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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2.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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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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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요정의 밤 (1)

DUMMY

생일 선물이었어. 무려 법황께서 생일 선물로 고작 손바닥만한 뱀 인형을 달라고 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성하께 값비싼 선물은 의미가 없을 테니, 사도님이 손수 만든 신의 인형이라면 귀한 선물이 되겠지요.”

미안. 종교인이 아니라 이해 못 하겠다.

카트리야는 동글동글하고 무난한 뱀 인형을 느긋이 만들려던 계획을 빠르게 포기했다. 그건 마치··· 집들이 선물로 자기가 쓰던 두루마리 휴지 한 개를 던져 주는, 아니면 결혼 선물로 다 있는 곳의 2천원짜리 펠트 인형을 사다 던져주는, 그런 꼴이 될 것 같다.

법황의 생일 선물이라면 최소한의 격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만드는 사람의 솜씨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수는 없으니 재료로 커버해 보는 수밖에 없다. 내 집이 3채라는데 재룟값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카트리야는 날개 뱀 인형을 노려보았다. 눈은 보석으로 달고, 몸통은 광택이 있는 고급 실을··· 그러면 작업 속도가 떨어질 것 같은데 기한에 맞출 수 있을까? 합사해야 하나?

“오호, 듣던 대로 귀여운 인형이군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칼레 추기경이 서류를 들고 안뜰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순간, 방적 방직 조합장은 명백한 경계심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예하.”

“강녕하셨습니까.”

“두 분도 건강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변함없이 장사가 번창하시니 이 늙은이가 다 뿌듯하군요.”

···뭘까. 셋이 안 친해 보이는데?

카트리야는 세 사람 사이에서 눈을 굴렸다. 눈이 마주친 칼레는 싱긋이 웃어 보였다.

“사도님, 저도 동석해도 될까요? 이 두 분이 사도님과의 대화만 즐기다 저를 보고 가는 걸 깜박하실까 봐 걱정되어서 허겁지겁 달려오지 않았겠습니까.”

“···동석은 물론 괜찮습니다만··· 세 분은 약속이 있으셨나요?”

칼레 추기경의 눈이 조금 가늘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약속은 없지만 만날 용건이 있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두 분?”

“예, 그러잖아도 곧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워낙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라 저희가 괜한 방해를 하고 싶지 않아서···.”

“이런 건 처음에 이야기를 확실하게 끝내야 오히려 일이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두 조합장은 명백하게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칼레는 우아하게 서류에 손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입을 뗐다.

“뜨개 인형 저작권료, 사도님에게 5년간 판매가의 1할 지급.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저작권료요? 저한테?

카트리야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조합장이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1할은 너무 많습니다!”

“저희 직공들 인건비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7푼이 한계입니다!”

“어허, 한여름에 고스란히 재고로 넘어갈 뻔한 털실을 정리할 기회 아닙니까?”

“털실이야 보관했다 겨울에 쓰면 그만입니다. 썩진 않지요.”

“어차피 인형 조금만 풀려도 시중에서 따라 하는 사람들이 나올 텐데, 대성전이 관리한다는 명분이 있으면 경쟁 상품도 줄어들 테고요. 아는 분들이 왜 이러실까.”

“예하야말로, 인형은 사치품이라 유행할 때 잠깐 팔린 뒤엔 판매량 줄어드는 거 아시면서요?”

“천 인형에 대면 가뜩이나 비싼 편입니다.”

“대성전에서 흰 뱀은 독점하실 테니 나머지는 그냥 저희에게 맡겨 주시지요. 어차피 매년 총매상의 2할은 성전에 헌납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 매상이 늘면 어차피 성전에 바치는 금액이 늘어날 텐데 굳이 저작권료까지 걷으셔야겠습니까?”

두 조합장은 미리 예상해 온 듯 엄청난 속도로 추기경의 말에 예리하게 반박했다.

방금까지 나하고 실 염색이 잘 나왔다고 하하호호 하고 있던 사람들이 맞나?

잠깐 당황했던 카트리야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중세 길드의 길드장이라면 웃는 얼굴 밑에 칼을 열 자루쯤은 숨겨 가지고 계시겠지··· 돈 관리하는 분들끼리 만나면 이렇게 되는 수밖에···.

칼레도 조금도 밀리지 않고 차분하게 지적했다.

“가게 사용료에 세금, 기사단 순찰비에 귀족 대처 비용까지 전부 합쳐서 매상의 2할입니다. 일반 귀족령의 가게세를 생각하면 결코 많지 않지요. 그리고 저작권료는 사도님의 사유 재산으로 들어갈 테니 그쪽에 합치면 안 되지요. 계산이 왜 그리됩니까.”

잠시 말이 끊기자 셋 다 카트리야를 돌아보았다.

칼레가 무서울 정도로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사도님, 일하지 않고 받는 돈, 좋으시지요? 전대 사도님이 도입한 훌륭한 제도인데 말입니다. 저작권료.”

좋다. 물론 좋은데 저 두 조합장의 얼굴을 보아 달라.

방직 방적 조합장은 나란히 안타까운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사도님, 물론 세상살이에 돈이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아름다운 물건을 세상에 널리 보급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저희 세계의 아이들은 인형을 다양하게 보지 못합니다. 저작권료를 넣으면 가뜩이나 높은 가격이 더 올라갈 수밖에 없지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칼레가 다시 날카롭게 지적했다.

“어허. 저작권료로 인상되는 가격 정도가 부담되는 아이들은 어차피 인형 놀이는 못 하지 않습니까. 괜히 사도님 눈치 주지 마십시다.”

조합장들의 눈도 또다시 날카로워졌다.

“사도님께 이번 달에 들어온 기부금이 얼마나 되는지 저희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성전이 원래 준비한 예산까지 합치면 저작료 따위가 중요할 금액은 아니실 텐데요?”

“일시적인 기부금보다 지속적인 수입원이 소중한 법입니다, 조합장님들.”

분위기가 조금 살벌해졌다.

그러니까, 싸우는 거 싫다니까···. 심지어 나도 모르는 내 재산으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 그리고···.

카트리야는 뱀 인형 디자인화를 내려다보았다.

뜨개질 마감 기한 못 맞추는 바람에 백조 날개가 남은 오빠는 하나면 충분하잖아···! 외날개 뱀 같은 걸 선물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조합장들이 여기서 싸우다 재료 수급이 늦어지면 스케줄이 망할지도 모른다.

빠르게 끝내고 업무 복귀시키자!

칼레가 가져온 서류를 읽을 정도로 글에 익숙하진 않았다. 그래서 카트리야는 들은 이야기만 종합해서 타협안을 검토하면서 새로 코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저작권료는, 주시지요.”

없는 돈을 벌기는 힘들지만 많은 돈을 쓰는 건 쉽다. 일단 모아 두자.

칼레의 얼굴이 밝아지고 조합장들의 얼굴이 단번에 울적해졌다.

카트리야는 바늘코를 열심히 세면서 계속 말했다.

“예하 말씀대로 경쟁 상품을 제어할 명분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판매가의 1할이 부담되는 금액이라는 조합의 입장도 이해는 합니다. 방직 조합에서 기존 생산품에 추가로 만드는 물건이니 당장은 손이 비는 직공도 많지 않을 테고···. 판매량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사실 번거롭기만 하고 별것 아닌 금액 때문에 어수선해지기만 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사도님! 이 여름에 직공을 추가로 데려와서 교육하기도 힘들고, 교육했다가 수익이 안 나는 위험성도 고려해 주셔야지요.”

“여름엔 양털이 새로 나지 않으니 재료 쪽도 다양하게 만들려면 아무래도 연구 비용이 들고요.”

칼레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고 조합장들은 신나는 표정이 되었다. 말이 그렇지, 올가을 수확 끝나면 겨울 가내 부업으로 눈독 들일 사람이 널린 건 조합장들도 알고 칼레도 알고 카트리야도 안다.

“그 대신···.”

카트리야는 자신이 새로 떠 낸 것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급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손톱만한 하얀 꽃잎은 제법 입체감이 있어서 그럭저럭 아름다워 보였다.

장식성 강한 입체 뜨개질이 이 세계에서 낯설다면, 그건 기술보다는 단가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 손으로 뽑는 실이 비싸니 뜨개 인형도 덩달아 비싸진다. 하지만 이게 ‘돈이 된다’고 판단하는 순간, 카트리야보다 훨씬 손재주도 상상력도 좋은 사람들이 이 세계의 취향에 더 잘 맞는 인형들을 뽑아내기 시작할 거다.

어차피 장기적으로 큰 이익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박리다매로 가자.

전생에 화분을 너무 죽이다 못해 죽지 않는 꽃을 갖고 싶어서 배운 뜨개질이었다. 작은 인형과 동식물 도안은 이것저것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건 어떨까요? 앞으로 3년, 제가 방직 조합에 제공하는 ‘모든’ 뜨개 인형 및 장식에 대한 저작권료를 같은 조건으로 계약하겠습니다. 인형은 사람 동식물 합쳐서 최소 10종 이상, 장식은 그 두 배 정도는 됩니다. 원하신다면 최소 제공 도안 수까지 계약하도록 하지요. 뱀 인형 하나라면 반짝 팔리고 그만이겠지만 이후로 계속 비슷한 인형을 만들어 낸다면 꾸준한 수요가 생길 테고,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가장 다양한 도안을 받아 보신다면 직공들을 훈련할 때도 유리해지시겠지요. 그럼 판매가의 1할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상황이 되지 않으실까요? 이 정도면 타협안이 될까요?”

물가에 대한 감각은 없지만, 충분히 관대한 제안이라는 건 칼레의 표정을 보면 안다.

“···꽃이군요. 겨울에도 지지 않는.”

방직 조합장이 만들다 만 꽃잎을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려 보았다.

“여러 장 만들어서 겹치고 초록색으로 잎을 붙이면 꽤 그럴듯해져요. 천이나 종이로 만들 수도 있지만 겨울엔 잘 어울리지요. 이렇게도 쓰고요.”

카트리야는 오늘 새로 뜬 뱀의 머리 위에 작은 꽃잎을 올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귀여워진다. 역시 인형에는 커스텀 장식이 필요하다.

전생에 인기 좋던 수세미 디자인, 거북이나 너구리는 여기서도 잘 팔릴 것 같았다. 과일 도안을 월별로 하나씩 공개해서 1년이 지나면 과일 바구니 하나를 완성하게 되는 프로젝트도 꽤 즐거웠다. 여긴 종교 국가이니 아기 인형에 수호성인 옷 같은 걸 차례차례 뽑아내서 갈아입히게 해 주는 것도 인기가 좋을 것 같다.

실제로 길드를 만들고 장인을 고용해서 생산한다면 돈은 더 벌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과 부딪칠 일도 늘어난다. 로열티를 받고 장인 몇 명만 상대하는 쪽이 훨씬 편했다.

칼레 추기경이 옆에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도안마다 새로 저작권료를 책정하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대성전의 인건비를 고려해 주시지요, 예하. 인형마다 하나씩 계약을 체결하면 서류가 최소 30배로 늘어날 텐데요.”

칼레는 무언가를 암산하는 듯 허공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대성전은 인력이 귀하다고 했으니 아마 ‘사도만 괜찮다면 그 정도의 손해는 감수할 만하다’는 결과를 내 줄 거다.

카트리야는 뒤늦게 덧붙였다.

“아, 예하 말씀대로, 흰 뱀 인형은 대성전에서만 제작하겠습니다. 덤으로.”

갈색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연한 하늘색’, ‘연한 초록색’ 같은 걸로 피해 가시기도 없어요?”

어째선지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정말, ‘속고만 살았나’가 절로 나오게 하는 건 전대 사도님하고 똑같으십니다.”

한참을 웃은 뒤 칼레 추기경이 살짝 눈물 고인 눈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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