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요정의 밤 (4)

큰 뱀의 날개는 우산살을 응용했느니 눈의 보석은 광채를 어떻게 확인했느니 등등을 설명하면서 잠깐 들떴던 카트리야는 금세 지쳤다. 성소 안쪽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머리 덩굴에 달라붙은 요정들에게 맥없이 쿠키를 건네주었다. 손가락만한 키, 몸통에 비해 조금 큰 나비 모양 날개, 중성적인 몸매, 곤충 같은 눈. 동화책에 나오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요정은 역시 신기했다.
조그마한 인간들은 쿠키를 야무지게 챙기면서도 머리카락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덕분에 테이블에 얹어 놓은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났다. 제딴엔 성탄절이랍시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된 기분이다.
“열세 마리. 많이 모였군요.”
요정이 몇이나 모였는지 열심히 세어본 에드윈이 신기해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또다시 쿠키를 내밀자 요정 하나가 포르르 날아올라서 쿠키를 받았다. 그 요정이 원래 자리에 내려앉기도 전에 다른 요정이 날아와서 자리를 가로챘다. 둘이서 날개를 팔락이며 싸우자 빛이 좀 더 어지럽게 흩어졌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루드비히가 요정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쿠키를 흔들었지만, 그쪽에 관심을 보이는 요정은 없었다. 자리싸움에 밀려 카트리야의 어깨에 앉은 요정들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카트리야는 성소의 나머지 구역을 훑어보았다. 다른 요정들은 쿠키에만 모여 있지, 이렇게 사람에게 붙어 있지는 않았다.
“요정들은 세계수를 좋아하는군요···.”
“그런 모양입니다. 저도 요정이 다 큰 인간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건 처음 보는군요. 마력이 강한 어린아이에게는 종종 접근한다고 합니다만.”
콘라드 추기경이 요정을 잡아 보려다 실패하고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요정잡이는 딴 데 가서 해 주시면 좋겠다.
“그래서, 이 요정들에게 쿠키를 주면 뭐가 되는 건가요?”
카트리야의 질문에 루드비히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되는 건 없습니다. 그냥 어머니의 피조물 간에 약간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것뿐이지요. 아이들이 쿠키나 간식을 건네주면 보답으로 다음 요정의 밤이 올 때까지 그 아이들을 지켜본다고는 하더군요. 가끔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는 요정도 있다는 모양입니다. 반대로 위험에 처한 요정을 구해주면 보답으로 작은 보석이나 약초 같은 걸 선물해 주기도 한다는데··· 저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요.”
알베르토가 가볍게 웃으며 쿠키를 흔들었다.
“그래도 귀엽고 예쁘잖습니까. 지금은 여름이 다가와서 이렇지만 겨울에 두꺼운 옷을 입은 요정들은 정말로 인형처럼 귀엽습니다. 무엇보다 요정이 나타나면 그 계절 동안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낸다고 하니까요. 저희 성전도 올해는 유례없이 즐거운 여름이 될 모양입니다.”
“그럼 요정들이 오지 않는 시기도 있는 건가요?”
환경이 오염되면 사라지는 건가? 반딧불이처럼?
루드비히는 반짝이는 요정들을 내려다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언데드 대전 동안은 성전 도시 근처에 요정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전장에서도 본 적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요정들도 돌아와서 한동안은 계절의 이음새마다 축제 분위기였지요. 평화가 돌아왔다고.”
“그 외에도 요정이 유난히 보이지 않던 계절에 지진이 일어났다거나, 폭우로 저지대가 침수되었다거나, 그런 식의 자연재해가 있었다는 이야기들이 간간이 있습니다.”
“저희 동네도 요정이 안 오더니 산불이 난 적이 있고요. 그런데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근처에서 뜨개 인형을 구경하던 사제와 기사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하군···. 신을 믿는 사람들도 계절점을 친다 이거지.
카트리야는 반짝이는 요정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도님은 요정도 안 믿으시는 겁니까?”
루드비히는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사도는 요정 자체를 처음 본다는 반응이지만, 추기경들의 말로는 사도에게서 천사나 요정 같은 신비한 존재들의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었다.
카트리야는 가볍게 웃었다. 요정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신의 존재를 믿고 ‘가르침을 따른다’는 뜻까지 포함하는 ‘믿다’의 개념을 적용할 이유가 없으니, 존재를 믿느냐 마느냐일 뿐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면 믿고 아니면 말고다.
“전생엔 안 믿었죠, 본 적이 없으니까요. 요정은 어린애들의 환상이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가짜 존재라고 했거든요. 적어도 제대로 교육받은 어른이라면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고요. 그래도 여기선 믿어야 하려나.”
기분 탓일까? 요정 이야기를 하자 요정들이 조금 얌전해진 것 같았다.
커다란 눈들이 카트리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치, 요정은 이렇게 존재하잖아.]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인정하는 세상에서 도대체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는 섭리를 어떻게 배우고 이해하시는 건지 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루드비히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카트리야는 노래하듯이 말을 받았다.
“그건 신학의 시녀라는 철학과 친해지면 해결되는 문제니까요. 보통 인간은 인지할 수 없는 어떤 생명이 존재한다는 설정의 창작물은 많았어요. 민담이나 설화도. 그래서 요정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고요. 예를 들면, 달이 뜬 밤에 요정들은 숲에서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데, 그 결과 숲에 ‘페어리링’이라는 풀 없는 자리가 생긴대요. 그걸 잘못 디디면 요정들의 세계로 넘어간다나요.”
요정들의 세계는 어떤 곳이려나. [반짝이는 날개가 어울리는 반짝이는 세계?]
“아기가 갑자기 말을 안 듣는 건 요정이 아기를 몰래 바꿔쳐서라는데, 이건 사실 영아 유기 풍습을 위장하려는 구실로 사용했다고도 하고···. 그렇지, 요정 세계를 지배하는 여왕이 있는데 더없이 아름답고 변덕스러운 존재라네요? 간혹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데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소원을 빌 때는 조심하라, 라는 경고가 있죠.”
이곳의 요정 여왕도 아름다울까.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하심은?”
“예를 들어 성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오믈렛을 만들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다 쳐요.”
“하찮군요.”
무심코 나온 대꾸에 카트리야는 피식 웃었다. 머리카락에 앉은 요정들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면서 계속 흥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요정 여왕은 그 소원대로 성하가 만드는 오믈렛을 정말정말 맛있게 만들어 줄 수도 있죠. 하지만···.”
갈색 눈은 조금 가라앉았다.
“성하가 오믈렛을 만드는 순간 세상의 모든 계란을 없애서 그 오믈렛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오믈렛이 되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럼 성하가 만든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오믈렛이 되겠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군요.”
루드비히는 중얼거리면서도 뭔가 고민에 잠겼다.
[그래도 소원은 들어줬잖아.]
“···말이, 되나···?”
그렇지, 어쨌든 들어는 준 건데.
“‘신도 요정도 대자연도 예측 불가능한 것이니 현혹되지 말라.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인간은 인간의 세상에, 저들은 저들의 세상에 머물게 하라.’ 이게 아주 오랫동안 전해온 가르침이었어요. 요정에게 소원을 빌고 매달리던 원시 시절, 요정을 피하던 시절을 거쳐 요정마저 지배하는 신의 시대를 지나 신을 부정하는 인간의 시대가 왔다··· 고도 하지요. 요정은 쇠락한 고대신의 후예라나요?”
[신은 재미 없지만.] 그렇지? [신은 재미 없어. 인간들도 지루해.]
맞아, 지루하다. 카트리야는 요정들이 날개를 팔락이는 것을 보며 웃었다.
요정은 귀엽다. 쿠키를 좋아하는 요정들의 세계도 멋지겠지. 이곳보다 훨씬 더.
[여왕님도 만나 보면 틀림없이 좋은 분일 거야.]
“신이 쇠락하는 동안 사제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를 여쭤보면 안 되는 상황··· 일까요?”
“사제들은, 타락했지요.”
권력에 취하고 돈에 취해서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게 만드는 신의 대리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신에게 등을 돌렸다.
[인간들은 원래 그렇지. 오래 살지도 못하면서 늘 싸우잖아.]
“맞아. 길어야 백 년 살면서 왜 그리 싸울 일이 많은지.”
인간 세상은 역시 조금 버겁긴 하다.
[나무들처럼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수백 년을 같은 숲에 사는 나무들은 서로 사이가 좋을까? 사이가 나쁜 나무가 있어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니까 좀 불편하지 않을까?
“아니면 약해서 정복당해서 신앙이 금지되기도 하고···. ”
[다람쥐랑 놀면 되니까 괜찮아.]
그런가, 다람쥐하고 놀면 되는구나. 다람쥐가 나한테도 와 주려나.
“사도님?”
[다람쥐는 착해. 세계수도 놀아줄 거야?]
아아, 그거 좋지. 전생엔 수입이 불규칙해서 반려동물을 들이지 못했지만, 언젠가 안정적인 직장을 얻으면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고 싶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따뜻한 생명을 곁에 두고 싶었다.
“다람쥐도 좋아.”
[달팽이도?]
“달팽이도 괜찮아.”
달팽이와 메뚜기와 귀뚜라미를 타고서 요정들도 놀러 와 줄 테지. 예쁜 날개를 반짝이면서. 요정 세계에서는 요정들도 말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이야기도 하고, 이슬로 된 술을 마시고, 아침 안개와 저녁노을을 먹고, 그러다 요정의 날이 되면 인간들을 구경하러 오는 것도···
“사도님!”
허리가 어딘가에 턱 걸렸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야 하는데. 다람쥐를 보러 가야 하는데, 이게 내 몸을···!
허리에 걸린 것을 뜯어내려고 했더니 어깨까지 걸려 버렸다. 굵은 나무가 몸 위로 잘못 넘어진 것 같다. 이걸 치워야 움직일 수가 있는데.
이걸 치워야···!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어라?
한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 카트리야는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황금빛 벽이 서 있었다.
요정들이 그 너머에서 화를 내며 날아다니고 있다. 몇몇은 멈춰서 버린 것에 짜증을 부리며 카트리야의 머리 덩굴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요정들을 향해 내민 손.
그 앞에는 성소 가장자리의 숲.
나, 숲 말고 다른 데 있지 않았던가.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있었지?
“사도님, 대체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귓가에 들려오는 숨죽인 비명.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팔. 등으로 전해지는 빠른 심장 소리.
인간이 등 뒤에 있다.
요정들을 향해 내민 자신의 팔에 커다란 손이 얹혔다. 그 손이 빠져나온 화려한 사제복 소매가 낯익다.
옷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 조심스럽게 팔을 감싸 쥐어 아래로 내리는 손길. 전부 내가 아는 것인데.
“카트리야 님!”
목소리도 낯익다.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 하나는 큰 은발의 남자가, 머리카락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정처럼 아름답지만 신이 점찍어 놓은 인간. 영원한 젊음의 땅에는 함께 갈 수 없는 자.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누구지?
손을 내밀어 남자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이 심장 소리를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는 사람인데. 누구였더라.
[귀하신 분의 인상에 남지 못한 이 미천한 신의 종의 잘못일 따름이지요.]
다시는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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