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성전의 새로운 주인 (3)

성소의 문이 열렸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성소를 올려다보았다.
사제들의 인도를 받아 계단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추기경의 예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예상대로 20대 초반. 체격은 아담하고, 이국적인 검은 머리카락이 잘 어울렸다.
법황은 신기한 마음으로 신의 사도를 살펴보았다. 좀비가 된 에다는 좋게 말하면 순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해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아가씨였다. 그래선지 막연하게 신의 사도 역시 그런 느낌으로 상상했는데,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온순한 느낌인 건 마찬가지지만 인상이 완전히 달랐다. 섬세하고 얇은 눈썹과 그윽한 눈매, 균형 잡힌 이목구비와 얇은 입술까지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단아한 미인이었다. 영혼의 나이가 있어서인지 20대 초반보다는 좀 더 어른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존재감이 약한··· 덧없는 인상이 있었다. 좀비일 때의 엉뚱한 행동에서 보이던 생기가 살짝 사라진 것 같은.
신의 사도는 로브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짧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좀비와 전혀 다른 얼굴에 전혀 다른 몸놀림이지만, 소심한 동작에서는 묘한 익숙함이 느껴져서 조금 반가웠다.
사도가 계단을 다 내려오자 법황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제대로 맞이하게 되었군요. 저희 세계에 강림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의 사도시여.”
신의 사도는 조금 더 낯익은, 의문에 찬 눈빛이 되었다. ‘이 손을 나한테 어쩌란 거지?’라는 뜻을 담은 눈이 한순간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빛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리고 사도는 머뭇거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려는 각도를 보고 법황은 짧게 웃었다. 사도의 손을 조심스럽게 돌려 잡고 허리를 굽혀 손등에 닿을락 말락 입술을 갖다 댄 다음 몸을 일으켰다.
키가 법황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이제는 사도님의 존함을 여쭐 수 있을까요?”
“음···.”
신의 사도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글쎄요, 제 예전 이름은 발음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기왕 몸을 쓴 것도 인연이니, 그대로 에다라고 불러주시면 어떠실는지.”
그건 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사도의 옆에서는 알베르토 사제가 ‘나중에 얘기하자’고 필사적인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 너머에서 헤이즐과 샐비어도 뭔가 ‘망했다’는 표정으로 법황 뒤의 누군가와 바쁘게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의문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법황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에다 님으로 알고 있을까요. 이 세계의 모든 신도를 대표해서 사도님을 영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를 포함한 대성전의 사제 일동, 이곳의 새로운 주인께서 원하시는 만큼 편히 머무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성하. 그리고 단장님도요.”
사도는 법황 곁에 선 기사단장에게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단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 오는 먼 길,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저를 친절히 돌보아 주신 점, 진심으로 사의를 표합니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사도님을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영접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저희의 영광입니다.”
무난한 인사에 단장도 무난하게 대답했다.
소심하게 짐마차에 틀어박히기를 좋아하던 신의 사도는 필요할 때는 정중하고 틀에 박힌 인사도 잘 해내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전대 사도는 ‘너희 뭐야! 머리 색깔들이 왜 그래!’라고 삿대질을 해대다가 신전에 끌려왔다던데 이번엔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시작을 좀비로 잡는다면··· 넘어가자.
단지, 이 ‘멀쩡한 사도’의 모습은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다. 말을 하게 되자마자 자신은 신의 사도가 아니라고 우기거나, 원래 세계나 성전 외의 어딘가로 보내 달라고 울상이 될 줄 알았다. 추기경들 앞에서 대뜸 난처한 말을 꺼낼까 봐 사람들을 다 물려 놓았거늘.
알베르토와 기사들의 반응도 신경 쓰였다.
“오시는 길이 험하셨으니 많이 피로하시겠지요, 사도님. 제 응접실에서 차라도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법황의 제안에 사도는 별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사들과 함께 먼저 응접실에 가 있으라고 하자 또 얌전히 복도 모퉁이 너머로 사라져 주었다.
차가 준비되면 따라가겠다는 핑계로 뒤에 남은 법황은 기사들을 훑어본 뒤, 마지막으로 알베르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일입니까?”
알베르토가 조금 창백한 얼굴로 속삭였다.
“만티코어 토벌 때 사도님이 죽인 셰이프 쉬프터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을 여자로 보여서 기사들이 순간 대응에 혼선을 빚었다고 했다. 그걸 사도가 찔러 죽였다고.
법황이 고개를 까딱이자 알베르토가 응접실 쪽을 가리켰다.
“저분이었습니다.”
그 말을 받아들이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법황은 천천히 응접실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쪽으로 간 사람 중 ‘마을 여자’로 오해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사도님의 본래 몸··· 이었다고요···.”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사도를 꾀어내는 미끼로 본인의 모습을 사용하는 건 영리한 선택이었다. 이 세계에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마을 여자로 오해받았을 뿐, 본인에겐 아주 확실한 ‘적’일테니까.
···그렇다고 그걸?
“그걸 본인 손으로 죽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것도 굉장히 적의를 드러내면서요.”
제이크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 건 오는 길에 인신매매범으로 추격을 당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루치아도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사도가 사라진 쪽을 보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좀비의 몸으로 나타난 신의 사도. 포댓자루 안에 멍하니 앉아서도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던 사람. 누군가의 작은 말실수에 이틀 동안 짐마차에서 울었다는 사람. 고통은 싫어하지만 그것을 참는 데는 익숙하고, 고통이 없으면 자기 몸을 지키는 데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어쩌면 저 사람의 전생의 끝은.
“자살한 분··· 이었군요.”
법황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서 자기 세계에서 본인이 선택한 모습, 즉, 시체로 강림했던 거다. 그리고 신께서 그 사람이 사명을 다하기를 원했기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베르토 사제가 눈을 내리깔고 낮게 탄식했다.
“저는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성하. 역대 사도님들의 이야기로는 저 세계는 풍요롭고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더군요. 그런데 왜 그곳에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한 분을 눈여겨보신 것일까요.”
“그건 알 수 없지요. 신의 뜻이시니.”
단지.
법황은 자신이 그간 보아온 사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의사소통엔 좀 문제가 있었지만, 좀비는 온순한 성격이었다. 본능을 이성으로 잘 제어하면서, 친한 기사들에게는 다정하게 대하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의도치 못한 실수를 하거나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본성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신께서 사람을 잘못 부르신 것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저희가 알아야 한다면 조만간 신께서 답을 주실 겁니다. 저희는 저희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하면 됩니다.”
달그락달그락. 복도 끝에서 다과를 실은 트레이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법황은 목소리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알베르토 사제님은 차를 가지고 따라와 주시고, 나머지는 해산하십시오. 사도님과 낯선 사람의 접촉은 본인이 허락할 때까지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추기경단에 말씀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도님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불필요한 혼란이 생기는 일 없도록 말도 행동도 각별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께서 뜻하신 바를 알게 될 때까지, 저희는 그저 그분의 사도님을 불편함 없이 모시는 것을 소임으로 삼겠습니다.”
“예, 성하.”
사람들은 조금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트레이를 가져온 젊은 사제가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발을 멈추었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며 법황은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는 길에 각자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까. 사도님께서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실 리 없습니다.”
헤이즐은 처음에 분명히 보고했다. 좀비는 처음 발견한 직후부터 꾸준히 본인을 죽여 달라고 요구했다, 언데드보다 약한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도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냐고. 좀비일 때와 같은 성격이라면 ‘호위에게 연대 책임을 묻겠다’ 한 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어렵지 않았다.
나머지는 역시 본인과 이야기해 보는 수밖에 없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뒷짐을 지고 장식용 필기대를 구경하던 사도가 재빨리 몸을 세웠다. 아무래도 예복이 좀 큰 것 같지만 자세나 동작이 기본적으로 우아한 편이었다. 적당히 교양 있는 귀족들의 몸가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법황과 알베르토만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사도는 조금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성하. 그리고··· 시종 사제이신 알베르토··· 사제님이시죠? 아니면 주교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요?”
“사제로 충분합니다, 사도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평범했다. 자살한 사람이 좀비로 지내다가 갑자기 인간이 되었는데 계속 웃는 표정인 것은 역시 이상한 느낌이었다.
법황은 자신의 지정석에 앉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으시지요, 사도님. 일단 차라도 한 잔 드셔 보시겠습니까? 이 세계의 음식은 맛을 전혀 보지 못하셨을 텐데요.”
“감사합니다.”
사도는 권하는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알베르토 사제가 차를 내리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좀비일 때 짐마차 난간의 개미를 구경할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사도가 이 세계에 전생할 때는 보통 나이가 어려지고 육체의 나이에 맞춰 정신 연령도 조금 어려진다고 했다. 더구나 본인이 원래 쓰던 몸으로 나타난 이 사도는 그냥 딱 그 나이대의 해맑은 아가씨처럼 보였다.
본인과 똑같이 생긴 셰이프 쉬프터를 망설임 없이 죽일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게 그냥 기사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아니, 자기 파괴욕은 분명히 존재했다. 법황은 만티코어에게 물린 목을 뜯어내려고 눈을 번득이던 그 얼굴을 떠올렸다. 이성을 잃은 상태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알베르토가 두 사람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사도가 먼저 찻잔을 입에 대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우와···. 홍차 맛이잖아···!”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방심할 이유는 없었다.
“홍차입니다. 혹시 입에 안 맞으시면 다른 차를 준비할까요?”
알베르토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사도는 찻잔을 내려다본 뒤 어째선지 조금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도 차나무라는 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서 자란 잎을 따서 말린 다음 발효해서 차를 만들고 그걸 끓는 물에 우려내서 만든 음료를 홍차라고 부른다, 는 말씀이신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법황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입가를 쓸어내렸다. 무심코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손끝으로 슬며시 잡아 내린다.
방심하면 안 된다.
알베르토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혹시 홍차 중에 다즐링과 아쌈과 실론도 있을까요?”
“있습니다. 유명한 품종은 다 아시는군요.”
“···세상에. 인도 지명인데 그게 1대1 번역이 된다고···?”
찻잔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그야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법황은 가볍게 설명을 붙여 주었다.
“사도님들의 세계와 저희 세계는 상당히 유사하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같은 단어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경우들이 없지는 않아서, 초반에 방심했다가 오히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놀라는 경우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미심쩍고 약간 납득이 안 가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일단 믿어는 주겠다’라고 온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좀비일 때도 몇 번 본 눈빛이었다.
어쩌다가 왜 목숨을 버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성전에서 함께 지내는 나날이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다.
법황은 조용히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다시 한번, 저희 세계에 강림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도님. 정말로 잘 와 주셨습니다.”
- 작가의말
1부 끝! 프롤로그 마지막화는 분량이 짧았는데 1부 마지막화는 분량이 기네요. 이렇게 균형이 맞는 거지요.(분량 조절에 실패했을 뿐)
일단 1부 내내 꾸준히 보아 주신 성잔화 님, 그 외 스쳐가는 인연 하무린 님, 춤추는소녀 님, il**** 님과 00**** 님...? 께도 감사 드립니다.
1. 2부부터는 주4회(월, 수, 금, 일) 연재로 연재 주기가 늘어나며
2. 공모전이 끝났으므로 최초 연재처였던 블*이스에서 동시 연재됩니다.
1부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가 되겠습니다만, 잘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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