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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도록
작품등록일 :
2024.10.01 14:04
최근연재일 :
2024.10.16 23:55
연재수 :
16 회
조회수 :
14,145
추천수 :
472
글자수 :
78,514

작성
24.10.07 02:16
조회
816
추천
35
글자
12쪽

죄 없는 비료의 비참한 최후

DUMMY

‘저게 무슨···?’


뭐랄까.

흙이 점점 고와진다고 해야 하나?


가까이 가서 보니 루반콩의 농기구가 흙을 지날 때마다 변화가 일어난다.

농기구가 스치는 곳은 마치 기름칠이라도 한 듯 윤기가 좌르르 흐른다.

물을 뿌린 것도 아닌데 반질거리고 매끈매끈해서 햇살이 반사될 정도다!


“흙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단순한 일이다콩! 농기구를 이용해 토지에 마력을 스며들게 했을 뿐이다콩!”

“그렇게 하면 뭐가 좋은데?”

“마력이 토지의 영양분이 되어 활력을 불어 넣어주게 된다콩! 게다가 마력을 머금고 자란 작물을 먹으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콩! 만병통치약이나 다름 없다콩!”


마력을 이용하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우우웅.


손바닥 위로 동그랗게 모이기 시작하는 마력.

주먹만 한 크기가 됐을 때.

마력 구체를 그대로 흙에 가져다 댔다.


펑!


“엥?”


마력이 스며들긴커녕 지뢰가 폭발하듯 터지면서 흙이 사방팔방 튀어버렸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지금 신성한 흙에 뭐 하는 짓이냐콩!”


루반콩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소리쳤다.


“흙에 대한 예의도 없냐콩!”

“너···, 너! 콩의 신에게 벌 받을 거라콩!”


루반콩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까지 한 마디씩 거들었다.


흙 좀 튀었다고 저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흑흑. 흙아,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콩···. 미안하다콩.”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녀석까지 있었다.


“내가 미안. 잘못했어.”


녀석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니 억지로라도 사과해야지 원.


“다시는 이런 행동하지 마라콩! 콩의 신에게 노여움을 사면 어쩌려고 그러냐콩!”


양팔을 허리에 올린 채 언성을 높이는 루반콩.

내 행동이 단단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알았다니까. 미안해.”

“이번만 봐주는 것이다콩! 다음부터는 조심하라콩!”

”네가 안 봐주면 어쩔 건데?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루반콩은 따지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내가 만든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흠···.’


생각해보니 내가 왜 저 녀석 말을 들어야 하지?

나는 루반콩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린 사이, 다시 한번 마력을 손바닥에 끌어모았다.


‘네가 하지 말라면 내가 안 할 줄 알아?’


애초에 여긴 내 밭이라고!


퍼버벙!


마력 구체가 흙밭에 닿자마자 터져버린다.

그 여파로 또다시 사방으로 흙이 튀었다.

물과 기름처럼 내 마력과 흙은 절대 섞일 수 없는 사이인 건가?


“내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코오옹!!”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진 루반콩.


그리고.


“이 나쁜 거인 죽으라콩!”

“흙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러냐콩! 죽어라콩!!”


다른 녀석들까지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투닥투닥.


농기구를 일제히 내려놓고 내 다리를 주먹으로 마구 때리는데 솔직히 하나도 안 아프다.

오히려 안마를 받는 것 같은 느낌.

이 정도면 분 풀릴 때까지 맞아 줄만도?


“비켜라콩! 제1기사단장 낭낭콩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겠다콩!”


자칭 제1기사단장 낭낭콩까지 합세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알겠으니까 그만 때려. 이젠 진짜 안 할게.”


첫 번째 시도 때는 뭔가 실수했나 싶었다.

허나, 이번 도전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이건 내가 연습한다고 되는 영역이 아니야.’


어떻게 해야 마력이 흙에 스며들게 할 수 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신체도 재생시키는 오선우가 이런 곳에서 좌절을 맛보다니···.’


잠깐, 마력이 영양분이 된다는 말은 비료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럼 너희들은 비료 안 써?”


그 말에 녀석들이 전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 말을 이해 못 하고 얼굴을 갸우뚱하는 것 같다.

나는 창고에서 며칠 전에 쓰고 남은 비료 한 알을 가져와 녀석들에게 보여줬다.


“이거 몰라? 배설물로 만든 영양분. 밭 갈 때 많이 보이지 않았어?”

“설마 흙에 섞여 있던 하얀 알갱이들을 말하는 것이냐콩?”

“맞아. 그거 전부 다 비료야.”


루반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배설물을 왜 영양분으로 쓰냐콩···?”


그때, 어디선가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웩. 우에에엑! 왠지 흙에서 꾸린내가 난다 했다콩!”


조금 전, 나와의 전투에서 기절한 척한다고 한참 동안 얼굴을 흙에 파묻었던 낭낭콩이었다.


“천하에 나쁜 놈이다콩! 도대체 왜 신성한 흙에 더러운 배설물을 뿌려 놓는 거냐코오옹!!”

“비료한테 더러운 배설물이라니. 영양분을 주는 소중한 존재인데.”


저 녀석들은 마력을 일평생 영양분으로 줘왔으니 백 번 천 번 말해도 이해 못 하겠지.


근데···, 쟤들 뭐하냐?


“콩의 신께서 노하신다콩! 당장 배설물을 치우라콩!”


루반콩의 진두지휘하에 밭에 섞인 비료를 일사천리로 빼내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흙이 다쳤다고 울었던 녀석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고.


“흑흑. 흙아 미안하다콩. 더러운 똥들 다 치워주겠다콩.”


또 다른 녀석은 내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나쁜 거인! 흙에 대한 예의도 없냐콩! 길가다 똥이나 밟아 버리라콩!”


이 녀석들, 전세계 농업인들이 비료를 쓴다는 걸 알면 기절하겠네.

아, 물론 화학비료를 쓰는 곳도 있긴 하지만.


기어이 비료 전부를 한 곳에 골라낸 녀석들.

그리고는 비료를 중심으로 빙빙 둘러싼다.


“비료의 처형식이다콩!”


루반콩이 자신의 농기구를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고.

수신호를 기점으로 일제히 비료를 농기구로 내려 찍었다.


“죽어라콩!”

“이 나쁜 배설물! 흙에 얼씬도 하지 마라콩!”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산산조각이 나버린 비료.

짧았던 처형식이 끝나고.


씨익! 씨익!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내게 보내는 살기 어린 수십 개의 눈초리.

한마디의 언질도 없었지만, 그들이 전하는 의미는 명확했다.

“한 번만 더 비료를 뿌린다면 너도 이렇게 될 줄 알아!”라는 의미일 터.


“그래, 너희 맘대로 해! 대신 작물 농사 망하면 그때는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나 또한 녀석들에게 으름장을 놓은 뒤.

마당으로 돌아와 평상 위에 걸터앉았다.


“음···, 아버지는 아직도 전화 안 받으시려나?”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전화를 받지 않아······.]


“역시 안 받으시네.”


은퇴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전화를 걸고 있는데 받으시질 않는다.


“며칠 동안 연락 안 되는 걸 보니 게이트 들어가신 건가?”


일반적인 게이트는 하루 안에 공략이 끝난다지만, 아버지는 워낙 특별한 분이시니 며칠 걸리는 건 당연지사.

별수 있나, 그냥 콜백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이제 뭐 하지?’


원래 오늘 할 일이었던 텃밭 가꾸기는 콩콩 행성 녀석들에게 시켜놨고.

청소와 정리도 다 끝내서 할 게 없다.


“낮잠이나 잘까.”


나는 신발을 벗은 뒤.

평상으로 올라가 그대로 누웠다.


‘좋네.’


완연한 봄 하늘 아래, 따스한 햇볕이 포근한 이불처럼 다가오고.

향긋한 봄바람이 뺨을 어루만져 수면제처럼 느껴진다.


‘잠이 솔솔 오네···.’


의식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리려는 순간.

선생님 앞에서 까먹고 있던 숙제가 떠오른 것처럼 불길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아이고···,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촌민이라면 잘 보여야 할 사람이 한 명 있다.

동네 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참된 인물!

행정 구역의 단위인 ‘리(里)'를 대표하여 일을 맡아 하는 사람!

한 마을의 왕, 바로 이장!


“이장님께 인사를 안 드렸네.”


시골에 살면 이장님께 도움받을 일이 많으니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

게다가 우리 마을 이장은 텃세도 심하고 꼰대력도 장난 아니라 더더욱 잘 보여야 한다.


“잠도 깨버렸고, 생각난 김에 인사나 드리고 와야겠다.”


이장님과 초면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 생활하다 귀촌했으니 얼굴은 비춰야지.


끼이익.


대문을 열자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윽···, 듣기 싫어. 윤활제 사 온다는 걸 깜빡했었네. 손바닥에 써 놓던가 해야지.”


집 밖으로 나와 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시끄러웠던 거리가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다.


“다들 마을회관 가셨나?”


현재시간 12시 40분.


이곳 행성리 주민들은 예로부터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드시는 풍습이 있다.

시골 노인의 하루는 농사 아니면 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런 분들에게 마을회관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의 꽃을 피우기도 하고 화투나 바둑도 둘 수 있는 최고의 놀이터!


할아버지는 생전 마을회관을 “일상의 적적함과 공허함을 달래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공간이다.”라고 까지 표현하셨다.


더군다나 할아버지는 바둑기사셨는데, 승부의 세계를 떠나 친한 사람들끼리 유희 거리로 바둑을 두시니 얼마나 재밌으셨겠는가.


“나중에 마을회관도 다과랑 과일 사서 들려야겠네.”


탁. 탁. 탁.


마을 중앙에 있는 울창한 대나무숲.

그 옆을 걷고 있으니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기에 길게 뻗은 대나무 사이사이로 스며든 햇빛까지.

장대한 광경이 따로 없다.


이곳은 봄비가 오고 나면 죽순 파티가 열린다.


‘말 그대로 우후죽순이지.’


대나무숲은 군청 소유의 땅.

본래라면 출입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이지만, 이장님의 부탁으로 마을 주민 한정 죽순을 뜯어갈 수 있게끔 해줬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환장한다는 공짜!

봄이 오고 비가 오면 마을 어르신들이 밭일도 미뤄두고 이곳에 와서 공짜 죽순을 뜯으신다.


‘죽순 삶아서 나물이나 무침 해 먹으면 맛있는데.’


나도 몇 개 뜯어가서 춘애 할머니한테 반찬 좀 부탁해볼까?


“······.”


고개를 삐쭉 내밀어 대나무숲을 훑어봤지만, 절망만을 맛봤다.

이미 처참하게 뜯겨나간 죽순의 단면만이 남아있을 뿐.

단 하나의 죽순도 없다.


지금은 잡초가 무성할 정도로 관리가 안 된 대나무숲이지만, 20년 전에는 꽤 유명한 관광지였다.


“나 초딩 때 방송국에서 여기 촬영 온 적 있었는데 드라마 제목이 뭐였더라?”


배우들이 협객 의상 입고 말을 탔었으니 장르는 무협이었던 거 같은데···.

그 당시 배우가 나보고 부모님과 같이 드라마 꼭 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에라 모르겠다. 중요한 것도 아닌데.”


드라마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촬영 현장에서 멀뚱멀뚱 구경하다 관계자한테 초콜릿 받아먹은 기억은 새록새록 떠오른다.


“자동차 모양 초콜릿이었지.”


역시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건가.


추억에 잠겨 걷다 보니.

저 멀리 연한 황색 털을 두른 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헌데···, 얼핏 보기에도 상태가 이상하다.


‘왜 앞발 하나를 들고 있는 거지? 어디 다쳤나?’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의 꼬리가 살랑살랑 춤을 춘다.

가까이 다가가도 피할 생각이 없는 녀석.

오히려 꼬리가 프로펠러가 됐다.


접힌 귀에 어떤 종인지 전혀 예측 가지 않는 얼굴!

시골 최고의 귀염둥이 시고르자브종이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디 다쳤니?”

“끼잉. 끼잉”


녀석이 들고 있는 오른쪽 앞발을 자세히 살펴보니 생각보다 심각한 상처가 나 있었다.

황색 털을 타고 흐르는 피.

그 피가 흘러내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면 보이는 다리 상단의 깊은 교상.


시골 개들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만난 개와 영역 다툼을 하다 서로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가끔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들이 말 못 하는 동물에게 해를 끼치곤 하는데,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걸 보니 다행히도 그건 아닌 것 같네.’


녀석은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서럽게 짖었다.


“깨앵. 깨앵. 깨앵.”


짠한 녀석.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아픈 와중에도 꼬리를 살살 흔든다.


“기다려봐. 내가 치료해줄게.”


나는 손바닥에 마력을 응집해 녀석의 상처에 가져다 댔다.


“······?”


잠깐.

뭔가 이상하다.


“너···, 왜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지?”


이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은 내가 알던 강아지의 특성과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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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없는 비료의 비참한 최후 24.10.07 817 3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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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골 사람은 부지런해야지 +2 24.10.03 1,296 40 11쪽
3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 +2 24.10.02 1,484 30 13쪽
2 두번째 삶 +1 24.10.01 1,640 34 11쪽
1 후회가 남는 삶 +4 24.10.01 1,836 3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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