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신의 이름은 (4)
비브리다 추기경이 웃으며 말했다.
“사도님의 세상 지식이야 뭐, 어린이집 아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오전에 수업만 함께 하시는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요. 남들에게는 수업을 참관하러 오신 귀족이라고 말해 두면 될 테고요.”
“···하긴, 처음부터 교육 제도를 밟아 가시는 게 도움이 되실 수도 있겠군요.”
진짜 어린이들처럼 배우는 속도가 느리지는 않겠지만, 간혹 아이들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쩌면 그쪽으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다 싶으면 단독 수업을 편성해도 되고.
루드비히가 막 허락하려는데 알베르토 사제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만 성하! 어린이집은!”
모두의 시선이 모이고, 알베르토는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그곳은 마물의 소굴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알베르토 사제. 어린이들은 그냥 예의와 상식이 없을 뿐이지 결코 교리에 반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루드비히는 차분하게 자신의 시종 사제를 타일렀다.
“하오나 사도님을 그런 곳에 던져 넣었다간!”
알베르토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카트리야를 돌아보았다.
그 심각한 표정에 조금 장난기가 생긴 카트리야는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아, 혹시 불신자 사도가 어린이집의 마물들을 이끌고 대성전에 반역을 일으킬까 염려되시나요?”
법황과 추기경들이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알베르토는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힘없이 웃어 버렸다.
알베르토가 어린이집에 질색하는 이유는 이해하지만, 사도가 세상 물정을 알게 되는 것도 급한 일이었다. 적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법황 집무실에 한가득 쌓여 있는 사도 접견 신청서를 떠올리고 루드비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는 1대 1 접견은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사도를 안전하게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을지. ‘지금은 인간이고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정도는 확인시켜 주고 싶은데 답이 안 나온다.
“어린이집 마물들하고 반역을 일으키실 거면 사도 강림 기념 특별 예배 이후로 부탁드립니다.”
루드비히가 웃음과 한숨을 섞어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카트리야는 눈이 동그래졌다.
“제··· 강림? 기념 예배를 하시나요?”
“예. 백 년에 한 번 있는 사도 강림인데 당연하지요.”
“···저··· 도 무언가를 해야 하나요···?”
하던가? 식순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루드비히는 비브리다 추기경에게 눈길을 주었다. 비브리다는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옛날에야 이런저런 행사도 있었습니다만, 이 세계에 갓 도착한 분께 무리한 요구를 드릴 수는 없지요. 그냥 얼굴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사실 루드비히로서는 사도의 얼굴도 공개하고 싶지 않지만, 그 정도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일벌레 알베르토는 할 일을 기억해 내자 빠르게 회복했다. 마른세수를 하고 조용히 덧붙였다.
“그, 지금 입으신 평사제복 말고 특별 예배용 제례복이 따로 있습니다. 사도님의 몸에 맞춰 새로 지을 거라 재단사를 한 번 만나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라도 사도님을 찾아뵈라고 하지요. 식전의 진행 방식 등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귀빈들과의 일정 조율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아마 이번 달 안에는 예배일이 결정될 것 같은데··· 예, 지금은 아직 기획 단계라 그런 일정이 생긴다는 정도만 알아 두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하, 알베르토 사제님. 남은 오후 평안한 시간 되시기를.”
카트리야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루드비히는 잠깐 복잡한 표정으로 카트리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도님이 협조를 해 주시면 좀 더 평안할 텐데···.”
아하하.
카트리야가 떫은 표정으로 웃는 곁에서 비브리다가 웃으며 조용히 윽박질렀다.
“사도님 압박하지 말고 갈 길 가십시오, 성하. 사이좋게 지내라는 계시를 성하라도 받드셔야지요.”
“···이 또한 어머니께서 주시는 시련이겠지요.”
루드비히는 중얼거리면서 응접실을 나섰다.
알베르토의 뒤로 콘라드 추기경이 급히 붙어 나왔다. 알베르토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 루드비히에게 붙어 나지막이 물었다.
“성하, 귀빈이라고 하면 황족들도 부르시는 겁니까?”
“그래야지요.”
“···귀한 손님은 무슨, 뭐 뜯어먹을 거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몰려들겠지요. 실제로 뜯어먹을 것도 있고.”
루드비히는 낮게 웃었다. 치유소장은 가끔 말이 참 직설적이었다. 어릴 때는 이게 꽤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가끔 대신 욕을 해 주면 속이 시원했다.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성하. 그래서 제가 잠깐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사태를 해결할 묘안이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성하가 미인계를 쓰시지요.”
루드비히는 발을 멈추었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니 콘라드는 농담 반 진담 반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성하가 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사도님도 정신 연령은 높은 편이고, 괜찮습니다, 성하의 얼굴과 몸매가 많은 걸 해결해 줄 겁니다.”
“···예하. 실례지만 전 오늘 감당할 수 있는 충격은 이미 저 안에서 다 받고 나왔습니다. 요점을 말씀해 주시지요.”
“아시지요? 사도님은 속은 어떻든 겉으로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입니다. 황족이든 귀족이든, 귀빈이랍시고 오는 놈들이 첫눈에 반했답시고 청혼서를 보내기가 아주 쉬운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렇겠지.
루드비히도 속으로 동의했다. 청혼서가 어떻게 시작할지도 뻔했다. 대성전의 사제석에 계신 모습을 보고 운명을 느꼈습니다. 신비한 검은 머리카락과 고귀하신 자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법황 성하의 설교마저 귀에 들어 오지 않고 어쩌고저쩌고.
신청서를 보낼 만한 귀족 남자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조금 짜증이 났다. 원래도 설교 따위 안 듣고 딴짓만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독실한 신자인 척하겠지. 그게 먹힐 줄 알고. 하지만 신의 사도는 불신자다. 꼴 좋겠군.
그래도 그런 자들에게 잘못 걸리면 저 소심한 사도 따위는 한 달만 있어도 너덜너덜해질 게 뻔했다.
루드비히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콘라드는 진지하게 한 발짝 더 다가와서 속삭였다.
“이 세계에 적응하기 전에 자기 가족 내에 포섭하고 고립시키면 남은 평생 신의 사도의 발언권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할 테지요. 누구나 덤빌 겁니다.”
안다. 전대 사도는 꽤 성격이 거친 남자였는데도 귀족 여자들의 접근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평민과 결혼했을 때는 그 상대도 여러 차례 위험에 처했다. 나중에는 사도의 가족들을 보호하던 성기사들도 여럿 목숨을 잃었다. 그쪽은 특수한 사정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조심은 필요했다.
“귀족들은 전대 사도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사도님을 자기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겠지요. 성전이 사도님을 보호해야 합니다.”
“사도님은 아직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본인이 성전 바깥 사람을 만나 보기를 원하신다면···”
“성전 바깥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성하도 아시잖습니까!”
콘라드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숨죽인 다그침이 성전의 복도에 울렸다.
“그럼 성전 안은 안전할까요?”
그 울림이 가시기도 전에 루드비히는 차갑게 되물었다. 콘라드는 법황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알베르토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도 바깥보다는 낫습니다, 성하. 적어도 어머니의 뜻을 저희가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하다못해 사도님의 사명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만이라도 사도님이 바깥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도록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바깥에서 나오는 말은 이미 전해 드렸지 않습니까.”
이번 신의 사도는 여자다. 마을 창녀의 몸으로 강림했다더라. 좀비로 나타났는데도 성기사단이 오기 전에 벌써 남자를 유혹했다더라. 성기사들하고는 뭔가 없었을까.
보다 못한 여신께서 깨끗한 새 몸을 내려 주셨다는데 정말일까. 사실 여전히 좀비인 거 아닌가.
성전에서는 사제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탕녀 엘피에라의 뒤를 잇는 건 아닐까.
근거 없는 헛소문은 이미 퍼져나가고 있었다. 사도의 몸값을 깎고 이름을 더럽히려는 수작질이다. 성전에서도 대처는 하지만 본인을 내보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세상에 사도를 던져 넣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사도님의 의지를 무시하고 성전에 가둔다면 저희도 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도님이 직접 판단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불신자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하신 건 성하십니다. 그럼 그 판단력이 생길 때까지 사도님을 다른 귀족들, 특히 음흉한 남자들한테서 지켜줄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콘라드가 열성적으로 따졌다.
“······그래서 저한테 사도님을 유혹하란 겁니까.”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결론이었다.
“법황의 연인이라고 하면 사실 각국 지배자나 적통 후계자 말고는 감히 집적거릴 남자가 없긴 할 겁니다. 그중에 미혼인 사람이 전 대륙에··· 열 명도 안 되겠군요. 그럼 청혼서 대란 정도는 막을 수 있고, 그럼 업무가 많이 줄어들 것 같기는 한데···.”
그 와중에 알베르토가 옆에서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렸다. 콘라드가 손뼉을 쳤다.
“그렇지, 그것도 중요하지! 게다가 성하는 사도님을 제일 먼저 만난 남자 축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좀비한테 첫눈에 반했다는 주장이라도 할까요?”
“첫눈에 반할 때는 얼굴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울림이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성하, 전대 사도님의 말로는 그분 세계에는 결혼하면서 부부가 종교를 통일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하가 사도님을 유혹하신 다음 개종시키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제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반은 진담으로 한다는 게 무섭다. 제발 앞만 진담이고 개종 부분은 농담이면 좋겠다.
루드비히는 한숨을 내쉬며 성호를 그었다.
“예하만 아니셨으면 진짜 법황 모독죄로 고발했을 겁니다···.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 교단 문란한 연애 금지 아니었습니까.”
“‘문란한’이 문제지 ‘연애’는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결혼 못하게 하자는 흑심을 품고 유혹하는 게 문란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성하는 순결 서약은 안 하셨으니 결혼도 가능하시죠.”
“그래서 성하 결혼 좀 하시라고 다들 말해 왔잖습니까.”
“그렇지요, 사실 좀 늦으셨으니까요. 오를레앙 공작 부인 뒤로 오래 만난 분도 없으셨고.”
“맞네, 그분밖에 없지? 아예 성하, 사도님하고 진짜로 연애를 해 보셔도 괜찮겠습니다.”
“음, 예하, 두 분 지위는 잘 맞지만 그래도 본인들의 의사가···.”
콘라드와 알베르토는 착착 대화를 주고받았다.
루드비히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피곤하다. 아직 티타임이지만 퇴근하고 싶다. 기도실에 가서 불신자의 발언이나 곱씹으면서 기도나 하고 싶다···.
루드비히에게는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 작가의말
내가 무려 강림? 씩이나? 했다고? 에 아직 적응 못한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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