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규 캐릭터 생성 (3)
잠깐 대화가 끊긴 틈에 시중 사제가 정중하게 나무함을 들어 보였다. 법황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제는 나무함을 사도의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성하께서 사도님께 드리는 회복 축하 선물입니다.”
“아. 무려 선물까지···. 감사합니다···.”
찻잔을 내려놓고 에다는 나무함을 열었다. 나무함에는 섬세한 레이스로 장식된 하얀 베일이 들어 있었다.
시중 사제는 베일 안에 손을 넣어서 머리에 베일을 썼을 때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불투명한 흰 천으로 머리 위에서 뒤집어쓰게 되어 있는 베일은 가슴 정도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다. 아랫단은 술과 장식띠, 그리고 반짝이는 보석알이 달려 있어서 팔락이지 않게 무게를 주었다. 눈가와 얼굴 윗부분은 촘촘한 레이스가 달려서 앞은 보이지만 남이 들여다보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히잡?”
에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법황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까의 ‘가스’나 ‘연탄’ 같은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신의 사도가 특이한 단어를 말하면 보통 그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니 차근차근 물어보라는 것이 전대 사도를 알고 지낸 사람들의 당부였다. 신의 사도와 지내려면 이런 상황에는 익숙해져야 한다고.
“간혹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신도분이 성전을 방문하실 때 쓰는 베일입니다. 베일을 쓴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게 예의라서 돌아다니실 때 조금 편하실 겁니다. 다들 사도님을 평신도로 지레짐작할 테니 행동반경에 다소 제약이 생기긴 하겠습니다만···. 이젠 애착 담요를 뒤집어쓸 수 없으니 허전하실까 하여.”
에다의 눈이 조금 샐쭉해졌다. 지금 날 놀린 건가, 하고 수상해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금세 표정이 풀어졌다. 베일을 이불 위에 펼쳐 놓고 레이스와 장식띠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방금까지와는 달리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교하게 잘 만들었네요. 이렇게 짜려면 시간 오래 걸렸을 텐데. 코바늘인가? 보빈이려나?”
이런 데도 관심이 있나?
법황은 조심스러운 손끝을 보고 미끼를 한 번 더 던져 보았다.
“본당의 서쪽에 가시면 직공소가 있습니다. 필경소, 재단소, 대장간, 양조장, 기타 이것저것 성전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선납품 하는 장인들이 지내는 작업장 겸 상점이지요. 저희는 보통 직공소라고 부르지만 사실 작은 마을 같은 곳입니다.”
“아아, 사하촌 같은 곳이군요?”
그것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법황은 일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성전 도시 최고의 장인들이 모이는 곳이라 어수선하긴 하지만 눈이 꽤 즐겁습니다. 도시의 상가는 마차를 써야 하지만 직공소는 산책 삼아 가 보실 거리이니 둘러보시면 기분 전환도 되시겠지요. 이 세계의 기술 수준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파악하기도 좋고, 오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성전 관계자들이라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호위 기사만 있어도 길잡이는 충분하실 테고요.”
한순간 에다는 조금 묘한 표정으로 법황을 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나, 하고 법황은 급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무난한 권유였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마음의 상처를 건드릴 만한 말이 있었나?
잠시 후 에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재미있겠네요. 저는 미감이 떨어져서 예쁜 걸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예쁜 걸 보는 건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덤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다. 한참 전에는 밥을 먹으면서 칠보 공예, 유리 공예, 아니면 외국의 버드와칭 다큐멘터리 같은 걸 구경하곤 했다. 그 뒤로 바빠져서 눈이 쉴 수 없을 때는 베틀로 천을 짜고, 태피스트리 작품을 만들고, 보빈 레이스를 짜는 유튜브들을 ASMR로 틀어 놓던 때도 있었다.
에다는 섬세한 레이스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려 보았다. 매끄럽고 가볍지만, 분명히 수제 직조한 티가 났다. 진짜로 보빈 레이스인지도 모른다. 법황의 부탁이라지만 며칠 만에 이걸 완성해서 보냈다면 엄청나게 손이 빠른 직공들이 모여 있을 테니 멋지겠지.
···응, 실물을 보면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뭔지 모르지만 쉬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하면 열심히 쉬어 보는 게 이 사람들의 성의에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나.
“혹시 놀러 갔다가 길을 잃으시면 일단 어린이집을 찾아가십시오.”
법황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린이집 사제들은 헤매이는 어린 영혼들을 인도하는 데 익숙한 분들이셔서, 길 안내를 잘해 주십니다.”
“···혹시 절 놀리고 계신가요?”
“제가 어찌 감히.”
···수상한데?
에다는 더더욱 눈을 가늘게 뜨고 법황을 빤히 쳐다보았다.
법황은 시중 사제의 트레이에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의심에 찬 시선을 회피했다.
“아, 그리고 직공소를 오가는 길에 아마 사제복 비슷한 걸 입은 원숭이들도 뛰어다닐 겁니다. 가끔 담장이나 지붕 위에서 떨어지기도 하니 머리 위를 조금만 신경 써 주시면 좋겠군요. 보통 떨어지기 전에 소리를 지르긴 합니다만, 아닐 때가 있어서요. 통행객의 민원이 종종 들어오는 수준입니다.”
시중 사제와 헤이즐이 급히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법황은 샌드위치를 입 안에 깔끔하게 넣으며 시치미를 뗐다.
에다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지만, 의심의 대상은 이미 법황에서 멀어져 있었다.
“···원숭이··· 들이요? 마을 한가운데를?”
“아직은 짐승의 탈을 벗지 못하였으나 조만간 어머니께서 인간의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까 즉.
“어린 사제들을 가르치는 신학교도 본당 서쪽에 있다는 말씀이군요···?”
“소란스러운 요소는 한곳에 몰아 버리자는 전대 사도님의 혜안이셨지요.”
음?
에다는 고개를 들었다.
“전대 사도··· 가 성전 도시? 대성전? 을 정비하셨나요?”
그래서 갑자기 노트르담스러운 고딕 성당이었나?
“건축가셨습니다. 본래 한적한 마을이었던 이 도시 전체를 성전 도시로 지정하고 도시 구획을 정비한 후 대성전까지 설계하셨지요. 약 40년 전, 대성전 부속 건물의 완공까지는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대성전의 주춧돌을 놓으신 후 반평생을 바쳐서 대성전 본당과 숙소, 도서관까지는 손수 마무리하셨다고 기억합니다. 저희 세계의 건축 문화를 정비하는 데 비할 바 없는 공을 세우셨지요. 특히 상수도를 설치하고 화장실을 개선하신 부분이 위생 수준 제고에 큰 영향을 주셨다고 합니다. 여쭤보시면 콘라드 예하께서 며칠이라도 그분의 업적을 칭송해 주실 겁니다.”
치유소장 콘라드 추기경. 깨끗한 화장실과 상수도 보급에 가장 감격할 것 같은 사람이긴 하다.
무협 세계 로판 세계에 빙의해서 수세식 화장실과 비누를 보급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데 ‘이미 보급된’ 세계라서 솔직히 편하긴 했다.
“어쩐지 화장실이 깨끗하더라니···.”
사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는 것을 보고 법황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전대 사도의 이야기는 대성전 바깥, 특히 귀족과 일부 마법사들 앞에서는 금기나 마찬가지인 예민한 화제였다. 그래도 어쩌면 사도가 본인의 사명을 찾는 데, 아니면 최소한 시간을 보내며 기분 전환을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분의 수기가 있으니 사도님께 열람을 허락해 놓도록 하지요. 사도 문자라서 직접 읽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연세 많은 추기경들께 젊은 시절 전대 사도님을 만난 이야기를 들어보실 수도 있겠고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에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만난’··· 아니,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누구였더라···?
“···그러고 보니 성하. 제가 아마도 만나봐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찾는 걸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지요?”
“음, 신께서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 아마 저와 생활 동선이 겹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루드비히’라는 사람을 아시는지요.”
······.
법황의 얼굴에 떠오른 온화한 미소가 단번에 서늘해졌다. 시중 사제가 히끅, 하고 딸꾹질을 하고는 급히 입을 가렸다.
사도는 슬쩍 곁눈질을 했다. 헤이즐마저 다소 비난 어린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거 좀비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뒤에 한동안 보지 못한 눈빛인데. 그 정도의 실수였다는 말 같은데.
“···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법황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두 번째 샌드위치를 접시 위에 도로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하고, 법황은 조용히 두 손을 모아 다리 위에 얹었다. 더없이 정중한 자세였다.
“아닙니다. 신의 사도께서 행하시는 일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저 귀하신 분의 인상에 남지 못한 이 미천한 신의 종의 잘못일 따름이지요.”
···설마···?
신의 사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법황은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처음 뵈었을 때도 말씀 올렸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사도님. 법황 루드비히라고 합니다. 참고로 대성전에 동명이인은 없습니다.”
“···엥?”
신의 사도는 기묘한 소리를 내고는 굳어졌다.
법황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샌드위치를 집어서 다 먹을 때까지도, 꼼짝도 안 하고.
법황은 차를 마시면서 찻잔으로 잠깐 얼굴을 가렸다. 사도 강림 사태로 정신없이 바빠서 잠시 잊고 있던 서운함이 또다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정말이지.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신뢰도가 떨어지고 존재감이 없는 건지.
보통은 얼굴만 보고도 헤실거리면서 간도 쓸개도 빼 주려고들 덤빈다. 지켜달라고 매달린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정말···.
“···사도님은 좀··· 저에게 야박하신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 서운함이 입 밖으로 조금 새어 나왔다.
사도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법황을 바라보았다.
“제가, 정말 큰 결례를 범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그렇지만 처음 뵈었을 때는 신성력 때문에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성함을 제대로 못 들었고, 그 뒤로는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알베르토의 이름은 간간이 들렸는데 루드비히라는 이름을 부른 사람 따위 한 명도 없었다.
“누가 감히 법황 성하의 존함을 입에 담겠습니까···. 성하께선 성하이신 것을···.”
헤이즐이 곁에서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차라리 대성전이면 법황보다 나이 많은 추기경들이 실수로라도 이름을 부를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실수는 실수고 무례는 무례다.
에다는 더더욱 괴로워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죄송합니다. 이제 이름 안 까먹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전투 때, 저를 안 지켜 주실 거라고 멋대로 생각한 것도 이 이 자리를 빌려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전생에 혼자 지내던 기간이 길어서 그만, 누가 절 도와준다는 생각이 잘 안 떠올랐어요. 짐승한테 물려서 하늘을 나는 건 처음이라 여러모로 당황도 하고···.”
“···기사단장님 말씀을 흉내내시는 게 아니라?”
- 작가의말
초보자용 장비 장착 & 튜토리얼 퀘스트 지급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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