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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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1.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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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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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4. 식물 인간 (4)

DUMMY

상식적으로 가장 당황해야 할 신의 사도는 매우 태연해 보였다. 

“어차피 제 상태를 파악하기 전에는 장기적인 계획은 세울 수 없을 테니까···.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전 이만 제 침실로 돌아가 보고 싶은데··· 요···?”

알베르토가 옆에 있는 에드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 경호대장이 길을 알려 드릴 겁니다. 다른 분들도 혹시 시간이 되시면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서 자문회의 구성에 협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문보다 심의회가 우선입니다, 성하.”

칼레는 포기하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잠깐 카트리야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당황해서 새벽 예배를 반쯤 날려 먹은 걸로 충분했다. 정신 차려야지.

“심의회 안건은 옆쪽 응접실에서 듣겠습니다. 비브리다 예하, 자문회의 인선과 사도님의 시종 사제 추천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명단을 올려 주시면 최우선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비브리다 추기경은 여전히 조금 서늘한 눈으로 카트리야를 한 번 더 바라보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감히 신의 사도의 알몸을 주기적으로 검사할 시종 사제로 선정된 것은.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도님.”

루치아였다.

해맑게 웃는 금발의 전투 사제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좀비일 때 빨래를 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꼼꼼하게 잘 씻어 줬었지···. 이제 와서 알몸을 또 보여봤자··· 근데 그건 내 몸이 아니었잖아···.

“···저어, 사도님?”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어 버린 사도를 보고 루치아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긴장했다. 그간 호위를 섰던 샐비어와 헤이즐에게서는 ‘여전히 활동량이 적고 무덤덤한 사람이다, 가끔 우울해하는데 괜히 말 걸면 더 우울해졌다가 짜증냈다가 하는 것 같으니 그냥 모르는 척 놔둬라’, 같은 주의사항을 들었다. 대성전의 비브리다 추기경은 신의 사도가 불신자라는 무서운 기밀을 알려 주었다. 어쩐지 샐비어도 헤이즐도 말을 하다 갑자기 침묵하더니 ‘가면 알겠지’라고 위로를 해 주더라니만···.

루치아도 불신자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카트리야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 그렇겠지.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지 한··· 보름? 됐나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예, 덕분입니다. 오늘부터 사도님의 시종 사제로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미숙한 점도 많겠사오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뻣뻣하게 각이 잡혀 있던 루치아는 한 시간쯤 뒤에는 예전처럼 사근사근해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카락과 잎의 길이를 재고, 카트리야의 몸 나머지 부분에 이상이 없나 확인도 해서 꼼꼼히 일지에 적어 내려갔다. 카트리야에게 숫자 적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거울로 머리를 구경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했다.

기사단의 근황도 전해 주었다. 코린이 드디어 쿠키의 개 목걸이를 고쳤다거나, 제이크가 신의 사도 이야기를 해 달라는 친척들에게 시달리다 휴가를 하루 만에 반납하고 복귀했다거나, 샐비어와 헤이즐이 뒤늦은 휴가를 떠났다거나 하는. 기사단의 정식 명칭이 ‘성 체칠리아 기사단’인 걸 드디어 알았다.

“그럼 루치아 사제님은 휴가를 아직 안 받으셨나요?”

덩굴이 아닌 부분의 머리카락을 묶어 보려던 루치아가 멈칫했다. 그리고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게···. ···음, 이번 원정으로 제 부족함을 깨닫고 휴가 대신 치유소 근무를 신청해서, 잠시 그곳에 있었습니다.”

쉬지도 않고 뭘 하고 있었다고?

카트리야는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그런 줄 알았으면 인사 겸 치유소를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을. 매번 콘라드나 루드비히가 침실까지 왕진을 와 줘서 치유소에 가 본 적이 없다.

“새벽에는 본당 연무장에서 전투 훈련도 받고 있고요. 오며 가며 혹시 뵐 수 있을까도 했는데···.”

루치아는 더더욱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카트리야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새벽에··· 일어나질 않지요···. 방 밖에 나가지도 않고··· 연무장이 있는 줄도 몰랐군요···. ···아니.

“도대체 대성전에 왜 연무장 같은 게···?”

“친위대 숙소 겸 훈련장입니다. 영빈관에서는 어린이집보다 더 가까울 텐데요. 부담이 되지 않으시면 한번 구경 가 보시면 기분 전환이 되실 지도요? 사실은 새벽에 가는 걸 추천드리지만···.”

“굳이 새벽에···?”

본인이 훈련을 계속하고 싶다는 말인가? 나한테 눈치를 주는 건가? 내가 지금 눈치껏 ‘매일 새벽에 연무장에 산책을 갈 테니 훈련하고 싶으면 계속하세요’라고 대답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카트리야는 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루치아는 멋쩍게 얼굴을 붉혔다.

“새벽에는 성하도 간간이 훈련에 참여하셔서···. 새벽 예배 집전 안 하시는 날에, 안 바쁘시면요.”

······맞다, 법황 팬이었지······.

카트리야는 좀비일 때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법황 찬가를 떠올리고 낮게 웃었다. 얼굴을 붉히는 루치아는 외모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 같았지만, 내용물은 열 살 이상 어렸다. 그래선지 꽤 귀여워 보였다.

“제 시종 사제가 되었으니 성하를 직접 만날 일도 많겠네요?”

“그, 그렇긴 하겠지요! 제가 감히 성하께 말을 붙일 수는 없겠지만, 가까이서 뵐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라···!”

진짜로. 귀엽다.

카트리야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루치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도님, 다시 웃어 보실래요?”

“어? 아니, 시키면 웃기가 힘든데···.”

“······방금 이파리가 좀 흔들린 것 같았는데요···.”

웃느라고 내 머리가 흔들려서 흔들린 게 아닌가.

카트리야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 보았다. 루치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뭔가 느낌이 달랐는데···. ···제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으니까요. ···세계수 덩굴이 은색이 아니면 아직 덜 자란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별로 신경이 안 쓰였다. 카트리야는 다시 루치아 놀리기를 시도했다.

“성하가 좋으면 고백이라도 해 보지 그래요.”

“···저따위가 어찌 감히···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한다면 나쁠 건 없겠지요? 성하께 그렇게 고백하는 여자야 셀 수 없이 많으니까요.”

좋아하는 게 아닌 건가? 그렇게 찬양하면서?

의문에 찬 눈빛을 받고 루치아는 부끄러운 듯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고개를 흔들어 보느라 헝클어진 카트리야의 머리카락을 빗어서 리본으로 묶으면서 조용히 설명했다.

“···성하는 아마 기억도 못 하시겠지만··· 그, 성하께서 제 가족들의 목숨을 구해 주셨거든요. 전쟁 때, 제가 후방 지원 부대로 일하느라 가족들하고 떨어져 있었는데, 고향을 언데드가 습격해서··· 때마침 근처에 있던 성하의 부대가 저희 마을을 지켜 주셨어요. 가족들이야 어느 부대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잘생긴 금발 사제님이 숨이 넘어간 사람까지 되살려냈다고 하면 뭐···.”

“우와, 뻔하네요.”

“뻔하지요?”

카트리야와 루치아는 낮게 웃었다.

전쟁터에서 사람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쉽지 않은데 그걸 해낸 데다가 부활을 쓸 수 있었다면 후보는 극도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부끄럽지만 전 그때 사제직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내가 지금 남을 살리려고 할 때인가, 내 가족들부터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런데 성하께서 제 가족들을 구해 주셨다는 말을 듣고, 아,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거구나, 내가 여기서 사람들을 돕는 만큼 다른 누군가가 내 가족들을 돕겠구나, 싶어서···. 그럼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종교인 감성이었다. 하지만 추기경들의 간곡한 부탁을 떠올리고 카트리야는 조용히 혀를 단속했다.

난 남을 구해 줬는데 내 가족들이 희생당해 버리면 어쩔 거냐, 같은 말은 하면 안 되겠지.

“사실은 등가교환이 아닌 걸 아는데도 말이죠.”

그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루치아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런데도 왠지 안심이 되어서···. 그러니까 말하자면, 성하는 제가 신을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신 분이라고 할까요? 제 영혼의 은인? 물론 매력적인 남성이시기도 하지만, 그런 쪽으로는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들을 가까이에서 보필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일 테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 중이랍니다.”

오. 성욕이 아니라 출세욕이었나. 루드비히가 법황이 아니었다면 좀 더 이루기 쉬운 꿈이긴 했겠다.

“사도님은, 성하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하셨죠?”

“만티코어 때 말고는요.”

“그럼 한번 구경하러 가 보시겠어요? 구경꾼이 좀 있겠지만, 사도님은 친위대 대기소에서 편히 보실 수 있을 테니까···.”

‘사람이 대여섯 명만 넘어가도 금방 지친다, 어린이집에 반나절 다녀오면 거의 앓아눕는다’는 인수인계를 떠올리고 루치아는 최대한 사람이 적은 동선을 구상해 보았다. 일반 신도들이 갈 수 없는 루트로 살살 움직이면 꽤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법황의 스케줄도 공유가 될 테니까.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루치아는 문득 사도의 머리카락 끝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살짝만 다듬으면 훨씬 단정해질 것 같은데, 조금만 잘라 드려도 될까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요?”

“편하신 대로요.”

카트리야는 무심히 대답했다. 머리카락은 어차피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감각도 달라지지 않아서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비브리다 추기경에게 맞은 등짝이 여전히 조금 얼얼했지만, 그리고 예전에 루드비히도 격분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몸이니 소중히 하자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자르든 덩굴이 되든, 거울이 없을 때는 보이지 않으니까.

루치아는 가위를 가져와서 머리카락 끝을 다듬었다. 그것을 보다가 카트리야는 머리 꼭대기를 가리켰다.

“혹시 덩굴도 자를 수 있나 한번 잘라 볼까요?”

“예?!”

루치아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온몸이 굳어졌다.

“세계수를··· 이발··· 하시겠다고요···?”

“가지치기···? 아니면 새순 따기?”

죽인 식물이 많아서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원예 지식도 애매하게 많았다. 어릴 때 순을 잘 따면 싹이 풍성하게 난다고 했는데, 신중하게 순을 따는 족족 식물들이 죄다 죽어 버리곤 했었다. 그럼 지금 머리에 달린 나뭇잎을 따면 세계수는 죽을까 잎이 세 개쯤 날까. 궁금하지 않은가.

보는 사람 없는 지금이 잘라 볼 기회 같았다.

루치아는 가위를 품에 끌어안았다. 뺏기면 곤란하다는 듯이.

“하지만 세계수인데요···?”

“사제님, 잘 생각해 봐요. 제 머리카락이 세계수 덩굴로 변해가고 있잖아요? 그럼 제 몸체는 세계수가 아닐까요? 그럼 제가 덩굴을 자르고 싶은 건 사실 세계수한테 덩굴치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된 기분이 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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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15 2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14 2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15 2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15 2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15 2 11쪽
70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2) +2 24.12.30 18 2 11쪽
69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1) +2 24.12.29 14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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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18. 탕녀 엘피에라 (4) +1 24.12.27 18 3 11쪽
66 18. 탕녀 엘피에라 (3) +2 24.12.25 18 3 11쪽
65 18. 탕녀 엘피에라 (2) +1 24.12.23 18 3 11쪽
64 18. 탕녀 엘피에라 (1) +1 24.12.22 15 3 11쪽
63 17. 요정의 밤 (5) +1 24.12.20 19 3 11쪽
62 17. 요정의 밤 (4) +2 24.12.18 22 2 11쪽
61 17. 요정의 밤 (3) +2 24.12.16 23 3 11쪽
60 17. 요정의 밤 (2) +1 24.12.15 18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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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16. 눈가리개의 나라 (4) +1 24.12.11 26 2 12쪽
57 16. 눈가리개의 나라 (3) +2 24.12.09 21 3 11쪽
56 16. 눈가리개의 나라 (2) +2 24.12.09 18 3 11쪽
55 16. 눈가리개의 나라 (1) +1 24.12.08 20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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