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 2회차가 시작부터 망했다 (1)

내 인생은 망했다.
1회차는 ‘진짜 망한 게 뭔지 보여줄까’하고 달려들 사람들이 없진 않을 정도로 평균적인 인생이었다.
2회차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때보다 더 깔끔하게 완벽하게 망했다.
‘인생이 망했다’고 하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말들도 많이 하던데 진지하게 묻자.
댁들 같으면 낯선 세계에, 다른 것도 아닌 ‘좀비’로 환생했을 때, 도대체 무슨 미래를 위해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지 짐작이 되는가.
그걸 알면 댁들이 나랑 자리 바꿀래? 난 찬성.
여기 내 마스크를 기꺼이 선사하리다.
나도 처음엔 노력을 해 봤다. 내가 좀비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일단은 노력의 결과다. 물론 좀비라는 건 지구의 부두교에서 말하는 움직이는 시체이므로 부두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는 좀비가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대충 좀비라 치자. 이미 대중화된 캐릭터라 출생 성분이 희미해졌다고 봐 줄 수도 있잖아.
말이 길다고?
전직, 아니, 전생 인문계 대학원생에게 뭘 바라시는지. 물에 가라앉히면 입만 뜰 종족인데.
아무튼, 2회차에서 노력한 결과는 참담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내 소박한 원룸의 LED 등은 어디로 가고 웬 통나무 서까래에 진흙을 발라 놓은 천장이 보였다.
아, 꿈이 덜 깼네, 하고 다시 잤다가 일어났다. 천장은 그대로였다. 혹시 꿈속의 꿈인가, 하고 한 번 더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그 천장이 보였다.
그때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 사태지, 하고 일어나는데 움직이는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옷도 내 잠옷이 아니라 무슨 낡은 에이프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느라 몸 하나하나를 움직이는데 이상할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생기 없는 몸은 12시간 책상에 앉아 있다 일어날 때보다 더 삐걱댔다.
어째선지 매우··· 굉장히··· 움직이는 게 어색해 보이는 두 손과 몸을 확인하고 ‘진짜 무슨 사태지’ 하고 벙쪄 있기를 약 몇 시간.
몰래카메라인가? 가상현실? 요즘은 가상현실에서 깨어나는 사람의 반응을 몰카로 찍는 프로그램 같은 게 있나?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어? 아니아니, 그럼 우리 집에 침입해서 단말기 같은 걸로 연결을 해야 하잖아, 말이 되나?
생각은 밑도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널려 있는 아이돌과 BJ를 놔두고 나 따위 재미없는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몰카를 찍을 리 없다’는 현실을 깨닫기까지 약 30분.
말도 안 되지만 서브컬처에 질리게 나오던 환생 비슷한 무언가인가 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다시 약 1시간.
자꾸만 도망치는 정신줄을 붙잡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부분 본인의 정신줄과 친근한 사이를 유지하기 어려울 거라고 믿는다.
사실 이 몸이 진짜 내 몸이고 지구에서의 삶이 전부 꿈이었던 건가, 하는 유서 깊은 가설도 검토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가슴 뛰는 상황이라기엔 이 몸이 나한테 너무 낯설었다. 몸에서 깨어나는 순간 되살아나는 생전의 기억도 없다.
상태창이니 안내문이니, 하다못해 내 눈에만 보이는 새로운 세계를 안내하는 요정 같은 것도 없다.
그냥 낯선 세계의 낯선··· 차마 인정하기 싫은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몸이었다.
다시 잤다.
솔직히 현실 도피성 수면이었다.
다음날 날이 밝은 뒤, 나는 어기적어기적 집 안을 탐험하면서 정보를 좀 더 모아 보았다.
통나무와 흙으로 지은 집이다. 내가 깨어난 방은 침실. 구석에 옷이 몇 벌. 바깥에는 주방 겸 거실. 그걸로 끝이었다. 화장실은 집 밖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고, 주방 구석에는 사람 몸통만 한 물동이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혼자 사는 사람.
먼지나 설거지 안 된 그릇을 볼 때 이 집의 주인은 1달 정도는 살림을 방치한 것 같다.
거울을 발견해서 확인해 보았더니 얼굴에는 눈 2개, 코 1개, 입 1개, 귀 2개가 달려 있었다. 눈이 4개거나 입이 2개면 적응할 시간이 좀 필요했을 텐데 다행히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형태다.
손에 감각이 없어서 얼굴을 만져 봐도 뭐가 어디에 붙었는지 알 수가 없길래 조금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준수하다.
외모상 대충··· 20대? 이목구비의 배치에 약간 성의가 없고 긴 갈색 머리는 대충 땋아서 대충 묶은.
시체였다.
몸을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거울로 얼굴을 살펴보고 확신했다.
이 몸은 죽었다.
내가 움직이면 움직이고, 특히 눈은 꽤 잘 움직였지만 그뿐이었다. 죽은 사람 특유의 검게 죽은 안색. 탄력 없는 피부. 저항 없이 뽑혀 나오는 머리카락. 손톱을 세워 팔을 긁어 보았더니 팔의 피부가 벗겨지는 게 눈으로 보이는데 통증도 없고 피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시체였다. 어째선지 한 달 동안 썩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집을 다 구경한 뒤 외부로 나갈 생각이 들진 않았다.
가뜩이나 1회차 인생에서 허름해진 영혼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휴식이 필요했다. 트럭에 치이지도 않았는데 다른 세계에 환생인지 빙의인지를 했고, 하필 좀비로 살아났다. 좀비는 생물이 아닌데 좀비가 된 걸 ‘살아났다’고 표현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넘어가자.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지구에서 한 고생만으로 부족했단 말인가. 겨우 한 생이 끝났는데 다음 생을 또 받다니. 이 무슨 쓸데없는 1+1이란 말인가.
하다못해 남들처럼 세계관과 미래를 빠삭하게 아는 캐릭터가 된 것도 아니다. 숨만 쉬어도 잘했다고 박수를 받는 부둥부둥 캐릭터가 된 것도 아니고 뒤로 넘어져도 다이아몬드 원석이 채이는 운 좋은 캐릭터가 된 것도 아니고 눈만 깜박이면 세계를 멸망시킬 굉장한 마법을 깨닫는 천재가 된 것도 아니고.
그냥 좀비였다.
숲 속 외딴집에 혼자 사는 가난한 좀비. 여기가 어디고 난 누군지도 모르는 좀비. 내가 좀비인 것도 몰랐던 좀비.
도대체 이런 생물(이라 치자)로 다시 태어난(거라고 치자) 이유가 뭐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날 괴롭히냐고. 좀 쉬게 해 달라고.
그런데 좀비는 눈물이 안 났다. 체액도 말라붙는 모양이다. 울지도 못하는게 더 서러워서 도로 딱딱한 나무 침대로 돌아가서 잤다.
며칠 동안 깼다가, 잤다가, 다시 깨기만 반복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사이 조금 정신을 추스르고 그간 내가 읽은 소설이나 플레이 한 게임을 닥치는 대로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비가 나오는데 평화로운 세계는 기억나지 않았다. 길 가다 광고로 스쳐 지나간 인연으로 나도 모르는 세계에 떨어졌다면···.
···몰라. 그딴 거. 그럼 어차피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인 거잖아.
말은 으어어 정도 밖에 안 나왔는데 그나마 성대를 오래 안 썼는지 소리가 거칠었다. 이쪽 역시 한 달 정도 말을 하지 않은 목 상태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생후 1개월 좀비인 것 같았다. 응애. 응어어억.
그 뒤 한 달 정도는 집 안에서만 굴러다녔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조금 쉬고 적응하고 나자 ‘이렇게 방치할 거면 왜 나를 이 세계에 끌고 왔느냐’고 누군지 모를 존재에게 슬슬 짜증이 날 정도로 마음이 회복됐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움직이면 세상도 긍정적으로 답해준다는 헛소리를 다시 믿어 볼 정도로.
그래서 드디어 집 밖으로 활동권을 넓혀 보기로 했다. 빙의 1개월 차, 몸 주인의 사망 약 2개월 차.
어기적어기적. 어슬렁어슬렁.
감각 없는 몸을 움직여서 하는 이족 보행은 생각보다 까다로웠지만 ‘노력’해 보았다.
길을 따라 움직여 보니 바로 옆에 20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다들 2달 정도는 집을 비운 것 같고, 몇몇 집은 급하게 달아난 흔적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핏자국은 있지만 죽은 사람은, 정확히는 시체는 없었다.
마을 옆 숲에서는 좀비 동족들을 발견했다. 가끔 밖이 시끄럽다 싶은 걸 무시했는데 이쪽이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썩은내를 풍기면서 핏발 선 눈으로 ‘으어어어’ ‘끄어어어’를 반복하는 친구들 중 좀 옷차림이 깨끗한 쪽이 이곳 마을 사람 같았다. 지저분한 건··· 모르겠다. 험한 인생 헤쳐온 비주얼인데 내가 뭐 이 세계 지리를 알아야지.
좀비들은 길잡이도 없는데 쉴 새 없이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를 하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루트로 마을 근처를 빙글빙글 빙글빙글. 딱히 의사소통은 안 되고, 그 와중에 어째선지 날 아니꼬운 것처럼 쳐다보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도 상했다. 공격은 안 하길래 도로 집에 들어가서 잤다.
며칠 관찰하다 보니 다른 좀비들은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았다. 가끔 뭔가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냥 하루종일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산딸기 비슷한 걸 따먹어 봤다. 아무 맛도 안 났다. 그리고 딸기향 입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소화가 안 되어서 위장에서 발효되는 모양인데 혹시 뱃속에 알콜과 설탕을 추가하면 뱃속에서 딸기주도 담글 수 있나,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실험은 하지 않았다. 담그면 그걸 누가 어떻게 꺼내 먹어.
그러니까 그즈음까지는 그렇게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해 볼 정도로 ‘희망’이라는 게 조금은 있었다는 거다. 진짜로. 아무튼 지난 생은 끝난 것 같고, 새로운 인생(이라 치자)을 살아갈 기회가 생긴 모양이니까.
먹고 살 걱정 없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생활에 아주아주 살짝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인간이면 생계 걱정이 생겼을 텐데 좀비라 그런 걱정은 없으니 하나 주고 하나 받은 셈 치자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밥도 필요 없고, 춥거나 덥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몸이다.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썩는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나는 희망적인 미래를 위해 ‘노력’을 더 해 보기로 했다.
여기는 좀비가 점령한 아포칼립스 세계일까, 좀비가 사냥당하는 인간들의 세계일까. 이걸 확인하고 싶었다.
전자라면 인생 계획을 다시 세워 보고, 후자라면 조만간 사냥당할 테니 좀비 속에 섞여 으어어어 꾸에에에 돌림노래나 부르면서 사냥꾼을 기다리면 된다.
이곳 마을이 습격당하고 약 2달 남짓. 이제껏 아무도 좀비를 사냥하러 오지 않았으니 아포칼립스일지도 모른다. 작은 마을이라 구원대가 좀 늦는 경우라면, 사냥꾼들이 올 수도 있고.
어떻게 할까? 일단 아포칼립스라 치고 세계 구경이라도 가 볼까? 좀비 사냥꾼은 중간에 만나든 여기서 만나든 똑같겠지?
손가락 움직이는 연습을 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이 시체는 관절이 움직이는 묵직한 나무 인형 같다. 어깨는 1kg, 팔꿈치는 2kg, 손목은 3kg, 같은 느낌으로 끝으로 갈수록 무거워지고 제어가 잘 안된다. 팔까지는 어찌어찌 원하는 대로 움직여도 너클 아랫부분의 손가락은 움직이기 어려웠다.
지팡이를 잡는 걸 목표로 삼고 꾸준히 연습을 하던 나날이었다.
집에 불청객이 들어왔다.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초장부터 좀비가 나오고 종종 우울하지만, 장르와 태그 선정에 거짓은 없습니다.
공모전 기간 동안 잘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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