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공모전참가작 새글

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2.17 14:00
연재수 :
99 회
조회수 :
3,826
추천수 :
433
글자수 :
505,999

작성
24.12.15 14:00
조회
27
추천
4
글자
12쪽

17. 요정의 밤 (2)

DUMMY

“어디 보자. 그럼 나중에 사도님이 알려 주시는 도안 중에서도 성화 아마란스··· 아니,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인형들은 전부 판매 대상에서 제외할까요?”

칼레가 덧붙였다. 조합장들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레는 서류에 무언가를 적고서, 조합장들에게 계약서 초안을 보내줄 테니 검토하고 만나자며 다음 약속까지 잡아 버렸다. 매우 빠르게 끝난 계약 상담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남았다는 이유로 칼레는 법황의 인형 재료도 같이 골라 주었다. 조합장들은 재료의 단가와 특성을 줄줄이 읊었고, 추기경은 교단에서 꺼리는 재료나 인형의 자세를 꼼꼼히 체크해 주었다. 날개를 펼치게 해 보고 싶다는 말에는 다 함께 머리를 싸매고 의논해서 답도 찾아 주었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강압적이었나 싶어 급히 사과했지만 모두들 사과할 필요 없다, 빨리 끝나서 좋았다고 칭찬해 주었다.

안심한 카트리야는 밥 먹는 시간을 아껴 가면서 열심히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다. 백조 왕자, 백조 왕자는 안 돼, 를 간간이 중얼거리면서 끊임없이 하염없이 쉴 새 없이.


“···사도님은 참··· 집중력이 좋으시네···.”

에드윈이 창밖으로 뜨개질에 열중한 사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루드비히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류에 서명을 했다. 밥 먹는 시간까지 줄이는 바람에 루치아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 중이다.

“본인이 즐겁다면 괜찮지만··· 과로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도님, 요즘은 두통 이야기가 없네요. 역시 세계수가 뿌리를 완전히 내려서일까요?”

알베르토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쪽도 열심히 서류를 체크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거름이라니, 세상에.”

“표현은 좀 그렇지만 크게 틀린 건 아닐 텐데요.”

두 남자가 뜨악해서 돌아 보았지만 루드비히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다양한 세계에 흥미를 가지고 잊혀진 신과 괴물의 이야기에 탐닉했지만, 세상에 상처받아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선량함과 다정함을 남겨둔 사람. 세계수가 깃들 깨끗한 부분이 남아 있지만 산산조각난, 그래도 이쪽 세계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다른 세계의 영혼.

신이 세계수를 뿌리내릴 상대로 사도를 선택한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다음 서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언데드가 갑자기 감소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다···. 또?”

뱀파이어 로드 토벌 이후 묘하게 언데드 출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종족 특성상 해가 길고 더운 여름에는 다소 움직임이 적은 편이지만 예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로드 토벌 직전까지는 2차 언데드 대전이 거의 확실하다고 할 정도로 활발했는데 요즘은 지원병 파견 요청도 거의 없었다.

루드비히는 턱을 고이고 보고서를 천천히 넘겼다.

“몇 번째 같은 보고가 올라오는군요···? 나이트급 개체가 목격되었지만 전투를 벌이기 전에 사라졌다··· 사라진 곳은 모르고···.”

평소와는 앞자릿수가 달라진 서류의 숫자들이 수상했다.

“···대륙 서부는 아직 연락망이 덜 회복되었지요?”

“예, 클레멘트 주교구 때문에요.”

주교구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대륙 서쪽에서 오는 각종 우편과 서류가 절반쯤 거쳐 오는 중간 집결지였다. 그래서 게오르그의 태업은 타격이 작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집무실 벽에 걸어둔 지도를 돌아보았다. 언데드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정보가 모이지 않는다. 서쪽이 빠져서? 그것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각지의 성기사들도 비슷한 의심을 호소하고 있었다. 언데드 대전 때 같은 분위기라고.

기억을 더듬어 지도를 손가락으로 훑어 나가면서 더더욱 인상이 찌푸려졌다. 상위 개체는 늘어나는데 전투가 줄었다는 부분이 신경 쓰였다. 그래봤자 나이트 급이지만. 전체가 통일된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셋··· 넷 정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듯한 보고였다.

긴 손가락은 서쪽 끝에 닿았다.

“연락망부터 최대한 빨리 복구시킵시다. 주교구에서 압수한 보고서 정리는?”

“그것도 아직···. 손이 부족해서···.”

“우선순위를 높여 처리하지요. ···인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력이 없다. 루드비히는 낮게 한숨을 삼켰다.

“사도님 서류 담당하는 사제가 총 3명이던가요? 한 명 뺍시다.”

“그럼 그 사람이 하던 일은 누가···?”

“···일단 재경소에···”

“사도님 직접 시키시죠?”

에드윈이 툭 하니 말했다. 루드비히의 시선을 받은 경호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씨는 아직 서투르다지만 그래도 슬슬 편지에 서명하는 정도는 되실 텐데요. 그리고 본인 재산도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고 관리인 결정하고 하셔야지, 그거 성전에서 계속 관리하면 말이 많아질 겁니다. 직공소에서 돈 들어오면 더더욱이요. 교육 충분히 받은 분이니 그 정도는 별로 안 힘들지 않을까요?”

“하지만···.”

“사도님은 정신이 아파서 기력이 부족한 거지 어린애도 바보도 아니잖습니까. 아니지, 보통 마음 아픈 사람이 업무 능력 떨어지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상당히 똑똑한 분일걸요? 막말로, 내일에라도 전쟁 터져서 대성전 사제들 우르르 참전하면, 사도님은 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길가에 내다 버리실 겁니까? 귀족한테 던져 주거나?”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카트리야를 대성전에서 독립시킨다는 생각이 어째 조금 꺼려졌다.

세상에 내보내기는 아직 조금 이른 게 아닐까. 아직 회복도 덜 됐는데 너무 부담이 크지 않을까.

루드비히는 고민에 빠졌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시간을 둘지 말지도 사도님이 정하실 문제 아니겠습니까요, 성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알베르토가 헛기침을 하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초대장 서명 정도는 사도님이 직접 해 주시면 편하긴 합니다. 초대장을 사도한테 보여주기나 했냐는 항의는 없어질 테니까요. ···그리고 청혼서 거절도 본인이 하는 게 모양새가···.”

그건 그렇지. 신심이 강한 귀족들도 슬슬 초조해하고 있다. 세계수를 직접 보고 싶다는 황제의 요구도 점점 노골적이 되어 가고 있고···.

···하지만 사도님이 또 상처받으면···.

“성하. 사도님이 결정하게 하시라니깐요. 그냥 상황이 이러이러한데 혹시 본인 업무 몇 개는 직접 해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기라도 하시지요. 사도님이 일을 받아 가서 성하 일이 좀 줄어들면 두 분이 보낼 시간도 늘어나고, 그게 장기적으로 좋잖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사도님 책상도 여기 하나 갖다 두고 둘이서 하루 종일 오붓하게 서류 처리해도 괜찮겠네.”

서류 처리가 어떻게 오붓한데. 그리고 그 상상에서 알베르토 사제는 어디로 갔는데.

후우. 루드비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도는 어린애가 아니다. 힘들면 알아서 말을··· 아니, 그 말을 못 하는 사람이니까 문제인 건데···.

···인력난은 어쩔 수 없다. 빨리 자라라, 신학생들아.

루드비히는 비브리다와 칼레 추기경에게 각각 사도의 업무 인수 의사 타진과 필요 교육을 부탁한다, 하고 짧게 요청서를 적어 서류 수발함에 던져 넣었다.

알베르토가 아 그렇지, 하고 덧붙였다.

“언데드 목격지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도가 언데드로 강림한 게 언데드 대전을 예고하는 거라고요. 세계수 소문이 퍼지면서 그쪽은 조용해져서 따로 이단 여부를 조사하지는 않았다는데, 알아는 놓으라더군요.”

사도가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상상력 풍부한 사람들 같으니.

루드비히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성전이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는 음모론은 사라지는 날이 없다. 아니면 전쟁 덕에 벼락출세한 젊은 법황이 또다른 전쟁을 바라고 있다는 그 소문이 아직도 인기가 있는 건가.

“지난 대전 때는 예고가 없었는데 이번엔 예고를 주실 거라고 생각한다니, 다들 어머니께서 좀 더 다정해지셨다고 믿는 모양이군요? 좋은 일입니다. 다음, 주방 예산··· 은···. 요정의 날 쿠키 1000개 추가 제조? 이걸 누가 다 먹습니까. 300개 밑으로 줄이라고 하세요. 반려합니다.”

나 혼자 200개는 감당된다는 에드윈의 참견은 묵살당했다.


요정의 밤이 다가오는 늦은 오후.

간신히 선물을 완성하고 어찌어찌 마무리까지 해낸 카트리야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대성전 주방을 찾아갔다. 요리사들이 바구니 가득 허브 쿠키를 담아 주었다. 동물 모양으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주방에서는 ‘사도님 말고 요정들한테 주는 거니까 사이좋게 나눠 드셔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하나는 꼭 요정들한테 주세요’ 하고 신신당부했다.

카트리야는 쿠키 바구니를 끌어안고, 헤이즐과 샐비어를 달고, 치유소로 가서 루치아도 불러냈다.

넷은 영빈관 건물을 올라갔다. 사도의 숙소는 2층이라 그 위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6층을 다 올랐을 때는 숨이 차서 입 앞의 베일이 살짝 젖었다.

기사들은 웃으면서 옥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눈앞에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하늘 한쪽은 이미 석양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성전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실로 압도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마물들이 날뛰고 있었다.

“난간에 올라가지 말라고, 이놈들아! 여기 6층 옥상이야!”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옥상 가장자리에는 어른 가슴 높이의 벽이 있고,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중간중간이 뚫려 있었다. 그 위로 신나게 기어 올라가는 어린이집 아이들과 올라가는 족족 허리를 잡아 끌어내리는 사제들의 장렬한 사투가 한창이었다.

“미아!! 여기서 떨어지면 성하도 못 살린댔지!”

“난 균형 잘 잡아서 괜찮은데~ 괜찮은데~.”

···괜찮긴 개뿔···.

“너네 루크 담장에 걸치지 말랬지! 위험하잖아!”

“루크도 아래 보고 싶댔어요!”

“거짓말이에요, 루크 말 못 해요!”

그건 다들 알아.

“선생님, 올리버 형 저 위에서 춤춰요!”

“춤은 춰도 되니까 바닥에서 추라고!!”

“미아, 올리버, 둘 다 당장 내려오지 못해!! 저녁 굶을래?!”

당장 내려오렴, 올리버.

샐비어와 루치아가 웃음을 터뜨리는 곁에서 헤이즐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넋이 나간 카트리야를 그나마 조용한 자리로 데려가서 깨끗한 천을 깔아 앉히고, 작은 솜뭉치로 귀마개도 해 주었다.

그리고는 팔을 걷어붙이고 어린이집 마물들의 제압에 합류했다.

“야 이놈들아, 사제님들 말씀 들어! 위험하게 어딜 올라가!”

샐비어까지 마물 제압에 합류하면서 옥상은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카트리야는 바구니를 끌어안고 그 난장판을 구경하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어린 여자아이가 옆에 다가와 바구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과녁 맞추기 대회 깍두기였던···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아이는 입을 반쯤 벌리고 바구니에 고개를 처박을 것처럼 몸을 기울였다.

“베일 언니 좋겠다, 과자 많아서···. 토끼도 있어···.”

“토끼 귀엽다···.”

옆에 다른 아이가 하나 더 늘어났다. 아이들의 손에는 조금 부서진 너구리 모양 과자가 하나씩만 쥐어져 있었다.

요정들이 과자를 먹으러 온다고 그랬던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67 성잔화
    작성일
    24.12.15 14:04
    No. 1

    아무래도 그정도의 일은 직접 해보는게 좀더 정신건강에 낫지 않나싶지만...
    하하하 애들은 어딜가나 애들이군요.
    잠시 눈을 떼면 어디론가 사라져서 사고치는 사고뭉치들...

    찬성: 1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주기 공지 24.10.09 72 0 -
99 26. 상처 받은 짐승 (1) NEW +2 23시간 전 5 1 11쪽
98 25. 울게 하소서 (5) +2 25.02.16 12 2 11쪽
97 25. 울게 하소서 (4) +2 25.02.14 14 2 11쪽
96 25. 울게 하소서 (3) +2 25.02.12 14 2 11쪽
95 25. 울게 하소서 (2) +2 25.02.10 18 3 11쪽
94 25. 울게 하소서 (1) +2 25.02.09 18 3 11쪽
93 24. 영혼이 가는 곳 (4) +2 25.02.07 23 3 11쪽
92 24. 영혼이 가는 곳 (3) +2 25.02.05 20 5 11쪽
91 24. 영혼이 가는 곳 (2) +2 25.02.03 18 3 11쪽
90 24. 영혼이 가는 곳 (1) +2 25.02.02 18 4 11쪽
89 23. 울지 않는 아이 (5) +1 25.01.31 19 4 11쪽
88 23. 울지 않는 아이 (4) +2 25.01.30 19 4 11쪽
87 23. 울지 않는 아이 (3) +2 25.01.29 20 4 11쪽
86 23. 울지 않는 아이 (2) +2 25.01.27 18 4 11쪽
85 23. 울지 않는 아이 (1) +2 25.01.26 22 4 11쪽
84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4) +2 25.01.24 23 4 11쪽
83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3) +2 25.01.22 22 4 11쪽
82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2) +2 25.01.20 24 4 11쪽
81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1) +1 25.01.19 21 3 11쪽
80 21. 불행의 편지 (3) +2 25.01.17 24 5 11쪽
79 21. 불행의 편지 (2) +2 25.01.15 26 4 11쪽
78 21. 불행의 편지 (1) +2 25.01.13 25 4 11쪽
77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2 25.01.12 22 4 11쪽
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29 4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28 4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27 4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27 4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28 4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30 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