도 전에 말했다.
“맛있어요!”
당연하지 누가 구웠는데.
다 익은 고기와 음식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리고.
나머지는 은은하게 익히기 위해 장작을 빼서 불을 조절했다.
“할머니, 먼저 드세요.”
“그려. 잘 먹을 게.”
나는 할머니가 식사를 시작한 걸 확인한 뒤, 상추를 손 위에 올렸다.
상추 위에 깻잎을 올리고 그 위에 고기 한 점과 구운 김치, 마늘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젓가락을 이용해 쌈장을 쌈 위에 마무리하고 그대로 입안으로 직행했다.
고기의 육즙과 깻잎의 향이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거기에 느끼함을 잡아주는 김치까지 더해지며 사람을 미치게 했다.
옆을 보니 성현이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미쳤다, 미쳤어. 너무 맛있는데? 고기가 입안에서 녹았어! 역시 경력직답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시간이다.
그저 사람이 모여서 먹거리를 먹고, 만담을 나눌 뿐인데 이렇게 행복하다니.
진작 은퇴해서 힐링 라이프를 즐길 걸 그랬네.
“어우···. 배가 슬슬 불러오네.”
의자에 기대 자신의 배를 통통치는 성
성현이가 의자에 기대 자신의 배를 통통 쳤다.
“드디어 그걸 꺼낼 때가 온 건가?”
나는 삼겹살이 질릴 때를 대비한 비장의 무기를 주방에서 가져왔다.
“오오! 그것은 설마 솥뚜껑 라면!?”
라면 포장지를 본 성현이와 시원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화력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아까 뺐던 장작을 다시 넣고.
솥뚜껑에 물을 부었다.
먼저 스프를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가.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고.
이내 팔팔 끓기 시작하면 면과 미리 잘라놨던 파를 넣는다!
츄릅.
얼큰한 냄새가 콧속을 자극하니 침샘이 반응한다.
라면은 삼겹살과 더불어 익는 동안 가장 기다리기 힘든 음식 아닐까.
어느새 다 익은 라면.
먼저 할머니를 챙겨 드린 뒤.
내 그릇에 국물 한 국자를 옮겨 담고, 그대로 국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캬! 이거지.’
식도를 타고 흘러간 라면 국물이 삼겹살의 기름기를 싹 내려준다.
성현이도 만족했는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저씨! 라면 엄청 맛있어요!”
시원이는 국물보다 면이 좋은지 그릇에 면을 가득 담아 호로록! 하며 흡입했다.
그렇게 우리는 라면까지 먹고 나서야 식사 자리의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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