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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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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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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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루지 못한 꿈 (3)

DUMMY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길을 잃지 않고, 무너지는 동료들을 일으켜 세우는 루드비히는 희망이었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은 전투와 거리가 먼 화제를 만들어 주곤 했다. 때로는 농담으로 사람을 웃기고, 때로는 발길질로 헛소리를 멈췄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달래고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루드비히가 곁에 있을 때는 인간이 인간으로 버틸 수 있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밤을 보내다가 그 청아한 기도와 찬송을 듣고 정신이 돌아온 게 몇 번이었던가.

마지막 전투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신께서도 루드비히를 인정해 주셨으니까, 그러니까 됐다고. 이제 다 끝났다고.

사실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는데.

“···그러니 저도 루드비히의 손을 잡아 주었어야 했는데, 제가, 그러지 못했습니다···.”

신의 사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게오르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턱을 고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렇군요. 전쟁이 엎어진 물이라면, 그러면 안 되지만···. ···그런가, 사람들한테는 성하를 보내 줬다···. ···병 주고 약 주는 거 같긴 한데···.”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다가, 무언가를 헤아려 보다가. 혼자서 생각에 빠져 있던 사도는 술잔이 두 번 더 비었을 때쯤에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성하한테는 뭘 보내 주셨던가요?”

갈색 눈동자는 순수한 의문과 노골적인 기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 사람한테도 뭔가 해 줬겠지? 그렇지?

게오르그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세계수를···.”

“···고작?”

세계수의 기적이 왜 고작인가. 게오르그는 흠칫했다.

하지만 사도는 팔짱을 끼고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 신음했다.

“정당한 보수까진 아니라도 이벤트로 때우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 전멸기 발동이 보상인가···.”

···이벤트와 전멸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불경한 말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게오르그가 슬그머니 콘라드의 눈치를 보자 늙은 추기경은 웃으며 사도에게 술잔을 들어 보였다.

“어쩌면 어머니께서 성하를 위해 보내주신 안배가 다 어긋나서 사도님까지 보내주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사도님은 성하하고 친하게 지내 주셔야 합니다.”

사도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 세계엔 사람 나이 30 넘어서 새 친구 만드는 건 기적에 가깝다는 말이 있는데 말이죠.”

“이미 강림의 기적이 임하셨으니 문제없겠군요. 그러니 성하 괴롭히지 말고 친하게 지내십시오.”

콘라드가 엄숙하게 말하고, 사도와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게오르그는 무엇이 웃겼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님이, 루드비히··· 법황 성하 편에 서 주시면 좋겠습니다.”

없는 용기를 그러모아서 게오르그는 조그맣게 말했다. 떨리는 손을 맞잡고 기도하듯이 중얼거렸다.

“귀족들이 사도님을 회유하려고 할 테지만, 저희가 사도님께 더 잘 해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노력할 테니 부디··· 성하 곁에 계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그래 보여도, 외로움이 많은 분입니다···.”


똑똑똑.

침대에 들어가려고 이불을 젖히던 루드비히는 문가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가 묘하게 정중하다. 두드리는 방식도 낯설었다.

한 손에 단검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문 앞에는 신의 사도가 서 있었다. 한 손엔 술병을, 다른 손엔 과일이 담긴 작은 망을 들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는다.

“배달 왔습니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닫으려는데 카트리야가 급히 어깨로 문을 밀었다.

“아, 진짜! 길 몰라서 물어물어 찾아왔는데 매정하게 이러시긴가요?!”

길을 모르면 본인 방에 가서 자야지 왜 술까지 챙겨서 여길 오시냔 말입니다.

루드비히는 속으로 한탄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카트리야가 들고 있는 술병을 받아 라벨을 확인하고 살짝 인상을 썼다. 자신들이 신학교에 입학한 해에 담은 위스키였다. 보통 추기경이 되었을 때 축하주로 마시는데, 누가 이제는 마실 가능성이 없어진 게오르그의 축하주를 뜯은 모양이다. 참고로 루드비히의 축하주는 정반대의 사유로 열지 못한 채 어딘가에 파묻혀 있었다.

“이런. 여기 응접실이 아니네요? 끝에서 세 번째랬는데···.”

카트리야는 루드비히 뒤쪽의 침대를 발견하고 양옆의 문을 세어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끝에서 다섯번째 문이다.

“콘라드 예하께 술은 감사히 받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시간이 늦었고 전 내일 새벽 예배가 있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전 아직 누가 보낸 술인지 말을 안 했는데 어찌 아시는지.”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영빈관 ‘안뜰’은 말 그대로 안뜰이라 모든 건물에서 내려다보인다. 게오르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그중 몇 명이 게오르그를 두들겨 패는 것도 전부 보고 있었다.

자신이 낄 자리는 아니었다.

카트리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피리 부는 사나이’께서는, 옛 친구가 곧 떠난다는데 한잔하실 생각 없으신가요? 제가 위로는 못 해도 이야기를 들어는 드릴 수 있는데요.”

“전 피리를 안 붑니다만.”

“좀 사연이 있는 단어예요. 불법 임금 체불과 아동 납치 및 징병이 혼합된 슬픈 이야기죠.”

루드비히는 한숨을 내쉬고 술병을 노려보았다. 지금 누워봤자 잠은 못 잘 텐데···.

“제가 잠옷 차림인 건 신경 안 쓰이십니까?”

갈색 눈이 루드비히의 옷차림을 스윽 훑었다.

깃 없이 대충 목선만 파인 셔츠는 얇아서 속이 살짝 비쳤다. 바지는 속이 비칠 정도는 아니지만, 벨트 대신 허리에 넣은 띠로만 대충 여미게 되어 있는 매우 민망한 차림새였다. 보통은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피해줄 텐데, 카트리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브이넥 긴팔에 파자마 바지면 무난한 것 같은데···. 그, ···부끄러우시면 뭐라도 걸치시겠어요?”

안 통하는군.

루드비히는 창문을 힐끗 보았다.

···그래, 까짓거 마시자. 어차피 남들도 다 마시고 있으시니 새벽 예배에서 설교 좀 꼬인다고 눈총받을 일도 없겠지.

“이런 날 저한테 술을 들고 오셨으면, 법황이 체통 없이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을 각오는 있으신 거겠죠?”

마지막으로 겁을 주어 보았지만 카트리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는 포기하고 침실 옆의 응접실 문을 열어 주었다.


루드비히는 술잔을 꺼내고 안주를 차리느라 왔다 갔다 하면서 어깨 너머로 사도를 힐끗 보았다. 창가의 필기대를 구경하는 카트리야는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요즘 좀 기운을 차린 것 같은데, 혹시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뭔가 도움이 되는 걸까.

“어린이집은 어떻습니까?”

카트리야는 펜을 구경하던 자세 그대로 잠깐 굳어졌다. 그리고 가라앉은 눈만 스윽 돌려 루드비히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물의 소굴이었습니다.”

아닌가 보다. 반대로 가서 알베르토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아무래도 저따위가 그 아이들하고 반역을 일으키기는 힘들겠더라고요. 베일은 어떻게든 사수하겠습니다.”

“베일을··· 건드리던가요?”

“‘베일 언니’한테 말을 걸고 싶은데 베일을 쓰고 있으면 말을 못 거니까 베일을 벗기자, 라네요. 그곳 사제님이 그거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하시는데··· 안 들어서···.”

진짜로 베일을 건드리면 안 되는 손님 전에 예행연습이 되겠군.

루드비히는 속으로 비브리다 추기경의 혜안에 감사했다.

“음식을 먹을 때 말고는 단 한 순간도 입을 다물지 않고, 전원이 제자리에 앉아 있는 꼴을 볼 수가 없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가 울고 있고, 우는 아이가 늘어나면 물건이 날아다니기 시작해요. 요전 날엔 공 대신 아기를 집어 던지면서 놀다가 다 같이 복도에서 벌을 섰어요. 아기는 하늘을 날았다고 신나 하는데··· 문틀에 머리부터 박을 뻔한 걸 샐비어 경이 겨우 받아냈는데···. 저희 같은 어른들은 도저히···.”

점점 고개를 숙이더니 마지막엔 머리를 감싸 쥐고 필기대에 엎드려 버렸다.

말만 들어도 무슨 아수라장일지 눈에 선했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에게 술잔을 건네주었다. 카트리야는 고개도 들지 않고 술잔을 받아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첫 잔을 단숨에 비우자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올라왔다. 반대로 카트리야는 입술만 적시고는 술잔을 기울여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왜요, 술은 싫어하십니까?”

루드비히는 다시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런 것치고 술 향기나 색을 확인하는 건 술에 익숙한 느낌이다.

카트리야는 잔을 흔들면서 낮게 웃었다.

“전엔 꽤 잘 마셨는데···. 그러는 성하는 어째 자세가 각이 잡히셨는데,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처음 술 마신 게 언제셨나요?”

“처음이요? ···아마··· 여섯 살?”

카트리야의 눈과 입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루드비히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등받이에 팔을 얹으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 따라 밭일 나가면 우유술을 한 모금씩 얻어 마셨었죠. 별로 맛은 없었지만, 일꾼 취급을 받는 게 좋아서요.”

“···여긴 미성년자 금주가 없구나?!”

“그럼요. 신학교는 일단 음주 금지였는데, 에드윈이라고 부엌을 정말 잘 터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 숙소에는 항상 술병이 서너 개쯤 숨겨져 있었지요. 그 숙소에 몰래 찾아가는 친구가 많았습니다.”

“성하도요?”

“같은 방이라 찾아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카트리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루드비히도 다리를 꼬면서 웃었다. 

“게오르그도 같은 방에, 그렇지, 제 윗침대였거든요. 누워 있다 할 말이 생각나면 침대 바닥을 걷어차서 불렀는데 어찌나 짜증을 내던지. 그 녀석은 피 보고 기절하지 않는 데만 거의 3년 걸렸습니다. ···그래서 참전은 안 할 줄 알았는데.”

“혼자 남기는 싫으셨다더군요.”

“······웃기지요, 사람이 고작 그딴 이유로 목숨을 걸 수 있다는 게.”

소외감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을 루드비히는 그때 알았다. 입맛이 쓰다.

“전장에선, 도움이 안 되던가요?”

“그럴 리가요.”

루드비히의 눈이 살짝 그리운 빛을 머금었다.

“전장 어딘가에 친구가 있다는 게, 그것도 살아 있다는 게··· 저는, 든든했습니다.”

전장에서 싸구려 술을 들고 달빛 아래에 모여 앉아 떠들던 시절 같은 기분이었다.

카트리야는 두서없이 떠올리는 옛날 추억들을 즐겁게 들어 주었다. 근거 없는 원망이나 푸념을 늘어놓을 때도 그냥 맞장구를 쳐 주었다. 상대가 아무것도 몰라서 나오는 반응인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긴 소파에 옆으로 돌아앉아 다리를 편하게 올리고 반쯤 누웠을 때는 밤은 깊고 술병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대부분은 루드비히가 마셨다.

“신께서 제게 뭘 주셨냐고요? ···육신과 영혼? 세계?”

“조금 더 성하 개인에게 한정된 건요? 세계수의 기적 같은?”

루드비히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럼··· 신성력과···. ···얼굴··· 일까요···?”


작가의말

본인 얼굴에 자만심은 없으나 객관적 수준은 인지하고 계신 법황 성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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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65 성잔화
    작성일
    24.11.20 14:09
    No. 1

    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 잘생기게 태어난 것도 개인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면 축복이지 ㅋㅋㅋ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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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21 3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20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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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21 3 11쪽
70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2) +2 24.12.30 22 3 11쪽
69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1) +2 24.12.29 20 3 11쪽
68 18. 탕녀 엘피에라 (5) +2 24.12.28 24 5 11쪽
67 18. 탕녀 엘피에라 (4) +1 24.12.27 23 4 11쪽
66 18. 탕녀 엘피에라 (3) +2 24.12.25 22 3 11쪽
65 18. 탕녀 엘피에라 (2) +1 24.12.23 23 3 11쪽
64 18. 탕녀 엘피에라 (1) +1 24.12.22 19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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