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먼저 다녀간 사람 (4)
길고 끈질긴 개혁이 끝나기까지 법황이 두 번 더 바뀌고, 고위 사제들 몇몇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건축가와 부인, 아이 셋은 모두 건강하게 자랐지만, 친구 기사들의 장례식은 유난히 자주 열렸다.
수기의 마지막 장에는 노트르담 성당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대성전 건축 예상도였다.
<평생을 함께 싸워 준 나의 동지들에게>
늙어서일까. 흔들리는 글씨가 마지막 기록이었다.
카트리야는 전대 사도가 마지막에 남긴 본래 이름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역시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이 세계에 무언가를 해 줄 능력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신은 나를 선택했을까. 본래 세계에서도 쓸모가 없었던 사람을, 왜.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창가로 다가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두 개가 예쁘게 떠 있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자 아래쪽에 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멍하니 안뜰 가장자리의 벤치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던 루드비히가 눈을 돌렸다.
“...사도님도 밤잠이 없으시군요. 늦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밤공기에 술 냄새가 같이 실려 왔다. 평소보다 조금 동작이 굼뜬 건 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루드비히는 몸을 일으켜 겉옷을 벗어서 자기 옆자리에 펼쳐 주었다. 앉으라는 뜻인가, 하고 카트리야는 그곳에 걸터앉았다. ···그래 놓고 본인은 차가운 자리에 그냥 앉아 버리는 게 뭔가 좀··· 그렇다.
평소 입는 사제복보다 좀 더 상체가 달라붙고 보석이 장식된 로브는 로브보다는 케이프 코트처럼 보였다. 루드비히의 눈 색에 맞춘 건지 푸른색 장식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사제보다는 멋을 부린 기사, 아니면 달빛을 받은 요정··· 아니, 요정왕 같아 보였다.
카트리야는 가볍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연회에 다녀오셨나요?”
“···예. 슬슬 여름이라. ···모임이 늘어서요.”
대답도 한 박자 느리다.
잠깐 몸을 숙이고 있다가, 루드비히는 고개를 들고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몸을 뒤로 젖혔다. 괜히 끌어안기는 느낌이 들어서 카트리야는 조금 앞으로 당겨 앉으며 몸을 틀었다. 이것도 살짝 가까운 느낌이지만, 뭐, 보는 사람도 없고 괜찮겠지.
“많이 드셨군요?”
“음···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조금 술을 깨고 들어갈까 해서. ···냄새납니까?”
“···술인 걸 알 정도로는?”
그렇군요.
루드비히는 낮게 중얼거리고 잠깐 눈을 감았다.
피곤해 보인다. 그냥 들어가서 자면 될 것을.
잠깐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루드비히였다. 눈도 뜨지 않고 담담히 물어본다.
“어제 달이 둘이라고 기뻐하셨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게···.”
설명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덜 미친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우물쭈물하자 루드비히는 피식 웃었다.
“설명하기 힘들면 괜찮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라도 가르쳐 주시면··· 좋겠네요.”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또다시 루드비히는 불쑥 물었다.
“전대 사도님의 수기는?”
“다 읽었어요.”
빠르시군요.
다시 낮은 웅얼거림. 또 침묵.
카트리야는 이 사람 혹시 자나 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긴 속눈썹이 움찔하더니 다시 눈이 스르륵 뜨였다. 반쯤 풀린 푸른 눈동자가 앞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농성은 괜찮지만 단식은 안 됩니다. 식사는 잘 챙기셔야지요.”
“···예.”
다시 눈이 감겼다. 또 침묵.
···아무래도 취한 거 같은데? 들어가서 자야 하는 것 같은데?
몸에 손을 대긴 좀 미안했지만,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 보았다.
“···그, 성하? 여기서 주무시지 말고 들어가서 주무시죠···?”
“···안 잡니다.”
아냐, 당신 지금 자고 있는데?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몸을 훑어보았다. 호리호리하긴 하지만 근육도 많고 키도 크고··· 절대로 못 들어 올릴 거다. 사실 침실 위치도 모른다. 별수 없지, 들어가서 기사라도 찾아와야···.
“사도님은 왜 신을 안 믿으십니까?”
루드비히가 낮게 물었다. 일어나려던 카트리야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루드비히는 또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안뜰과 그 반대쪽 끝에 세워진 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길을 잃으신 분이, 어째서 가시밭길을 벗어날 길잡이가 되어 주실 분을 믿지 않고 홀로 고집스럽게 가시밭을 헤매십니까.”
“···길잡이를 믿기 힘들어서겠죠? 진짜 옳은 길로 데려갈지, 의지하게 만들고 사라지지 않을지.”
“믿어 보기 전에는 답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럼 속는 셈 치고 믿어보셔도 좋을 것을. 마음을 기댈 곳이 있으면 덜 힘들 겁니다. 혼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털어놓고 위로받을 상대가 있는 게 낫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그렇게 믿기에 부족해 보이십니까?”
“······사이비 종교의 무서움을 모르는 세상 사람다운 말씀이군요.”
카트리야는 나지막이 웃었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앉아 벤치의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 한쪽 다리는 접고 앉아 루드비히를 마주 보았다. 벤치에 깔린 루드비히의 겉옷 너머로 단단한 팔이 어깨에 닿았지만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성하는 ‘신앙’을 뭐라고 정의하시겠어요?”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 일까요···?”
“예, 신앙은 믿음이에요. 어허, 똑같은 소리가 아니라요.”
루드비히가 말을 하려는 것을 카트리야는 손가락을 세워서 막았다.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웃는다.
“저희 세계에서 종교의 반대 개념은 과학이었죠. 세계가 알아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그 학문이요. 과학은 ‘이해한 후에 믿는 것’이고, 반대로 신앙은 ‘이해하기 전에 믿는 것’이에요. 차이를 아시겠죠?”
과학은 대상을 파헤치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 것. 신앙은 일단 믿은 다음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해하는 것.
루드비히는 그 정의를 몇 번 마음속에서 곱씹어 보았다.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비교할 대상이 있으니 더 확실하게 와 닿았다.
이 세상에는 어머니 여신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다정한 눈으로 돌보아 주시며 우리가 가는 길을 밝혀 주시리라는 것을 언제나 믿어 왔다. 그분이 옳은 길로 자신을 인도해 주는 길잡이라는 것을,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된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믿기 전에 그 말이 옳은지를 검토하고 증명한 적 따위 없었다.
카트리야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저는 모르는 걸 믿진 못해요.”
“···사도님은, 저는 믿으십니까?”
카트리야는 조금 묘한 표정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고 손가락을 꼽았다.
“성하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고, 저에게 책임감을 느끼면서 잘 쉬도록 지켜 주시고, 또 저한테 정직하시기도 한 것 같아요. 전 성하의 팔이 닿는 범위에 앉아도 제가 어떤 식으로든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대성전보다 저를 우선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건 믿는 걸까요?”
태연하게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조금 야속했다. 그야 대성전이나 신을 배신하고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기보다는 좀 더 근거 없는 믿음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
···그래, 취했군. 이 근본 없는 인정욕은 대체 뭐냐.
루드비히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좋은 사람이란 평가는 제가 하는 행동에 따라 뒤집힐 수도 있지요. 그래도 일단 그 정도는 저를 믿으시잖습니까. 같은 믿음을 저희 어머니께 주실 수는 없습니까?”
“저는 성하보다 성하의 신을 더 모르는걸요. 아름다운 뱀이고 친절해 보였지만, 친절한 사람들도 필요해지면 얼마든지 상대를 이용하고 속여넘길 수 있어요. 전 그 ‘필요하면’의 선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고요. ···그래도 성하는 저를 여러 번 도와주셨으니 일단 믿지만요.”
살짝 가라앉은 눈동자가 고집스러웠다. 그렇다고 신에게 꾸준히 현신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역시 이단자 회유는 쉽지 않다.
“···어머니는, 뱀이시던가요?”
“어, 혹시 사람인가요?”
휘둥그레진 눈을 보고 루드비히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신의 진정한 모습을 신의 사도가 신도에게 묻는 건가.
“인간으로 현신하시기도 할 텐데, 저야 계시를 받을 때 목소리만 들었지요. 세계수 때는··· 그때는 그저 눈이 부셔서, 감히 눈을 들 생각도 하지 못하는 바람에 모습은 뵙지 못했습니다.”
아쉽다. 그때 단 한 번만 눈을 들어 볼 것을. 신의 모습을 직접 볼 유일한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만날 수 있으면,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머니. 저희의 행동은 당신이 보시기에 흡족하였습니까. 저희가 이 땅에 흘린 피는 헛되지 아니하였습니까.]
루드비히의 생각은 알지 못한 채 카트리야는 열심히 자신이 본 신의 모습을 설명했다. 두 손까지 열심히 움직여 가면서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제가 봤을 때는 하얀 뱀이었어요. 이만한 날개도 있고, 굵기는 이 정도, 길이는··· 나무에 묻혀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적당한 길이였을 거예요. 그냥 ‘완벽한 비율’이라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리고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이렇게 머리에서 울리는 느낌으로···.”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루드비히는 벤치의 등받이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시야를 가렸다.
[전쟁에서 달아난 형제자매들을 당신은 용서하시나이까.
저희도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까.
용서함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게오르그가 저희의 피로 일궈낸 평화를 위협하였으니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그는, 탈주 사제들은 저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들은 선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강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언제나 약자를 가엾이 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그들을 전장으로 불렀고 제가 그들이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었나이다. 제가 먼저 그들을 저버렸는데 감히 그들을 재판하여 처벌하고 사면하라 말씀하시렵니까.
어머니께서 맡겨 주신 짐이 제게는 너무 무거워서···]
이마에 차가운 손이 와 닿았다.
술기운에 수렁으로 빠져들던 생각이 멈추었다.
···그래, 그래서 과음했다. 게오르그가 대성전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었지.
루드비히는 눈을 들었다. 카트리야는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말 안 듣는 아이를 보는 표정이었다.
“침실에 들어가서 제대로 주무시면, 제가 신한테 성하 꿈에 나타나 달라고 기도해 볼게요.”
“···신을 믿지도 않는 분이 무슨 기도를.”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물도 꼭 마시고요, 하면서 카트리야가 혀를 찼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웃었다.
“저희 세계의 무신론자들한테 ‘랜덤 기도’라는 풍습이 있거든요. 일단 기도를 하면 그 많은 신 중에 누구 한가한 신이 들어주겠지, 하고 급할 때 기도를 하는 건데···. 이 세상은 신이 하나니까 들을 신도 하나고, 그럼 성하의 기도하고 비슷하겠지요?”
“···정말··· 양심이 없으십니다···.”
- 작가의말
사실 랜덤 기도의 가장 양심 없는 부분은 \'기도가 이뤄진 후엔 신은 없으므로 아무에게도 감사하지 않는다\'가 아닐까 합니다... ㅋㅋ
퇴사 기념 연참.
1부는 전부 쓴 다음 줄이면서 올렸는데 2부는 쓰면서 올리다 보니 좀 늘어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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