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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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1.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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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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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눈가리개의 나라 (3)

DUMMY

그 숨이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또다시 나를 용서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남에게 모욕당하면 반발심이 들지만, 돌아서는 순간부터 ‘넌 그런 꼴을 당할 만하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다. 이곳에서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이렇게 무기력하고 한심한 꼴을 남에게 보이면서, 또 부끄러운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그래서 저는, 대성전 분들이 이렇게 잘해 주시는데도··· 그런데도 좀비일 때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시체든 좀비든, 그때는 이 세계에 거부당하는 존재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누구도 만날 필요 없고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아서 그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 시간. 여전히 우울감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적어도 평온했다.

즐거울 일은 없지만 괴로울 일도 없는 시간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신의 사도라는 말을 듣고 달아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시군요.”

루드비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덧붙였다.

“사도님이 신을 믿으셨더라면 외톨이가 되었을 때도 신께서 곁에 계셔 주셨을 텐데요.”

루드비히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아 눈물로 젖은 카트리야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얇은 손수건 너머로 차갑게 식은 눈물과 부드러운 뺨의 감촉이 느껴졌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달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그저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 줄 사람, 적어도 늘 곁에서 위로해 줄 누군가만 있어도 좋았을 것을.

사도의 세상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냉정했을까. 그 세상의 신은 왜 이 연약한 사람을 홀로 던져 버렸을까. 전부 10년 전의 나처럼 부족한 사람들 뿐이었던 건가.

“저희 세계의 신은··· 제가 운다고 눈물을 닦아 주진 않았을걸요.”

“저희 세계의 신께선 제게 사도님의 눈물을 닦을 손을 안배해 주셨지요. 그러니 저희 어머니는 믿어 보시면 어떨까요. 아니면 이걸로는 부족하십니까?”

웃으면서 건넨 농담에 카트리야가 눈을 들어 루드비히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깔았다. 부족하진 않지만 그 말을 하기는 민망하다, 고 온 얼굴로 말하면서.

담요에 파묻힌 몸이 조금 더 움츠러들었다.

루드비히는 살짝 흐트러진 사도의 앞머리를 귀 뒤로 잘 쓸어 넘겨 주었다. 

“이곳에서도 사도님이 가시는 길에는 함정이 있을 겁니다. 아마 또 상처도 받으실 테지요. 안타깝지만 제 힘이 부족하여 그 길을 평탄히 바꿀 수도,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 발 한 발 디딜 곳을 알려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신은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전능하신 신이 왜 저희에게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주시는지는 저도 아직 알지 못하니, 약속드리지요. 사도님이 또 함정에 빠지시거든, 그때는 같이 빠져 드리겠습니다. 사도님이 홀로 남겨지지 않도록.”

“···제가 신의 사도라서?”

“사도님 또한 저희 어머니의 소중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상처 입지 않게 보살피는 것이 저희 모두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이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제가 사도님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보다 웃음에, 불행보다 행복에 익숙해지시기를. 그래서 사도님이 좀 더 오래 제 곁에 있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좀 불경하시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제 신앙을 위협하시지만, 저는 사도님과 지내는 시간이 즐겁거든요.”

“······툭하면 우울해져서 우는소리만 하는 데도요.”

울적해져서 구석에 처박힌 모습도 나름 귀엽긴 하다고 말했다간 화낼 것 같다.

루드비히는 낮게 웃었다.

“30년 넘게 마음고생을 하셨으니 한 10년쯤은 우셔도 됩니다. 몇 번이든 실패할 때마다 마음껏 울고, 화도 내고, 불평도 하세요. 사도님의 모든 실수와 실패조차도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어머니께서 사도님이 이처럼 연약하고 소심하고, 다정하고, 예민하고 공정한 분이시기를 바라셨다면, 저는 그런 사도님과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비슷한 위로는 전에도 들었지만, 해묵은 상처를 헤집어 속살을 드러낼 용기가 돌아온 지금에야 그 말이 영혼에 스며들었다.

아아. 그렇구나.

카트리야는 비로소 게오르그의 말을 이해했다. 신이 그를 위해 루드비히를 보내 주었다던 말의 뜻을. 눈부신 신성력이 아니라 진심 어린 목소리와 다정한 눈빛 속에, 따스하게 잡은 손 속에 그들의 신이 있었던 거겠지.

당신들의 신은 자신의 가장 다정한 아이를 법황으로 앉혔구나. 종교에 대한 지식, 연륜, 사회 경험, 신분이나 재산,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질을 가진 사람을.

“···성하는 제가 얼마나 기분 나쁘고 짜증 나는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알게 될 날을 기대해 보지요. 저희 대성전에 잔소리 전문가가 많으니 절반쯤 사도님께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작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녹아내리는 솜사탕처럼 귓가에 달콤하게 달라붙었다.

“언젠가 사도님이 스스로를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곁에 두고, 누군가를 의심 없이 믿을 용기를 되찾으실 그날을, 저도 같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저도 제가 알지 못하던 답을 찾게 되겠지요.”


“···뱀을, 갖고 싶으시다고요?”

담요를 망토처럼 둘러쓰고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면서 카트리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던 루드비히는 민망한 듯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웃었다.

“귀엽길래 제 성소에도 장식해 보고 싶어서요. 흰 뱀은 달리 구할 곳이 없고 그리 오래 걸리는 물건도 아니었다고 들어서, 마음 내키시면 하나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려울까요?”

귀여운 흰 뱀. 짚이는 구석은 하나뿐이다.

카트리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그 흰 뱀 인형이요? 거기서 일하는 장인한테 선물해 줬는데 성하가 어떻게 보셨어요?”

“지금 방직 조합에서 전시 중입니다. 구경꾼이 많아서 임시 헌금함도 설치했지요. 헌금이 잘 모이더군요.”

······?!!!!

놀라서 발이 멈췄다. 루드비히는 웃으면서 카트리야를 돌아보았다.

“사도님은 모르셨겠지만···”

“사도 선물이라서?!”

말이 겹쳤다.

카트리야는 급히 사과하려고 했지만 루드비히는 고개를 살짝 저어 사과할 필요 없다고 웃어넘겼다. 

“사도님은 모르셨겠지만, 저희 세계에서 흰 뱀은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흰 뱀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대성전에서 허가받은 장인들, 주로 서임 받은 사제들 뿐입니다.”

“···날개··· 가 없는데도요?”

“허물을 벗어 새로이 태어나는 뱀의 형상은 생명과 죽음을 초월하는 어머니의 심대한 권능을 상징하며.”

루드비히는 웃으면서 카트리야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서 다시 걸음을 떼게 재촉했다. 카트리야는 걸어가면서도 루드비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뱀의 하얀색은 짙은 어둠에서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선하신 의지를 나타내고, 뱀의 날개는 지상의 원리를 인간이 초월케 하는 어머니의 너른 은혜, 즉 신성력을 표현합니다. 권능과 의지만으로도 신께서는 이미 신이시므로 흰 뱀도 신의 형상인 거지요.”

노래하듯 흘러나오는 교리는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상징과 설명이었다. 신성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신은 신이니까 날개는 탈부착이···.

······진짜로?

“그러니까 그 아기자기한 뱀 인형은 말하자면 이번대 신의 사도께서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첫 창조물이라서, 사실 둘도 없이 귀한 성물(聖物)입니다. 그 장인 아이는 죽을 때까지 영광으로 여길 겁니다.”

사실 대성전에 안치해도 모자라지 않은 성물이었다. 루치아도 외출 보고를 하다 말고 자신이 뭘 웃어넘겼는지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전투 사제와 성기사가 그걸 보면서 아무 생각도 못 한 것 역시 어머니의 뜻이겠지요. 다시 받아오지 말고 그 장인 아이에게 주시지요, 허허허.’라고 보고받았다.

카트리야는 신음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정도로?

“아니,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우연히···”

“사도님의 우연은 저희의 필연 아니겠습니까.”

“제 손 앞에 흰색 털실이 굴러다녔고 제가 뜨개 인형 중에 뱀을 제일 편하게 만든다는 게 신의 의도라고요?”

“그런 우연이 겹치기도 어렵지 않을까요?”

어렵지 않을걸요.

“신께서는 항상 낮은 곳에 임하시니 이번 사도께서도 누구보다 먼저 직공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다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고작 뱀 인형 하나 가지고···.

카트리야는 다시 신음했다.

안 되겠다. 기왕 잠에서 깬 김에 빨리 인형 도안 그려서 보내 줘야지. ‘사도의 뱀 인형’이 헌금을 모으고 있다면 그 옆에서 ‘색깔 있는 뱀 인형’을 팔아도 꽤 짭짤한 수익이 날 거다. 요정의 밤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는 했지만 철야 하면···

아냐, 이 세계 노동 환경이 괜찮다고 했는데. 그럼 인원 보충을···? 의문의 고용 창출인가?

···하지만 외출은 하고 싶지 않은데···.

“혹시 제가 방직 조합이나 다른 조합 상인들을 여기로 부르면, 올까요?”

“만사 제쳐놓고 달려오겠지요.”

“···어디로 부르죠? 뜨개 도안을 주고 어떻게 읽는지 직접 뜨면서 설명을 해 주고 싶어요.”

루드비히는 잠깐 고민하며 턱을 쓸어내렸다. 사도의 침실은 예전 선법황의 숙소라 응접실은 있지만 안 쓴지 좀 되어서 한번 싹 엎어야 한다. 법황 응접실은 급하게 쓸 일이 생기곤 하고, 일반 접객소에 사도를 데려가기도 애매하다. 그럼 남은 건.

“저곳이 무난하지 않을까요?”

루드비히가 가리킨 것은 창 바깥, 영빈관 안뜰 구석의 작은 석조 정자였다.

“이 계절엔 바깥도 그리 춥지 않고, 시야가 좋고 방어 결계도 쳐져 있어서 경호도 어렵지 않습니다.”

···방어 결계가 있었구나. 그래서 전에 술 먹은 다음 안뜰에서 졸고 있었던 건가.

카트리야는 새로운 지식을 획득했다.

“시간이 되실 때 사제급 장인들한테도 한번 가르쳐 주시면 좋고요.”

“···그럼 사제들은 흰 뱀을 만들어서 성물로 파시려고요?”

“제가 축성하면 비싸집니다.”

당연한 말인데, 당당한 말투가 어째선지 좀 웃겼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 경제다.

카트리야가 낮게 웃자 루드비히도 따라 웃었다.

“안뜰은 아무 때나 편히 놀러 나오세요. 제가 없는데 말 상대가 필요할 때 나와 계시면 누구라도 말동무는 해 드릴 겁니다. 매번 제 침실까지 오시는 것도 번거로우실 테니.”

“생각해 놓을게요. ···맞다, 저 용돈이 필요해요. 실도 사고 싶고, 루치아 사제한테 과녁 맞추기 하느라 빌린 돈도 갚고요. 저한테 예산···이 책정되어 있다던데 얼마 정도일까요?”

흠. 얼마였더라. 실을 살 돈이 부족할 리는 절대 없었고···.

루드비히는 마지막으로 확인한 금액을 머릿속으로 확인해 보았다.

“···집 3채 정도?”


작가의말

비축분은 없으나 이 시국에 우울 파트만 쓰고 올리는 것도 피곤해서, 잠도 못 자는 김에 조금 노력해 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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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18 2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17 2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16 2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17 2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17 2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18 2 11쪽
70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2) +2 24.12.30 20 2 11쪽
69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1) +2 24.12.29 17 2 11쪽
68 18. 탕녀 엘피에라 (5) +2 24.12.28 22 4 11쪽
67 18. 탕녀 엘피에라 (4) +1 24.12.27 20 3 11쪽
66 18. 탕녀 엘피에라 (3) +2 24.12.25 20 3 11쪽
65 18. 탕녀 엘피에라 (2) +1 24.12.23 20 3 11쪽
64 18. 탕녀 엘피에라 (1) +1 24.12.22 17 3 11쪽
63 17. 요정의 밤 (5) +1 24.12.20 21 3 11쪽
62 17. 요정의 밤 (4) +2 24.12.18 24 2 11쪽
61 17. 요정의 밤 (3) +2 24.12.16 25 3 11쪽
60 17. 요정의 밤 (2) +1 24.12.15 20 3 12쪽
59 17. 요정의 밤 (1) +2 24.12.13 23 3 11쪽
58 16. 눈가리개의 나라 (4) +1 24.12.11 28 2 12쪽
» 16. 눈가리개의 나라 (3) +2 24.12.09 24 3 11쪽
56 16. 눈가리개의 나라 (2) +2 24.12.09 20 3 11쪽
55 16. 눈가리개의 나라 (1) +1 24.12.08 24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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