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첫인상의 중요성 (5)

카트리야는 본인 딴에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계속 히죽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전생의 연구실 선배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인내심을 발휘해 보자. 괜찮아, 좀비 때 법황도 참아냈다. 인간 따위.
대성전의 꼭대기에 앉은 여자이니 잘 유혹하면 사제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 쳐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대성전과 귀족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알력 싸움의 물꼬를 트기엔 상대가 좀··· 부족해 보인다. 외모도 머리도.
뭔지 모르지만 일단 이겨야 한다. 기왕이면 성전 대 귀족의 구도로 보이지 않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군요. 이곳은 대성전 바깥이니 성전의 규율을 적용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요? 역시, 이번 사도님은 말이 좀 통하는···”
“헤이즐 경?”
헤이즐이 한 발 물러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카트리야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백작 영식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이 세계의 신분 제도에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여쭙겠습니다. 신의 사도는 귀족으로 취급되지요?”
“물론입니다. 사도님은 법황 성하와 마찬가지로 공작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높다. 그런데도 나는 우습게 보였던 건가.
신물이 치밀었다.
“백작 영식은요?”
“백작의 후계자이니 귀족이지만, 아직 본인에게는 작위가 없는 걸로 압니다.”
“그럼 제 신분이 더 높군요?”
“물론입니다.”
백작 영식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저희 세계의 역사에 따르면.”
최대한 차분하게, 속도가 빨라지지 않게. 구역질이 치미는 속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하급 귀족이 상급 귀족의 의복이나 몸에 손을 대는 것, 먼저 본인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 상대가 숨기는 신분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 허락 없이 먼저 말을 거는 것, 상대의 외모를 평가하고 추근대거나 대답을 강요하는 것은 전부 무례 또는 모욕,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이 세계에서는 하급 귀족이 상급 귀족에게 그런 잘못을 범했을 때 어떤 처벌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까?”
헤이즐은 눈썹을 살짝 까딱였을 뿐, 모두에게 잘 들리도록 분명하게 대답했다.
“상급 귀족 여성을 희롱한 경우 혀나 손을 절단하되 합의가 성립하면 보상금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무례하게 굴었을 경우, 모욕죄 성립 시 구금 또는 벌금형, 미성립 시 훈방 조처합니다.”
“아니, 잠시만, 처벌은 무슨···. 전 그냥 말을 걸려고!”
“사도님의 호위 기사와 시종 사제가 몇 번이고 물러나라고 요청했지만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쩌렁쩌렁하게 잘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트리야는 눈만 움직여서 새로 나타난 사람을 보았다. 5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추기경은 묘하게 기사 같은 분위기였다. 대성전의 경비와 영빈관 관리를 담당하는 접객소장이다. 이름은··· 까먹었다.
백작 영식을 노려보며 다가온 접객소장은 카트리야의 앞에 가볍게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밀어 주자 손끝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고 도로 몸을 일으켰다.
“거부한 시점에서 강제성이 성립합니다. 사도님께서 처벌을 원하신다면 그리되겠지요.”
“그렇군요.”
카트리야는 백작 영식의 뒤로 성기사와 전투 사제들이 포위망을 만드는 것을 살짝 곁눈질했다.
영식의 얼굴은 시시각각 핏기를 잃기 시작했다.
“덤으로 저자는 성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을 돌려주지 않고 있어요. 헤이즐 경, 소유물 강제 점유 또는 절도에 대한 처벌은요?”
헤이즐의 눈이 켈보른 영식이 든 베일로 움직였다. 긴장해서 쥐어뜯는 바람에 모양이 흐트러져 있었다.
“복구가 가능하면 복구 비용 및 위자료를 청구하는 수준입니다.”
법황이 준 선물이고 마음에 들었는데 이상한 놈이 주물럭거리고 있다. 보는 것 자체가 불쾌하니 위자료는 충분히 받아내자.
백작 영식이 화들짝 놀라서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베일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헉, 하고 비명을 지르고 숨을 삼켰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최고급 베일은 얼핏 보기에도 매우 비싸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방직공 조합에서 들은 가격도 굉장했다. 법황은 신의 사도에게 처음으로 바치는 선물에 조금도 예산을 아끼지 않았다.
흙바닥에 뒹구는 새하얀 베일을 보고 헤이즐이 덧붙였다.
“복구가 불가능한 경우 감정가의 5배부터 배상액이 책정됩니다.”
고급 레이스는 한 번 빨면 감촉이 달라진다. ‘복구 불가능’의 범위는 넓게 잡자.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점점 떨려오는 손가락을 사제복을 움켜쥐어 감추면서, 카트리야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자는 세계수를 향해 마법을 사용했고, 세계수가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노출했습니다. 신이 하사하신 세계수를 위협하고 나아가서 선량한 신도 다수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될까요?”
헤이즐이 접객소장을 바라보았다. 접객소장이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도님께 세계수가 깃든 것은 저희 인간들이 직접 세계수를 보살피라는 어머니의 뜻이시겠지요. 따라서 세계수를 위협함은 곧 어머니의 뜻을 거역함이며, 이는 세계 전체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입니다. 저자의 경솔한 행동이 세계수에 털끝만한 피해라도 준다면, 저 일가족의 목숨으로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카트리야는 루치아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보이나요?”
루치아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멈칫했다.
“···색이 변한 잎이, 두 개 있는데요···.”
진짜로?
켈보른 영식을 포위했던 성기사들의 분위기가 단번에 흉흉해졌다. 접객소장도 카트리야의 뒤로 와서 머리카락을 확인하더니 이를 빠직 갈았다.
“이 불경한 것이 감히!!!”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한순간 화들짝 놀랐다.
“뭣들 하는가! 당장 이 자를 감옥으로 끌고 가지 않고!”
“아니, 잠시만요, 전 억울합니다! 전 진짜로, 그냥 사도님하고 이야기나 좀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켈보른 영식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세계수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도님하고 세계수가 무슨 상관이··· 아니, 저게 어떻게 세계수란 말입니까!!”
“네 이놈! 지금 감히 존귀하신 법황 성하와 자문단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머니가 직접 빚으신 사도님의 몸에 삿된 것이 자리를 잡기라도 했을까!”
접객소장 예하는 목청이 좋았다.
카트리야는 무심코 인상을 썼다. 큰 소리는 불편하다.
“몰랐습니다! 전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고작 그런 이유로 대성전 손님의 베일을 건드리는 무뢰한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사도님을 향해 마법을 쓴 것도 삿된 의도가 있어서겠지!”
“아닙니다, 전 진짜 몰랐습니다! 사도님, 사도님이 말씀해 주십시오! 전 세계수고 뭐고 몰랐다고요!”
네가 몰랐는지 알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베일을 벗기면 이야기하기가 편할 거라고 해서, 저는 진짜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세계수, 저게 어떻게 세계수야, 아니, 세계수에 제가 무슨, 감히···!”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당장 사도님 앞에서 치우세요.”
헤이즐이 날카롭게 내뱉었다. 성기사들이 바둥거리는 백작 영식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루치아는 당장에라도 울고 싶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 세계수를 보고 있었다. 접객소장도 침통한 표정이 되어 돌아섰다.
“사도님, 세계수를, 어떻게···.”
잎의 색이 변했다면 확실히 큰 사건이긴 하다.
카트리야는 조금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고 낮게 말했다.
“루치아 사제가 있으니 일단 들어가서 상황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성하께 상황을 보고드리되, 성하의 도움이 당장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은 분명히 해 주세요.”
“정말로 필요 없으시겠어요···?”
루치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거는 없지만, 필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문제는···. ···토양의 산성도 같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거름. ‘신의 사도’의 상태.
“일단은 괜찮을 것 같아요. 성하는 그보다···.”
카트리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손끝에 이제 제법 자란 잎사귀들이 걸렸다.
“세계수를 공개해 버렸으니 이걸 수습하는 쪽에 신경을 써 주십사고, 전해 주세요.”
“모든 것이 사도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접객소장이 힘주어 대답했다. 말투가 참 고풍스러운 분이다. 접객소장에게 살짝 미소를 짓고, 카트리야는 구경꾼들을 향해 돌아섰다.
바닥에 떨어진 베일이 눈에 걸렸다. 새하얀 베일이 한순간에 구겨져서 먼지투성이로 나뒹구는 꼴이 그야말로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잠깐 즐겁다는 착각에 빠졌다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버린 모습이, 그저.
처참했다.
행복을 모르면 불행도 모른다. 기분이 좋은 걸 모르면 나쁜 것도 모른다. 죽음으로 가는 그 무감각한 상태도 나름 괜찮···
정신 차려. 자기연민은 나중에.
카트리야는 베일에서 눈을 떼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회활동용 미소를 얼굴에 떠올린다.
“여러분. 먼저 갑자기 소란을 피워 입장 수속이 지체된 점, 대성전을 대표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구경꾼이 당황해서 고개를 숙이고, 급히 무릎을 꿇고,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들고 덩굴 한 줌을 어깨 앞으로 가져와서 늘어뜨렸다.
“덧붙여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시다시피 신의 사도인 제 머리카락은 지금 세계수의 덩굴로 변해 있습니다.”
관객 일동, 탄성, 감격, 눈물.
대성전 코앞에서 성기사와 사제들이 눈을 부라리는 가운데 이의를 외치는 멍청이 2호는 없었다.
“이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라, 어쩌면 신성력이 없는 분이나 신앙심이 부족한 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이제껏 공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곧 공식 발표가 있겠습니다만, 부디 그때까지 잠시만, 이 자리에서 목격하신 사실을 함구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그러겠다는 대답은 재깍 돌아왔다. 신의 축복을 비는 말도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카트리야는 고맙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성전도시 전체에 소문이 퍼지리라는 데 목숨도 걸 수 있다. 단지 ‘다 너희를 위해 한 일이다’라는 말 정도는 붙여두고 싶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내 강의를 뺏아간 사람한테 항의 한마디 못했던 경험을 살려서.
불쌍한 베일을 한 번 더 쳐다보고, 카트리야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대성전의 문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숨길 수도 없는 얼굴은 그저 계속 웃고 있었다.
‘나’는 귀족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신의 사도’는 평민들 앞에서 가면을 써야 한다. 그래야 대성전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해질 테니까. 멋대로 굴어도 어떻게든 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서면 더 쉽게 넘어갈 게 눈에 보이는데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밖엔 살지 못한다. 하염없이 한심하게, 뭐라도 되는 듯이 잘난 척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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