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공모전참가작 새글

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1.15 14:00
연재수 :
79 회
조회수 :
2,670
추천수 :
329
글자수 :
403,609

작성
24.11.18 14:00
조회
21
추천
4
글자
11쪽

13. 이루지 못한 꿈 (1)

DUMMY

루드비히는 벤치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잡담 덕에 술이 조금 깨는 것 같기도 하다.

“바람이 찹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쉬시지요.”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성전을 올려다보았다.

지은 지 백 년도 안 되어서 아직 관록이 조금 부족하지만 아름다운 건물이다. 건축가가 자신과 함께 싸워준 신전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만들어낸 인생의 역작.

“이 대성전 건물, 마음에 드세요?”

영빈관으로 발을 옮기면서 루드비히는 대성전을 올려다보았다.

“물론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자란 집이라는 걸 차치하고라도 아름답지요. 섬세하게 사제들의 생활 동선과 채광을 고려한 구조라 지내기도 편합니다. 소리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본당에서 설교를 할 때 같은 확성 마법을 써도 다른 성전과는 소리 울림이 전혀 다릅니다. 반대로 숙소와 영빈관은 방음이 철저하고 단열도 잘 되어 있지요.”

“···마력석은 지금도 쓰나요?”

“성전에서는 이제 쓰지 않습니다. 귀족들은 여전히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여전히 알력 싸움이 있겠군. 그렇다고 내가 그걸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카트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추기경은 귀족들을 경계하라고 보여준 기록이겠지만,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수기의 내용보다는 난독증이 없어졌다는 게 더 중요했지만, 역시 사명이 뭔지 빨리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초조했다. 전대 사도처럼 굉장하지는 않더라도 무언가 조금은 쓸모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그래. 오늘은 이상한 티를 많이 내지 않고 사람과 대화하는 데 성공한 걸로 만족하도록 하자. 나는 남들보다 많이 모자라니까, 많은 걸 바라면 안 되겠지···.


“일찍 들어오셨습니다.”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알베르토가 건네는 인사에 루드비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님이 들어가서 자라고 눈치를 줘서···.”

“그러게 적당히 마시··· 아, 그쪽은!”

발밑에 굴러다니던 남자가 엎드린 채로 갑자기 칼을 휘둘렀다. 루드비히는 칼을 피하고 남자의 팔을 발로 밟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비명을 지르려는 남자의 목을 소매에서 빼낸 단검으로 찍어 버리는 것까지 물 흐르듯이 해치운 뒤, 루드비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 덜 끝났군요.”

“보시다시피 하는 중 아닙니까. 그러게 사도님이랑 좀 더 놀다 오시지 왜 벌써 들어오셔 가지고.”

검게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남자, 법황의 비밀 경호대장 에드윈이 투덜거렸다. 다른 비밀 경호원들도 열심히 암살자들의 시체를 치우는 중이었다.

바닥의 또다른 시체를 뛰어넘어서 드레스룸으로 가면서 루드비히는 야회복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이젠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다. 흰 야회복에 피 튀기면 불편하니 야회복을 검은색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들 뿐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사도님 오신 뒤로 또 난리네요. 이러다가 대륙 암살자 씨를 말리게 생겼습니다. 물론 그건 좋은 일이지만 부담을 좀 나눠서 지면 좋겠는데···.”

알베르토가 시체 뒤처리를 감독하면서 중얼거렸다. 간도 작고 눈물도 많으면서 ‘일’이라고 인식하면 전투에서 시체 처리까지 전부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우는 부분이 진짜 신기한 성격이라고, 루드비히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선배는 어쩌다 저런 성격이 된 걸까.

“뒤로는 이러면서 사도님 피로연 열어 달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들은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에드윈이 중얼거리면서 루드비히가 죽인 남자의 목에서 칼을 뽑아 닦았다. 바닥을 적시는 피를 경호원 중 한 명이 마법으로 지워냈다. 에드윈은 그 꼴을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성하가 연회 갔다고 침실 경호를 안 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 사이에 암살자를 잠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암살 길드들은 자기끼리 실패 경험 공유 안 하나?”

안 하겠지, 그게 장사 밑천인데.

루드비히가 연회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는 암살자도 경호원도 얼추 사라지고 에드윈과 알베르토만 남아 있었다. 머리를 묶은 끈을 풀어 내리면서 루드비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번 배후는?”

“지난주 걔들입니다.”

“후작가에 아주 돈이 썩어나시네, 암살자를 매주 보내고. 그 돈으로 헌금이나 할 것이지.”

루드비히가 혼잣말로 투덜거리자 에드윈과 알베르토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잦아들 때쯤 루드비히는 알베르토를 돌아보았다.

“게오르그 대주교가 올라온다더군요.”

“다행입니다, 성하의 부름에 도망은 안 쳐서.”

“그쪽 교구 사제 건, 더 빠르게 진행 안 되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사도님의 증언이 피난 후의 대처 부분뿐이라, 에다 씨의 살해에 관한 부분이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살해 무기를 발견하긴 했어도 진위 여부도 말이 나올 테고요. 무기의 소유주를 증언해 줄 만한 행상이나 음유시인을 확보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신학교 시절 행적에서 수상한 게 나온 김에 적당히 증거가 쌓이면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확실할 겁니다.”

워렌인가 뭔가 하는 사제는 꼬리 숨기는 재주가 아주 탁월하신 모양이다. 그 재능을 왜 범죄에 낭비하는지. 에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밝혀주고 싶은데 이쪽도 영 안 풀린다.

루드비히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알베르토가 피가 튄 이불을 걷어 내면서 물었다.

“사도님은, 오늘은 좀 괜찮으시던가요?”

“···뭐, 여전히 소심하고 여전히 불경하시지요.”

루드비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웃었다.

랜덤 기도라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사람이다.

“전대 사도님의 수기 때문에 좀 주눅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아, 사도님 치료할 때 신성력이 과다 소모되는 현상, 비슷한 사례 나왔답니까?”

“없습니다. 콘라드 예하의 의견으로는 역시 신체 구성 자체가 평범한 인간과 다른 것 아니겠냐던데요. 나중에 기회 되면 머리카락이나 피를 받아서 확인해 보고 싶으시다고.”

머리카락은 둘째치고 피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아니, 본인에게 달라면 질색하면서 주긴 하려나.

“그러고 보니 성하. 게오르그 대주교, 처분은 어떻게 될 예정입니까?”

에드윈이 벽에 기대서며 말을 건넸다. 루드비히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직위 강등은 피할 수 없겠지요. 대성전에 남을 수도 없을 겁니다. ···파문을 면한다고 해도 어딘가의 지방 성전이나 수도원에서 속죄 노동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한 20년쯤 중앙에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후우. 에드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교좌에 부임할 후임을 정해야겠군요. ···이거 잘못하면 신학교 동기 중에 성하하고 저만 남겠습니다?”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신학교 동기가 또 한 명 사라진다.

···그러게 도움이 필요하면 진작에 말할 것이지. 이렇게 일이 커지기 전에 우는 소리라도 한번 해 볼 것이지. ···아니다. 진작에 잘 지내냐고, 도와줄 건 없냐고 한마디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미 늦었다.

자신에게 자격이 있든 없든, 옛 친구는 법황의 이름으로 처벌받아야 했다. 그것이 신의 뜻이고 교단의 질서다.

루드비히는 쓰린 속을 누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꾸했다.

“우리 동기는 원래도 인원 적었잖습니까. 한 열 명 됐던가. ···아, 이번 희사령에 몇 명쯤 파문이 철회되면 조금 늘어날 수도···.”

“동기에 위아래 3년쯤 합쳐도 파문 철회됐을 때 제가 환영할 수 있는 건 엘피에라 하나뿐입니다, 성하. 나머지 비겁한 새끼들은 동기든 말든 알 바 아닙니다.”

“에드윈 경, 말씀이 과하십니다. 그래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우들이고,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 주셔야···.”

알베르토가 조심스럽게 지적했지만 결국 말꼬리는 흐려졌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봤자 개새끼는 개새끼고, 겁쟁이는 겁쟁이였다.

루드비히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길 잃은 어머니의 아이들이 돌아온다면··· 환영해야지요.”

그리고 이마에 가죽 장갑이 닿았다. 루드비히는 다시 눈을 떴다. 에드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찍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에 없는 말, 계속하다 보면 그게 진심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저하고 알베르토 선배밖에 없을 때 정도는 입발린 소리 안 하셔도 되잖습니까.”

차라리 진심이 된다면 다행이다. 뒤집히는 속을 숨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루드비히는 이마에 닿은 손을 치우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물병을 가리키자 알베르토가 급히 협탁으로 다가갔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한테 존댓말은 안 쓰고 있겠지요? 에드윈 경.”

법황의 신학교 동기이자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남자는 혀를 찼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역시 성하는 사도님하고 친구가 되는 게 좋겠습니다. 애인이 되는 것도 좋고요.”

“왜 이야기가 거기로 튑니까.”

“저희 같은 신자들은 법황 성하라는 지위를 무시하기가 힘드니까요. 사도님 같은 불신자면 오히려 성하의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편해질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이 속마음 털어놓을 친구가 셋은 있어야 한다지 않습니까.”

알베르토는 물병과 컵에 피가 튀지 않은 걸 꼼꼼히 확인하고 물을 따라 내밀었다. 칼칼했던 목이 조금 편해지면서 물을 꼭 마시라고 당부하던 사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흔들리지 말자. 신께서 길을 인도해 주실 테니까.

카트리야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을 믿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드비히는 고작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신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침이 되면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 언제나 신은 자신을 인도해 주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법황 성하. 부디 이 죄인을 용서치 말아 주시옵소서···.”

부들부들 떨면서 응접실 바닥에 엎드린 남자의 뒷통수를 루드비히는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야, 루드비히, 나 부탁이 있는데.

-뭔데?

-우리 치유소에서 실습 같이 하잖아. 실습 보고서 내가 대신 써 줄 테니까 내 해부 좀 대신 해 주면 안 돼?

쭈뼛쭈뼛 말을 걸던 주근깨 많은 소년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말에 비명을 지른 게 에드윈이었던가 엘피에라였던가.

-우와, 이 양심 없는 놈! 너 언제까지 해부 피해 다닐 거야? 그래 놓고 치유소 수료가 되겠냐?

-1년만 더 있으면 되잖아, 그리고 나 필경소 지원이거든?! 나 피 보면 정신 못 차리는데 그럼 우리 조 전부 성적 떨어진단 말이야. 루드비히, 넌 피 잘 보잖아, 응? 내가 진짜 보고서 깔끔하게 잘 써줄게, 맞다, 청소도 대신해 줄게! 야아아~~~!!!

결국 나란히 복도에 손들고 벌을 섰다. 게오르그의 글씨가 너무 예뻐서 스승님들이 아무도 속지 않았기 때문에.

치유소 수료 없이 종신 사제 시켜 달라고 칭얼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아른거리는데.

“오랜만입니다, 게오르그 대주교.”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그것 뿐이었다.


작가의말

일단 쓴 다음 지우면서 정리하는 타입이라 웹소설 연재는 좀 안 맞는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습니다. 퇴고하면 분명히 20% 정도 줄어들 텐데 지금은 도저히 줄일 부분이 안 보이는군요.. 슬프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주기 공지 24.10.09 56 0 -
79 21. 불행의 편지 (2) NEW +2 5시간 전 6 2 11쪽
78 21. 불행의 편지 (1) +2 25.01.13 8 2 11쪽
77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2 25.01.12 9 2 11쪽
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14 2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15 2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14 2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15 2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15 2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15 2 11쪽
70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2) +2 24.12.30 18 2 11쪽
69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1) +2 24.12.29 14 2 11쪽
68 18. 탕녀 엘피에라 (5) +2 24.12.28 20 4 11쪽
67 18. 탕녀 엘피에라 (4) +1 24.12.27 18 3 11쪽
66 18. 탕녀 엘피에라 (3) +2 24.12.25 18 3 11쪽
65 18. 탕녀 엘피에라 (2) +1 24.12.23 18 3 11쪽
64 18. 탕녀 엘피에라 (1) +1 24.12.22 15 3 11쪽
63 17. 요정의 밤 (5) +1 24.12.20 19 3 11쪽
62 17. 요정의 밤 (4) +2 24.12.18 22 2 11쪽
61 17. 요정의 밤 (3) +2 24.12.16 23 3 11쪽
60 17. 요정의 밤 (2) +1 24.12.15 18 3 12쪽
59 17. 요정의 밤 (1) +2 24.12.13 21 3 11쪽
58 16. 눈가리개의 나라 (4) +1 24.12.11 26 2 12쪽
57 16. 눈가리개의 나라 (3) +2 24.12.09 21 3 11쪽
56 16. 눈가리개의 나라 (2) +2 24.12.09 18 3 11쪽
55 16. 눈가리개의 나라 (1) +1 24.12.08 20 3 11쪽
54 15. 첫인상의 중요성 (5) +2 24.12.06 20 3 11쪽
53 15. 첫인상의 중요성 (4) +1 24.12.04 21 3 11쪽
52 15. 첫인상의 중요성 (3) +2 24.12.02 22 3 11쪽
51 15. 첫인상의 중요성 (2) +1 24.12.01 21 3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