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요정의 밤 (5)

[**** 괴롭히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
신이 아끼는 다정한 아이의 이름이···.
[놀아 준다고 했잖아!]
요정의 칭얼거림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맞아, 그랬지. 약속했다. 내가 숲이 되어도 심심하지 않게 놀러 와 준다는 착한 다람쥐가 기다리는데···.
“저기, 다람쥐가···.”
요정을 가리키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다람쥐요?”
은발의 남자는 낮게 속삭였다.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요정들을 힐끗 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다람쥐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해도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 평소엔 좀 더 여유 있고 말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잠시만, 이쪽 약속이 먼저였나?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했지. 그러니까 이름이···. 아냐, ‘성하’는 이름이 아니다. 그것 말고 이름이 있는데. 누군가가, 이름을···.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을 다시 손으로 만져 보았다. 눈가를 쓸어 보았다.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했으니 기억해내야 한다. 이 인간의 이름. 내가 울었을 때 달래준 사람의 이름은···.
[루드비히를 보내 저희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눈물로 떨리던 목소리가 불쑥 떠올랐다.
“···루드, 비히.”
입에 잘 붙지 않은 이름을 천천히 중얼거렸다.
“루드비히.”
맞다. 루드비히. 법황 루드비히.
그 순간 흐릿해졌던 의식이 단번에 돌아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카트리야는 시선을 움직였다. 황금빛 결계 바깥의 바닥에 희미하게 빛나는 선이 있었다. 요정 세계의 경계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결계 너머에서 바락바락 짜증을 내던 요정들이 다시 결계로 들어와 머리 덩굴에 우르르 달려들었다.
“성하!”
날 선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루드비히가 카트리야를 더 세게 끌어안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움직였다. 법황의 품에 안긴 채 돌아보니 샐비어가 굳은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리며 요정들을 가로막아서는 참이었다.
신성력을 두른 검은 세계수는 상처입히지 못해도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요정들을 위협하기엔 충분했다.
요정들이 일제히 뒤쪽으로 날아올랐다. 기사와 사제들도 전투 태세가 되었다.
“···안전한 곳에 피해 계십시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안심시킬 겸 살짝 웃어 보이고서 품에서 떼어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요정들이 사도를 노린다면, 처치하면 그만이다. 요정과 싸운 경험은 없지만 신성력은 싫어하는 모양이고, 베거나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거다. 퇴치법을 모르는 언데드와 싸운 적도 있으니 문제 없···.
“워, 워, 잠시만. 잠시만요. 왜 다들 이렇게 호전적이시지?!”
카트리야가 급히 루드비히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멀리 선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쿠키 남은 거 있으면 줘 보시겠어요? 우리 평화로운 방법부터 시도해 봅시다.”
[[쿠키보다 세계수가 좋아! 우리랑 같이 놀기로 했잖아! 달팽이도 좋다고 했으면서!]]
요정들이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야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기사들은 여전히 요정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카트리야는 젊은 주교가 잽싸게 가져다준 쿠키 바구니를 받았다. 기사들을 조금 옆으로 밀어내고 잔디밭 위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요정 세계의 경계선 앞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초대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에 약속이 남아 있어요.”
살벌하던 요정들이 조금 얌전해졌다. 카트리야는 자신의 눈높이로 날아내린 요정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러 가기로 약속했거든요. 그 약속을 먼저 해 버려서 지금은 따라갈 수가 없네요.”
지구에서 설화 시대의 요정들은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자신들만의 논리로 움직이고 인간의 사정 따위 보지 않고 시공간 감각까지도 엉망이지만, 말의 힘을 소중히 여겨서 약속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럼 언제? 언제까지 술 마실 거야? 친구들이랑 다 같이 놀러 오면 안 돼?]]
요정들이 일제히 날개를 팔락이며 칭얼거렸다.
요정들은 말도 안 되는 약속조차도 곧잘 믿고 존중해 준다고 했다. ‘저 하늘의 달을 따 오면’이라고 하면 된다지만, 이 세계 요정들은 진짜로 달을 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카트리야는 성소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두 개가 사이좋게 떠 있었다. 이 세계의 달은 셋이라고 했었던가? 그럼 좀 세게 부르자.
머리 위의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저 하늘의 달이 열 개가 되면 다시 데리러 와 주시겠어요? 그때쯤엔 저도 여기 친구들하고 약속한 게 끝날 거예요.”
인간들과 요정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정들은 그 약속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인지 서로 마주 보고 달을 확인해 보고 하면서 부산스럽게 날아다녔다. 카트리야의 얼굴 주변으로 모여들기도 했지만, 다시 신성 결계를 통과해서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요정은 두셋뿐이었다. 그나마 아까보다 잡아당기는 기세가 약해진 걸 보니 화는 누그러든 것 같다.
다행이다, 이쪽 세계의 요정들도 인간의 양심 없는 사기 행각에 면역이 없구나.
카트리야는 요정들에게 바구니를 살짝 밀어주었다.
“이 과자는 약속의 증표로 드리겠습니다. 여왕님께도 말씀 잘 전해 주세요. 인간 세계의 달이 열 개가 되면 세계수가 그쪽으로 놀러 가겠다고.”
요정 한 마리가 다시 카트리야의 눈앞으로 날아와서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혹시 요정의 손가락은 한 손에 5개가 아닐지도 모르니 앙증맞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꼼꼼히 헤아려서 확인하고, 카트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열 개. 해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달이 열 개일 때예요. 그때 오시면 같이 가서 다람쥐를 소개받도록 할게요.”
끄덕끄덕.
요정은 무언가를 달성했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쿠키 바구니를 붙잡았다. 머리카락에 앉은 요정들도, 결계 밖에서 서성대던 요정들도 일제히 바구니를 붙잡고 날아올라서 페어리링의 경계선을 넘었다.
요정들의 모습은 어둠 속에 스르륵 녹아들었다.
혹시 돌아오지 않을지 잠시 지켜본 뒤, 카트리야는 손을 들어 여전히 밝게 빛나는 결계를 쓸어내렸다.
“이제 괜찮을 것 같네요.”
“···뭐였습니까?”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올려다보니 루드비히의 단정한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요정이 인간을 홀려서 자신들의 세계로 끌고 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티코어도 사도님을 납치하려고 했었지요. ···왜 인간이 아닌 자들이 사도님을 노리는 겁니까?”
알베르토도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카트리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트리야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채 뺨을 긁적였다.
“혹시 ‘제가 언데드와 요정에게 매우 인기 있는 외모’라는 농담을 해도 되는 상황일까요?”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구겨졌다. 루드비히는 한숨을 쉬며 결계를 지웠다.
역시 아니로군. 카트리야는 낮게 웃으며 루드비히가 내밀어 주는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결계가 사라지자 성소도 갑자기 어둠에 잠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어둠을 바라보며 카트리야는 부드럽게 지적했다.
“원하는 건 제가 아니라 ‘세계수’겠죠. 만티코어 때는 에다 씨의 시체로 움직였는데도 이미 제 영혼엔 세계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거고요. 쿠키도 그렇고 만티코어도 그렇고, 그런 걸 어떻게 알아채는 건지.”
“남의 이야기처럼 태연히 하실 말씀은 아니신 듯합니다만. 사도님이 위험해지셨다는 이야기인데요.”
에드윈의 질책에 카트리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언데드는 성도에 들어오지 못하고, 요정들은 달이 열 개가 될 때까지는 절 놔둘 것 같으니, 세상이 망하기 전엔 지금까지 하고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아마.”
문제는, 오히려.
카트리야는 싸움에서 한 발 피해 있던 추기경들 쪽을 돌아보았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트리야의 손을 잡고 몸 상태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다.
그 너머로 비브리다 추기경과 눈이 마주쳤다. 비브리다는 잠시 후 복잡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라고 입이 움직인 것 같다.
···그렇지. 더 이상한 문제는 따로 있지만,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을 꺼내려면 카트리야도 조금 생각을 정리해야 할 테고.
그래서 짐짓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살짝 돌렸다.
“요정이야 절 숲에 세워두고 싶다고 했지만, 언데드는 절 가져다 어디에 쓰려는 걸까요?”
“남 일처럼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진짜, 누가 무슨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알베르토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카트리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깨 앞에서 그러모아 보았다. 샐비어가 요정들을 견제하느라 검을 휘둘렀지만 덩굴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잎사귀가 조금 머리 위쪽으로 몰리긴 했지만 수가 줄어든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놀라서 자리를 피한 모양이다. 요정도 큰 영향을 주진 못했으니 아마 세계수 자체는 ‘무적’ 상태일 테지.
그럼 내가 위험한가? 그 부분도 조금 의문이었다.
“세계수가 필요하다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요? 제 상태에 따라 세계수 상태도 바뀌었으니까, 제 머리가죽만 벗겨내긴 어려울 테고, 팔다리 정도는 자르더라도 목숨은 붙여 사육해야···”
짜악.
칼레 추기경도 손이 많이 매웠다.
“너무해. 사도님은 진짜 너무하다고. 왜 매번 자기 몸을 그렇게 말한데.”
에드윈이 툴툴거리면서 망토의 깃을 세웠다. 루드비히도 한숨을 삭였다.
모처럼 좋은 옷을 입고 축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온통 들뜬 분위기였다. 길거리엔 가판이 줄줄이 서 있어서 평소보다 두세 배는 어수선했다. 올해는 머리에 나뭇잎을 주렁주렁 매다는 게 유행이 된 덕분에, 세계수를 성긴 베일로 살짝 가린 사도의 모습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얼굴은 마법으로 바꿔서 낯설지만 옆에 있는 샐비어의 붉은 머리 덕에 미행도 어렵지 않았다.
“거기 용병분들, 애인한테 줄 선물 안 사시렵니까? 이게 지금 유행하는 뱀 인형인데!”
방직 공방이 뜨개 인형 가판대 주인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집에 가면 더 예쁜 게 있습니다. 루드비히는 속으로 대꾸하면서 가판대를 지나쳤다. 생일 선물로 받은 큰 뱀은 내일쯤부터 한동안 대성전에 전시할 예정이지만 작은 뱀은 이미 성소에 고이 넣어 두었다.
힐끗 눈으로 세어 보니 색색깔 뱀이 꽤 많았다. 축제에 맞춘다고 직공들 강제 야근시킨 건 아닌지 나중에 체크해야겠다.
“에이, 주인장, 뭘 모르시네. 내일부터 대성전에서 흰 뱀 인형도 판다는데, 기왕 사는 거 그게 더 좋지.”
에드윈이 말을 받아쳤다. 주인장은 그건 기도용이고 이건 노는 거야, 애들한테는 이게 좋지, 하고 열심히 장점을 어필했다. 루드비히는 에드윈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말상대는 왜 하고 있어.”
“우리 매상 올려서 예산 확보해야지. 돈 없어서 쿠키 아껴 만드는 가난한 집이잖아. 가장아, 힘내.”
에드윈이 낄낄거리면서 루드비히의 등을 두드렸다.
- 작가의말
여전히 입으로 매를 버는 타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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