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첫인상의 중요성 (3)

“근데, 저기, 조합장님이 지금 외출하셨는데···! 안쪽에, 그러니까 안쪽에 응접실이 있어서, 보통 거기서 기다리시는데요, 수석 방직공도 안 계시는데, 그런데 사도님처럼 높으신 분은 저희가 찾아뵈어야 하는데···!”
자신들을 오라 가라 해야 하는 높으신 분이 직접 찾아와 버리는 바람에 절차를 알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울상이 된 수습 소년을 보고 카트리야는 의미가 없어진 베일을 벗었다. 조합장을 불러오면 안 될 건 없지만 급한 일도 아니었다.
아이를 달랠 겸 가볍게 웃어 보이면서 작업실을 가리켰다.
“혹시 기다리는 동안 한 바퀴 둘러봐도 될까요?”
“···저희, 작업실을요···?”
수습 소년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곁에서 루치아가 조용히 덧붙였다.
“업무 감사나 시찰 아니야. 사도님은 정말로 구경하고 싶으신 거니까, 안에 들어가서 지금 있는 장인 중에 손 비는 분 하나 불러오렴.”
소년이 급히 작업실로 달려들어 갔다. 카트리야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제가··· 업무 감사나 시찰··· 을 할 입장이군요···?”
“직공소는 대성전에서 필요해서 만든 상업 구역이니까요. 이 거리는 전부 대성전에서 가게를 빌려서 영업하고 있거든요.”
“사도님은 대성전의 주인이시니 직공소의 모든 공방과 상점의 주인이신 셈이고, 그러니 당연히 감찰권이 있으시지요. 그 외에 계약 해지나 자산 압수, 강제 인력 차출, 임대료 인상 같은 것도 요청할 권한은 있으십니다. 실제로 실행하시려면 추기경단을 이기셔야 하지만요.”
루치아와 헤이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건물주 겸 프랜차이즈 회장 같은 사람이 연락도 없이 매장에 불쑥 찾아와서 너희 평소에 일 잘하는지 구경 좀 하자, 를 시전해 버린 꼴인 것일까···.
카트리야는 깊이 반성했다. 아직 이 세계에 적응을 덜 했다. 명분만이라고는 해도, 자신도 모르는 새 조물주 위 건물주가 되어 있었다니.
이윽고 허겁지겁 달려 나온 장인과 함께 작업실을 구경할 때는, 반대로 호위들이 사도에게 적응을 덜 했다고 반성하게 되었다.
“16종광 베틀인데 따로 패턴 작업은 안 하시는구나···. 아, 페달이 없는데? 그럼 바디는 어떻게 나누시나요? 설마 손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보는데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모르겠다. 문제는 기사와 사제는 모르고 장인들은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차석 장인은 쭈뼛쭈뼛 사도에게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쪽은 마침 페달이 고장 나서 목공방에 수리를 맡겨서요. 그래서 이건 급한 대로 평직에 쓰고, 이쪽에서 능직과 패턴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요정의 밤 때문에 지금은 패턴보다는 능직이 급하긴 합니다.”
“아, 그렇군요···. 잉아도 실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여기서 만드시는 걸까요?”
“예, 말하자면 자급자족이지요. 코팅만 밀랍 공방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시구나. 와, 이건 저 앞에 있던 무지개 원단···. 실크? 인가요? 염색은 한번 끝났네요?”
“예, 특수사로 직조한 다음 염색 공방의 염료로 한 번 더 마무리해서 광택을 고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카트리야는 베틀에 걸린 실크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 몸을 움직이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구경했다.
베틀 앞에서 긴장해 있던 장인은 조금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천을 잘못 건드려서 작업이 흐트러질까 봐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특수 염료를 먹일 때 무지갯빛이 생기는 거구나···. ···그럼 염료 공정 쪽 수가가 엄청 높겠는데요?”
생각보다 이윤이 높지는 않겠다, 고 에둘러 물어보자 차석 장인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그런 셈이지요. 그래도 저희가 바탕을 만들어야 염색을 할 수 있으니까요.”
“단가도 엄청날 텐데요···?”
“그래서 선주문받은 분량 정도만 생산합니다. 이쪽을 보시면, 실크 혼방으로 해서 조금 단가를 낮춘 제품도 제작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광택이 좀 떨어져서요···.”
“아, 그렇네요. 아깝다. ···아, 이 실로 제 베일을 짰던 거군요? 레이스는 이쪽에서 작업하시고?”
“예, 시급한 주문이니 기성품을 활용해도 좋다고 하셔서 가장자리만 추가하는 방식으로···.”
베틀 구역을 떠나 레이스 구역으로 넘어가는 카트리야를 따라가면서 헤이즐이 루치아에게 속삭였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모르겠는데, 장인들하고는 말이 통하니까 된 거 아닌가?”
루치아가 대답하며 방직 공방을 힐끗 둘러보았다. 부업을 열심히 하는 사제들도 있지만, 루치아는 손재주가 없고 집에 돈이 필요하지도 않아서 이런 작업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신의 사도는 이런 작업에 꽤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낯도 많이 가리는 사람이 어느새 슬그머니 장인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오직 작업 이야기뿐이었지만 그편이 모두가 편하다. 장인들도 ‘뭔가 아는 분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는지 긴장이 많이 풀려 있었다.
주기적으로 놀러 오면 사도의 우울증이 좀 가시지 않으려나? 경호 문제만 해결하면···.
“대성전에 베틀 하나 놓아 달라고 하면 안 되겠죠, 역시···.”
공방의 구조를 확인하다가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듣고 고개를 돌린 루치아는 조금 당황했다.
카트리야가 어느새 장인들 사이에 섞여 앉아 코바늘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은 멍하니 베틀 쪽을 보고 있는데 손은 바늘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옆자리 수습들이 입을 벌리고 구경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른 손바닥만 한 길이의 희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완성되었다. 카트리야는 바늘과 검은 털실을 빌리더니 그걸 몇 번 휘휘 저어서 동그란 검은 점을···.
“뱀?”
정체를 알 수 없던 무언가에 점이 찍히는 순간 갑자기 하얀 뱀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카트리야는 흐물거리는 뱀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조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솜을 넣으면 뱀 같아 보일 텐데··· 이건 허물 같네··· 별로다.”
“아, 사도님!!”
실을 잡아당겨 풀려는 것을 보고 루치아가 기겁했다.
“귀여운데 왜 푸세요!”
“···뱀 좋아해요? 이건 좀 징그럽지 않아요?”
“솜 있어요, 드릴게요!”
어린 장인이 급히 솜을 찾아왔다. 그리고 뱀의 목 부분 구멍으로 솜을 야금야금 밀어 넣었다. 하얀 털실은 금세 가느다란 뱀 모양이 되었다. 의외로 귀여웠다.
어린 장인도 신기한지 동글동글해진 뱀의 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려 보았다.
“조금만 더 크게 만든 다음 눈은 단추로 달면 예쁠 것 같은데···. 색도 조금 섞어서···.”
뱀의 목에 난 구멍을 마무리하면서 중얼거린다. 그리고 카트리야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저어, 사도님. 이거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제 동생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음··· 제가 설명을 잘 못하는데···.”
잘 못하는지는 사실 모르겠다. 하지만 무슨 말만 하면 ‘못 알아듣겠다’ ‘혼자 엉뚱한 소리 한다’고 비웃음을 당했던 기억에서 아직 탈출하지 못했다.
카트리야는 흰 뱀을 내려다보았다.
난독증과 우울증으로 오염되지 않은 추억을 되살리는 건 나쁘지 않다. 어린이집에 갔다가 비브리다 추기경을 만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실 자투리하고 바늘 남는 거 있으면 저한테 좀 파시겠어요? 제가 돌아가서 도안을 그려 볼게요.”
“도안··· 이요?”
“보면 금방 아실 거예요. 제가 하나 더 떠서 보여드릴 수도 있지만··· 기다리던 분이 오신 것 같아서.”
카트리야의 눈이 작업실 입구를 향했다. 장년 여인이 공손한 자세로 입구에 서 있었다. 대충 봐도 조합장이었다.
카트리야는 솜을 가져다준 어린 장인에게 하얀 뱀 인형을 내밀었다.
“도안 그리는 데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이건 드릴게요. 보면 어떻게 만드는지 대충 아실 거니까.”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어린 장인은 놀라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만 한 인형을 공손히 받았다.
“영광입니다, 사도님! 가보로 보관할게요!”
···아. 이거.
전대 사도에게 오르골을 선물 받은 기사도 이런 말을 했다고 했었다. 그에 비해 너무 성의 없이 순식간에 만들어 낸 뜨개 인형 따위를 줘 버렸나.
좀 민망해졌지만, 카트리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합장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세 사람은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엔 상점가부터 돌아보자,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설렁설렁 상점가를 지나쳤다. 식당도 꽤 많고 술집도 간간이 있었다. 식재료, 생필품, 공예품점, 용병 중개소 등을 지나다가 다트로 과녁을 맞히는 가게를 발견하고 카트리야는 발을 멈췄다.
진짜 날이 선 화살을 나무판에 꽂는 식인 건 전혀 놀랍지 않지만.
“저 3등상 상품 말인데요···?”
“···상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
헤이즐이 시선을 회피했다.
카트리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손바닥만한 나무 패널이었다. 금빛 광채를 뿜어내는 하얀 거인··· 같은 게 늑대 떼를 밟아 터뜨리는 모습이 삐뚤빼뚤하게 그려져 있었다. 괴물 늑대 위에 선 거인이 해맑게 웃고 있는 게 묘하게 무섭다.
“저게 성하라고요?”
“···성하의 도상은 인기가 있거든요···.”
“아니, 어딜 봐도 성하가 아니잖아요? 그전에 인간이 아니잖아?”
“어허, 무슨 섭섭한 말씀을! 어딜 봐도 법황 성하 아닙니까! 이 고귀한 광채, 이 놀라운 무력,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이 온화한 얼굴! 똑같구먼! 옛날에 성하가 언데드 대전에서 늑대인간 제너럴을 혼자서 이렇게! 물리치셨을 때를 그린 겁니다!”
가게 주인이 냉큼 대꾸했다.
카트리야는 베일 너머에서 눈을 좁혔다.
“마지막으로 대성전 예배에 참석하신 게 대체 언제시길래···?”
“진짜로, 입술에 침이라도 바르고 말씀하셔야죠. 성하라고 겨우 알아볼 수만 있는 정도지 똑같기는 무슨?!”
루치아도 분개했다. 아니, 알아볼 수 있다는 부분조차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아, 초상화를 갖고 싶으시면 저기 큰길가에 가서 화가라도 고용하시든가. 여기 뽑기 가게인 거 안 보입니까?”
하나 가져가서 본인의 의견을 듣고 싶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루치아가 품에서 동전을 꺼내서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안 되겠다, 여기서 성하를 모독하지 마세요. 3등 따면 받아 갈 수 있는 거죠? 선반에서 치워야지.”
하. 가게 주인은 코웃음을 치면서 동전을 도로 밀어냈다.
“전투 사제는 게임 금지입니다! 아니, 누구 장사 말아먹는 꼴 보려고 이러시나?”
“헤이즐 경!”
루치아는 울상이 되어 헤이즐을 돌아보았지만, 헤이즐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가게 주인이 냉큼 소리쳤다.
“기사님도 금지!”
“그럼 사··· 에다 님!”
“전 이런 거 못 해요!”
“믿을 건 에다 님밖에 없어요!”
아냐 아냐, 그래도 난 이런 거 못 해! 전생 의무교육 12년의 체육 실기 평균 70점, 기본이 70점이던 곳의 70점을 걸고 말하는데, 단 하나도 맞출 수 없다!
카트리야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구세주를 발견했다.
“올리버!”
“엥?”
어린이집 최고 악동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 작가의말
날씨가 추워지니까 몸도 축축 늘어지는 것이... 다들 건강하시기를..
선작수가 15까지 올랐다가 착실히 떨어지는 중인데, 선작 한자리수로 떨어지게 되면 이곳 연재는 중단하겠사오니 부디 너그러이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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