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공모전참가작 새글

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1.22 14:00
연재수 :
83 회
조회수 :
3,068
추천수 :
337
글자수 :
424,166

작성
24.11.15 14:00
조회
29
추천
4
글자
11쪽

12. 먼저 다녀간 사람 (2)

DUMMY

아직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문장이라도 단숨에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러니까 조금 나아진 건 확실하다. 어쩌면 몸이 20대로 돌아오면서 망가진 뇌도 같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안 읽힐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읽어 보자. 밤이 늦어서 피곤해서 잘 안 읽힐 수도 있으니까.

카트리야는 계속 도망칠 구석을 만들면서 떨리는 손으로 수기의 제일 앞 페이지를 펼쳤다.


XXX년 X월 X일 ···같음.

한글 다 까먹을 것 같아서 일기를 쓰기로 했다. 사도님의 수기라고 사람들이 보관하겠다고 하니 개인적인 이야기는 쓰지 말자. 쪽팔린다.

정신연령이 좀 낮아진 기분이다. 몸이 20대로 회춘하더니 정신도 회춘했나.

그나저나 이 동네 달력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태양력이라는데 뭔가 월별로 날짜가 다 다르고 12월 중간에 무슨 특별 주간이 1주일에서 열흘 정도 들어간다고 한다. 남는 날짜 조절하는 건가? 윤월도 아니고 너무 폭이 크지 않나? 아무튼 정확한 날짜는 사제들만 신경 쓰는 것 같고, 대강 요일만 알면 되는 모양이다.

어차피 지구도 아닌데 대충 살자. 이미 인생이 판타지다. 달이 두 개인 곳에서 달력에 뭘 바라.


머리가 덜컥 멈췄다.

혹시 내가 지금 또 뭘 잘못 읽었나? 또 난독증이나 망상증인가? 제대로 읽고 있지 않았어? 그럼 진짜?!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으로 달려가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서늘한 바람이 훅 들어왔다.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하나였다.


루드비히는 단단히 닫힌 방문을 노려보았다.

“···사도님이 이틀째 식사를 안 하신다고요.”

“예.”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으시고?”

“예.”

“호위를 내보내고 문을 닫아걸기까지 하셨다?”

“열 수야 있습니다만···.”

당연히 열 수는 있다. 열쇠 따위 없어도 힘으로 문을 열 사람도 많다.

단지 방 안에 있는 게 신의 사도라는 부분이 문제일 뿐이다.

루드비히는 목 끝까지 채운 연회용 로브의 조임쇠를 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귀족들의 무도회에 참석해서 저녁 내내 사도는 언제 보여줄 거냐 어떤 사람이냐 혹시 미리 만나게 해 줄 수는 없냐에 시달리다 돌아왔더니 그 사도가 단식 농성 중.

진짜 인생 쉽지 않다.

“틀어박힌 지 얼마나 됐습니까?”

“저녁 식사를 가져다드린 뒤입니다.”

지금이 한밤중이니 이 정도면 혼자 둔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자해를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었다. 호위가 문밖에서 감시는 했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루드비히는 손을 까딱였다. 알베르토가 열쇠를 내밀었다.

똑똑.

“사도님, 루드비히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라는 대답 따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따고 들어가자 침대 위의 이불 더미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촛불 하나 없이 어두웠다.

루드비히가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을 때까지 이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충 등으로 짐작되는 꼭대기를 손끝으로 슬쩍 건드려 보았다.

“얼굴 정도는 보여 주시겠습니까. 괜찮은지 확인만 시켜 주시지요.”

이불 한쪽이 살짝 흔들렸다. 머리는 그쪽에 있는 모양이다.

···음, 역시 안 되겠군. 이불 밖으로 어떻게 꺼낸다. 힘으로 찍어 누르자면 못 할 건 없지만 방에 멋대로 들어온 걸로 이미 폭력은 차고 넘쳤으니까···.

루드비히는 문득 협탁에 펼쳐진 책을 알아보았다. 전대 사도의 수기였다.

“···이틀 동안 한 페이지 읽으신 겁니까?”

이불이 파드득 놀랐다.

루드비히는 즉위한 후에 한 번 보고 넣어 두었던 사도의 수기를 집어 들었다. 달빛에 종이를 비춰 보았다.

“‘어차피 지구도 아닌데 대충 살자. 이미 인생이 판타지다. 달이 두 개인 곳에서 달력에 뭘 바라.’ 판타지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

“지금!”

순간 이불 더미가 달려들었다. 루드비히는 반사적으로 수기를 든 손을 옆으로 치웠다.

이불을 휘감은 카트리야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거의 멱살을 잡을 기세다.

“지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판타지··· 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니야.

소리 없이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고 카트리야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이불에 온몸을 휘감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고개를 숙였다. 이불자락으로 얼굴을 거칠게 훔쳤다.

“······그거, 그 일기, 소리 내서 읽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마 귀는, 귀는 괜찮으니까···.”

당신 세계 글자잖아? 그리고 귀가 괜찮다는 게 무슨 뜻이신지···?

하지만 무언가가 중요한 모양이다.

이렇게 절박한 사람의 표정을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전장에서나 보던 표정이다. 이 평화로운 시기에, 해맑은 사도의 얼굴에서 보고 싶은 표정은 아니었다.

“···사도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루드비히는 다시 전대 사도의 수기를 들었다.

“오랜만에 읽는 거라 좀 틀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보자. ‘한글 다 까먹을 것 같아서 일기를 쓰기로 했다.’”

도롱이 벌레처럼 된 카트리야는 묘하게 비장한 분위기로 루드비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첫 일기는 짧아서 금세 마지막 문장에 도달했다.

“···‘달이 두 개인 곳에서 달력에 뭘 바라.’”

루드비히는 눈을 들었다.

다음 날짜도 읽어야 하나?

카트리야는 말라붙은 입술을 움직였다. 마지막 문장을 따라 읽고 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눈을 움직였다.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세계엔··· 달이··· 둘인가요···?”

“셋입니다.”

카트리야는 고개를 휙 돌려서 루드비히를 보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대답을 검토해 본 뒤 사도의 수기를 다시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늑대달은 대륙 외곽에서만 보이니까요. 전대 사도님이 이 일기를 시작한 시기라면 달이 둘만 있는 줄 아셨겠군요.”

카트리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보일락말락 내저었다.

“···아니야, 하나였어요. 제가 봤을 때는 하나였어요. ···제가··· 제가, 잘못··· 본 걸까요···?”

루드비히는 턱을 쓸어내렸다. 사도가 이 세계에 온 뒤 이동한 지역에선 전부 달이 둘 보였을 거다. 달이 하나로 보이는 경우는···.

“혹시 초저녁이나 새벽 시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애기달이 늦게 뜨고 일찍 지니 큰달만 보일 때도 있긴 합니다만.”

“···새벽이라 그래요? 새벽이라서 달이 하나인가요? 새벽에만?”

일그러진 얼굴로 매달리듯이 물어보는 목소리가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가끔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상태다.

달이 하나라는 데 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달이 하나인 세계에서 왔으면서?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루드비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은···?”

루드비히는 창문을 열고 바깥 하늘을 내다보았다.

“아직 둘이군요. 애기달은 곧 저물겠습니다만.”

카트리야는 이불을 휘감은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창밖을 겁먹은 표정으로 보고 있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침대로 돌아가서 손을 내밀었다.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한순간 망설인 뒤, 카트리야는 입술을 꾹 깨물고 루드비히의 손을 잡았다.

이틀 내내 침대에 웅크려 있었던 탓에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몸이 무너졌다. 루드비히는 재빨리 허리를 받쳐 안아 일으켜 세우고, 다리에 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조심 창가로 데려갔다.

카트리야는 창가에 기대서도 창틀을 인생의 원수마냥 노려보고만 있었다. 고개를 들기가 무섭다는 것처럼.

루드비히는 그 옆에 서서 창밖을 가리켰다.

“자, 저기 큰 달이 있지요? 저건 그냥 ‘달’이나 ‘큰달’이라고 부릅니다. 그 옆에, 지금은 반쯤 가려졌지만 작게 튀어나온 부분이 ‘애기달’입니다. 그리고 ‘늑대달’이라고 애기달만한 달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대륙 외곽에 가야 보입니다.”

카트리야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카트리야가 달이 두 개인 것을 확인한 순간이 언제인지 루드비히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동그란 눈이 한껏 커지고, 갈색 눈동자에 빛이 돌고, 숨을 들이마시고,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달이 두 개예요!”

카트리야는 루드비히를 휙 돌아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너무 기뻐 보여서 루드비히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가.

갈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전 바보같이 달이 하나인 줄 알았어요! 하늘을 제대로 안 봤나 봐요!”

“···그러··· 셨군요···?”

그러니까 대체 왜, 달 때문에 이렇게까지···?

“둘이었어, 달은 둘이고 사도의 인생은 판타지였군요!”

왜 사도가 손뼉까지 치면서 기뻐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카트리야는 갑자기 루드비히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몸이 온몸에 부딪힐 때까지도, 이불이 바닥에 흘러내릴 때까지도 루드비히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늘에 달이 둘인 게··· 이렇게까지 기뻐할 일이었나? 그럼 진작에 알려줄 걸 그랬나?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달이 둘이었어, 난 괜찮은 거였어요,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굳어 있던 루드비히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흐느껴 우는 카트리야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다리 사이의 바닥에 편하게 앉혔다. 떨어뜨린 담요를 다시 가져와서 몸을 감싸주고, 머리는 가슴에 기대서 등을 다독여 주었다.

살짝 민망할 정도로 몸이 맞닿았지만, 경험상 이게 달라붙는 환자를 진정시킬 때 제일 편한 자세였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품에 안긴 채 ‘괜찮은 거였어’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면서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려가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머리에 턱을 살짝 기댔다.

정말··· 이 신의 사도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의문투성이다. 가끔은 이 조그마한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나하나 꺼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불신자 선언보다 더한 게 나올까 봐 무섭기는 했다. 더한 게 뭐가 있을지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지만.

울음이 진정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몸을 일으켜 앉고도 조금 더 훌쩍이는 것을 루드비히는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엉망이 된 얼굴을 이불로 대충 닦고, 카트리야는 드디어 조금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성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은 처음으로 행복해 보였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팔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저물어가는 달빛에 얼룩덜룩해진 팔이 비쳤다. 잇자국 모양으로 피가 맺히고 멍이 들어 있었다. 고통스러운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제 팔을 물어뜯던 병사들이 남기던 흔적과 똑같다.

그 팔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루드비히는 낮게 속삭였다. 

“사도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주기 공지 24.10.09 60 0 -
83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3) NEW +1 2시간 전 5 1 11쪽
82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2) +2 25.01.20 15 2 11쪽
81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1) +1 25.01.19 13 2 11쪽
80 21. 불행의 편지 (3) +2 25.01.17 17 3 11쪽
79 21. 불행의 편지 (2) +2 25.01.15 19 2 11쪽
78 21. 불행의 편지 (1) +2 25.01.13 18 2 11쪽
77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2 25.01.12 15 2 11쪽
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19 2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19 2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18 2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18 2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19 2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20 2 11쪽
70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2) +2 24.12.30 21 2 11쪽
69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1) +2 24.12.29 19 2 11쪽
68 18. 탕녀 엘피에라 (5) +2 24.12.28 23 4 11쪽
67 18. 탕녀 엘피에라 (4) +1 24.12.27 22 3 11쪽
66 18. 탕녀 엘피에라 (3) +2 24.12.25 21 3 11쪽
65 18. 탕녀 엘피에라 (2) +1 24.12.23 22 3 11쪽
64 18. 탕녀 엘피에라 (1) +1 24.12.22 18 3 11쪽
63 17. 요정의 밤 (5) +1 24.12.20 22 3 11쪽
62 17. 요정의 밤 (4) +2 24.12.18 25 2 11쪽
61 17. 요정의 밤 (3) +2 24.12.16 27 3 11쪽
60 17. 요정의 밤 (2) +1 24.12.15 21 3 12쪽
59 17. 요정의 밤 (1) +2 24.12.13 24 3 11쪽
58 16. 눈가리개의 나라 (4) +1 24.12.11 28 2 12쪽
57 16. 눈가리개의 나라 (3) +2 24.12.09 24 3 11쪽
56 16. 눈가리개의 나라 (2) +2 24.12.09 20 3 11쪽
55 16. 눈가리개의 나라 (1) +1 24.12.08 25 3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