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첫인상의 중요성 (1)
루치아는 해괴한 논리에 뭔가 설득당했는지 갈등하는 표정으로 가위와 머리카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카트리야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을 때.
“···그··· 그렇지만···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성하께, 하다못해 예하께···! 허락받고 오겠습니다!”
루치아는 가위를 끌어안고 번개같이 도망쳐 버렸다.
뒤늦게 허공을 움켜쥔 손을 내민 채 열린 문을 쳐다보며 굳어 있기를 잠시.
카트리야는 주섬주섬 옷자락을 정리하고 편한 의자로 옮겨 앉았다. 남은 오후는 또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으니 편한 자리를 미리 잡아 두고 싶었다.
예상대로 알베르토는 세계수가 교단에 가지는 상징성과 위의에 대해 긴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잎을 따는 건 좀 그렇지만 새 덩굴 끝은 잘라도 좋겠습니다.”
허락은 해 주었다.
“···알베르토 님, 정말··· 이래도 될까요···?”
루치아가 떨리는 손으로 가위를 들면서 불안한 듯 물었다. 알베르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사도님이 세계수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가정해 보기로 했으니까요. 사실 세계수가 외부 충격을 얼마나 버티는지 확인해 둘 필요도 있고, 뭐, 생장에 영향이 없을 정도로 아주 살짝만 잘라 보지요.”
루치아는 마른침을 삼키고 가윗날을 벌렸다. 카트리야는 무릎 근처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를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잘라내면 물꽂이를 시도해 보고 싶다.
머리 위에서 찰칵,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적.
다시 찰칵.
정적.
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잠시만, 뭐야, 무서워!!!
“진정하세요, 루치아 사제! 일단 가위 내려놓으시고!”
알베르토가 급히 루치아를 말렸다. 루치아는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뒤로 물러서며 가위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 용서를 비는 기도를 시작했다.
카트리야는 알베르토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받고 알베르토는 쓴웃음을 지으며 떨어진 가위를 집어 들었다.
카트리야의 머리 위에서 다시 찰칵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알베르토는 조용히 가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 잘립니다.”
그게 루치아가 갑자기 엿장수에 빙의한 데 대해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가?
비난 어린 눈빛을 받고 알베르토는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하, 하고 맥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가윗날이 닫히기 직전에 덩굴이 투명해지면서 사라집니다. 아침에 콘라드 예하가 사도님의 머리카락을 만지려고 할 때는 피할 자리가 없어지니까 머리카락으로 돌아갔거든요. 그런데 뿌리··· 그러니까 두피 쪽이 아니라 그런지 그냥 없어지네요. ···저희 세계의 물질로는 위해를 가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신성력에 타격을 입지도 않았으니 남은 건 마법으로 머리카락을 공격해 보는 정도였다. 그건 머리카락을 공개한 후에나 가능한 실험이었다.
카트리야는 손을 뻗어서 덩굴 부분을 더듬어 보았다. 돌돌 말린 부분이 잡혔다.
“혹시 다시 나타났을까요?”
“예, 루치아 사제가 조금 굵은 덩굴도 가위를 대 보았는데 그쪽도 사라졌다가 바로 나타났습니다.”
도망치다가 피할 자리가 없으면 머리카락으로 돌아가거나 없어진다, 라···.
카트리야는 손가락에 덩굴을 빙글빙글 감았다. 알베르토가 한순간 늦게 뛰쳐 일어났지만, 알베르토가 말리는 것보다는 손을 잡아당기는 게 빨랐다.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안 뽑히네···.”
“제발··· 제발 귀하신 몸을 좀 소중히···!”
“···머리카락으로 돌아가서 뽑혀 나오려나 하고···.”
머리카락 여럿을 뽑을 각오로 꽤 힘을 줘서 당겼는데. 머리가 욱신거렸다.
카트리야는 두피 부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식물 덩굴보다는 냉면 면발 같은 감촉이라서 최소한 중간에 끊길 줄 알았다. 두피 쪽은 머리카락과 비슷하지만, 더 현재적 존재에 가깝고 끝부분은 반쯤 다른 세상의 물질인 모양이다.
···그런 식이라면···.
“알베르토 사제님. 저 진심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하문하시지요.”
“···머리는 어떻게 감죠? 세계수에 비누칠해도 될까요?”
잠시 후 알베르토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맞잡았다. 어머니에게 계시를 갈구하는 것일까.
아니, 하지만 들어 봐, 이 신앙인들아.
“덩굴로 안 변한 부분은 여전히 제 머리잖아요. ‘신의 사도는 며칠 동안 머리를 안 감았다’ 같은 기록을 일지에 남기는 건 체면상 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쓸데없는 말이었나, 하는 생각에 카트리야는 조금 주눅이 들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침에 추기경들 앞에서 자문회의 초안을 제시한 것도 잘난 척이 심했다. 한 시간쯤만 기다리면 추기경들도 진정한 다음 비슷한 제안을 했을 텐데,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나대 버렸다. 루치아한테도 말실수를 했을지도 모르고, 지금 알베르토한테도 그렇고···.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근거 없는 공포를 이성으로 눌러 담는 데 또다시 하루가 넘게 걸렸다.
잔머리 약간을 제외한 머리카락 전체가 덩굴로 변할 때까지는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다. 무슨 자체 정화라도 되는지 머리는 감을 필요가 없어졌다. 약간 가벼워진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잎이 조금씩 늘어갔다.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다 보니 사도 강림 예배 때는 긴장을 할 기력조차 없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베일로 머리카락을 완전히 숨기고, 앞쪽은 베일을 젖혀 얼굴을 드러내고, 화사한 예식용 로브를 갖춰 입고,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사제용 출입문을 통해 제단에 발을 내디뎠다.
거대한 대성전의 본당 전체에서 탄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감격과 의심과 비웃음과 호기심과 가격을 따져 보는 시선이 걸음걸음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온몸을 훑어내리는 시선이 그저 따가웠다.
예행연습대로 제단 중앙의 제대 앞으로 걸어가서 정면의 귀족석을 바라보며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고개를 들어 2층의 신자석을 향해 세 방향으로 고개를 까딱인다.
시선 처리에 주의하면서 짧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신의 사도입니다, 환영해 주어서 고마워요, 여러분에게 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빕니다, 로 요약되는 내용이었다. 불신자 티는 나지 않지만, 종교인인 척 신자들을 우롱하지도 않는 선의 인사말을 다 같이 고민해 주었다.
돌아서서 제단 가장자리의 사제석에 앉는 걸로 카트리야의 역할은 끝이었다.
신의 은총에 감사하는 법황의 목소리가 본당에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집요한 시선은 대부분 신의 사도에게 쏠려 있었다. 특히 앞자리의 젊은 남자 귀족들은 예식이 진행되든 말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키득거리면서 카트리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루드비히가 때때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같이 온 귀족들이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저런 시선을 받는 일은 익숙하지만, 저런 시선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눈을 피하면 우습게 보아서 더 심한 짓을 한다. 카트리야가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남자들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이, 설교는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안 되겠다, 하고 옆자리의 칼레 추기경을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하얀 옷자락이 눈앞을 스치고 백합 향이 확 덮쳐 오더니 눈앞에 베일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모습이 흐려지면서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식이 들려왔다.
“사도님 몸이 약해서 외부 활동이 힘들다고 거짓말을 해 놓은 게 이럴 때 빛을 발하는군요.”
낮은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돌아보니 루드비히가 칼레 추기경의 반대쪽 옆자리에 걸터앉고 있었다. 왜 법황이 자리에 앉지, 를 생각하는 순간 장엄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가를 부르는 시간인 모양이다. 신자들도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트리야는 베일 너머로 입을 가리고 루드비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 얼굴을 보이는 게 오늘 예배의 목적 아니었나요?”
“사도님을 배알하는 영광을 제 발로 걷어차겠다는데, 저런 무례한 것들에게 보여 주기엔 아깝습니다.”
루드비히도 카트리야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베일 너머로 보이는 청회색 눈동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성가 사이로 여자들의 작은 환호성이 끼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칼레가 헛기침을 했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 쪽으로 숙였던 몸을 재빨리 바르게 세웠다. 그 대신 뒤쪽에서 비브리다 추기경이 몸을 굽혀 낮게 속삭였다.
“안색도 안 좋으신데 지금 퇴장해 버리셔도 됩니다. 저 젊은이들이 무례한 건 사실이라서.”
“얼굴은 다 기억해 놓았으니까요.”
칼레마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 헌금 얼마나 내는지 한번 보자, 고 덧붙인다. 헌금이 적으면 결코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카트리야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베일 덕분에 시야가 차단되면서 패닉이 가라앉았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러 통증을 만들면서, 카트리야는 차분히 눈을 내리깔고 심호흡을 했다.
달은 두 개였다.
그러니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있다. 귀를 믿을 수 있다. 판단력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시작은 내가 보고 들은 정보를 분석하는 것부터.
신이 보여준 광경. 신이 내려준 몸. 덩굴 식물로 변한 머리카락. 대성전의 사제들. 그들이 건넨 말. 흘린 말. 전대 사도의 수기. 오늘 이곳에서 처음 만난 평민과 귀족들의 반응.
신은 세계수를 이 땅에서 보살펴 줄 존재가 필요했다. 이번 신의 사도가 받은 사명은 고작 그것이었다. 죽지 않기. 그것을 위해 ‘신’은 무신론자 사도가 대성전의 보호를 받게 판을 짜 두었다.
그 신의 뜻을 받드는 사제들은 사도가 귀족의 편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사제들은 카트리야를 죽일 수도, 감금할 수도, 또는 불신자임을 밝혀 추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다정했다.
전대 사도는 평민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려고 귀족들에게 건물을 지어 주었다. 가난한 평민들은 전대 사도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귀족들은 신의 사도를 자신의 하인처럼 부리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런 자가 감히 자신들의 ‘이권’을 가로챈 것에는 분노했다. 법황까지 잃어가면서 그런 사도를 지켜주는 대성전을 우습게 보았다. 이번 대의 사도가 또 사고를 치도록 놓아두진 않을 것이다. 사제들이 귀족을 경계하듯, 귀족 역시 신의 사도를 놓고 대성전과 맞설 의지가 충분해 보였다.
나는 누군가의 신이 되고 싶지도 않고, 장난감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지난번 삶이 끝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삶도 목숨 따위가 아쉬워서 억지로 살 생각은 없다. 삶을 포기해 보았기에 나오는 선택지가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이 시점에선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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