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탕녀 엘피에라 (3)

“그래서 궁금한 김에 내가 의뢰를 맡아 봤지. 그랬더니 짜잔, 아무 일이 없네?”
루드비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상하네. 네가 지나가는데 언데드가 숨는 거면.”
비슷한 이야기를 처음 만났을 때 루드비히가 했었다. 언데드가 자신을 보고 습격도 도주도 하지 않는 건 전투 경험이 있는 상위 개체가 통솔하기 때문이라고. 결과 뱀파이어 로드를 만났다.
엘피에라는 맥주를 마저 비우면서 웃었다.
“그치, 우리 언데드한테 인기 많잖아. 그래서 계속 뒤통수가 당기는 거야. 언데드가 뭘 꾸미는 거면 상위 개체가 하나쯤 나올 때가 됐는데 왜 안 보이나 하고. 그런데 엉뚱한 데서 뱀파이어 로드가 나왔다네? 심지어 법황 직접 토벌, 신의 사도가 무려 좀비로 강림? 그래서!”
따악. 엘피에라는 손가락을 소리 내서 튕겼다.
“깨달음이 왔어. 다 어머니의 은총이시지.”
“어머니께서 집 나간 딸한테 무슨 깨달음을 주셨는데?”
“너넨 그 울보 새끼 때문에 보고가 안 들어가서 파악이 느렸을 텐데···.”
“아, 사도님 앞인데 말 좀 곱게 하자.”
에드윈이 인상을 찡그렸다.
엘피에라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이 귀를 파는 시늉을 했다. 그 보답으로 에드윈은 엘피에라의 의자 다리를 걷어찼다. 의자는 바닥을 굴렀지만, 엘피에라는 의자가 쓰러지기 직전에 몸을 일으켜 매우 자연스럽게 다시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두 손이 허공에서 지도를 짚어 나간다.
“봐, 루치아 가도하고 클레멘트 주교구 둘, 어쩌면 한두 군데 더 언데드가 모인다 치자.”
루드비히는 집무실 지도를 짚어가던 기억을 떠올렸다. 언데드가 서너 군데로 모이고, 양보다 질에서 변화가 있었다. 에드윈도 다시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루치아는 십중팔구 은신처야. 아직 찾아내진 못했지만. 그럼 클레멘트 쪽은 행동대지. 왜 뱀파이어 로드가 대륙 한가운데까지 들어갔을까. 원하는 게 그쪽에 있어서겠지? 하나 더. 올 초부터 언데드가 늘어나서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사도 강림 다음엔 출현이 줄었어. 사실 우리 눈에만 띄지 않는 거지 숨어서 세력을 늘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엘피에라는 다시 벽에 도달해서 빙글 돌아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맥주잔에 달라붙어 있는 카트리야를 가리켰다.
“언데드는 올 초부터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발견해서, 더 이상 인간들 속을 헤집을 필요가 없어진 건 아닐까?”
방 안의 시선이 하나둘 카트리야에게 모여들었다.
잠시 내리깔린 무거운 침묵을 깨고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기가 살짝 안 맞아. 언데드가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사도님이 강림하시긴 했지. 그런데 언데드는 2월 중순부터 줄기 시작했고, 체칠리아 기사단은 사도님을 3월 말에야 발견했어. 맞지요, 헤이즐 경?”
“예, 성하. 틀림없습니다.”
“네 주장대로라면 언데드는 연초부터 줄어 들었어야 해. 그러고도 무려 2달 동안 사도님을 방치했다는 건데,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엘피에라는 팔짱을 끼고 항의했다.
“사도 강림 계시는 2월 중순이었잖아. 사도님 그때 강림하신 거 아니었어?”
“사도님이 강림한 신체는 연초에 사망한 게 확실해. 계시야 어머니께서 우리가 알 준비가 되었을 때 내려 주시는 거지. 시간 딱 맞지 않는 거 알면서 그래?”
루드비히도 단호하게 대꾸했다.
대화를 들으며 타임라인을 계산하던 카트리야는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다시 시선을 집중해 주었다.
“기사단이 절 발견한 게 3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전 그 2월 중순 근처에 이 세계에 온 것 같은데요.”
우울해서 집 안에서 굴러다니고 숲속에 널브러져 있고 해서 시간 감각은 좀 없지만, 그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헤이즐이 뺨을 긁적였다.
“음, 사도님. 에다 씨가 사망한 건 올해 초입니다만···. 시간 감각을 조금 잃으셨던 게···?”
그게 무슨 상관인데. 카트리야는 잠깐 헤이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는 가운데 찬찬히 대화를 복기해 보고 나서, 비로소 문제점을 깨달았다.
“혹시 에다 씨가 죽자마자 제가 시체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계셨어요···?”
“아니었습니까?”
루드비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카트리야는 기억을 더듬어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바로’는 아니다.
“아마 아닐··· 걸요? 제가 눈을 떴을 때는 몸이 이미 좀··· 그, 안 좋은 상태라서···.”
집안엔 먼지가 앉아 있고 몸은 살짝 부패가 시작된 시체였다. 거울로 본 에다 씨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사도님이 들어간 뒤에 썩지 않는 수준으로 느리게 부패한 게 아니라? 사도님이 들어간 뒤에 부패가 완전히 멈춘 거였습니까?”
재차 확인하는 바람에 카트리야는 살짝 억울해졌다.
“그래서 거름이라고 했잖아요, 전 처음부터 썩어 있었는데···.”
좀 삭힌 다음에 세계수를 심었다고 생각했다가 등짝까지 얻어맞았거늘.
엘피에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자신의 가설을 빠르게 수정했다.
“그럼 에다 씨의 시체를 확보하려고 움직였다가 사도님이 강림하는 바람에 한발 물러났다는 거지···.”
인간보다 먼저 알았나? 에다의 시체에 세계수가 심긴다는 걸? ···언데드가 에다를 제때 찾아냈다면, 여신은 그래도 사도의 영혼을 에다에게 심었을까?
그렇다면 더 끔찍한 예상 쪽이 맞는지도 모른다.
엘피에라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신의 사도님. 당신, 진짜로 신이 인간에게 보낸 사도가 맞아요? 언데드에게 보낸 사도가 아니라?”
“엘피에라!!!”
연장자 셋이 거의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엘피에라는 루드비히를 노려보았다. 초록색 눈이 서늘하게 타올랐다.
“사도 강림을 인간보다 언데드가 먼저 알았다는 거야. 그럼 그것들이 뭘 더 알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 안 들어? 세계수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들이 세계수를 눈앞에 두고 없애지 않고 후퇴했어. 이건 지금 언데드가 사도님이 강림한 이상 세계수는 나중에 탈환해야 한다고 판단한 상황 아냐? 그럼 사도님이 누구 편인지 확인하는 게 제일 급한 거 아닌가?”
좀 무례한 것 같지만 흥미롭고 타당한 이론이었다. 이 가설을 추기경들이 들으면 반응이 재미있을 텐데. 하지만 이쪽은 반증이 있었다.
카트리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전 인간의 사도일 거예요. 좀비하고 말이 안 통했거든요. 아무리 언데드라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대하고 편을 먹기는 힘들겠죠.”
그 말에 모두가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루드비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이 안 통하셨··· 다 하심은···?”
“저희 마을? 좀비들끼리는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던데 저하고는 말이 안 통하더라고요. 절 싫어하기도 했고요.”
그래. 끄어어어 합창단은 내게 차가웠지. 그 속에서 꿋꿋이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를 따라 하던 추억을 떠올리며 카트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그거 혹시 날 찾고 있던 건가?
“···좀비한테··· 말을 걸어 보셨다고요? 왜요?”
제이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좀비일 때 말이 가장 잘 통하던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또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해 버린 건가, 하고 경계하면서 카트리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동족 간··· 친목 도모···?”
루드비히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엘피에라는 한순간 벙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날이 서 있던 것이 싹 날아가는 경쾌한 웃음이었다. 너무 웃다가 쓰러져서 배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러다니기 시작해서, 샐비어가 밟아서 멈췄다. 나머지는, 심지어 엘피에라의 동료까지 모두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까지 이상한 생각이었던 것 같지 않은데. 나름 적응하려고 노력한 건데.
카트리야는 살짝 상처받았다.
“아, 대박. 대박이야. 사도님 진짜 굉장하시네.”
엘피에라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면서 샐비어의 다리를 잡고 일어섰다.
“증명 고마워요. 그럼 우리 인간의 사도님. 언데드가 세계수를 욕심내는 이유는 뭘까?”
“그건 모르지요. 비브리다 예하가 이유를 찾고 계세요.”
“사도님의 의견은?”
“의견보다는 근거 없는 망상뿐이라.”
“그 망상을 꼭 청해 듣고 싶습니다.”
카트리야는 빈 잔에 다시 맥주를 채우며 어깨를 움츠렸다.
“세계수가 그냥 언데드를 몰살시키는 무기라면, 언데드는 절 바로 죽였겠죠?”
루드비히의 세계수는 그런 것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능력이 있다 쳐요. 세계수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거나 세계 생성의 중심이죠. 그렇다면 언데드는 다른 세계로 모험을 떠나거나 언데드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거 아닐까요?”
젊은 쪽 누군가가 헉, 하고 비명 같은 숨을 삼켰다. 연장자들도 표정이 싹 굳어졌다.
좀비일 때 느꼈던 그 소외감. 세계의 모든 생명에게 외면당하는 느낌. 언데드 토벌대가 도착한 순간 숲이 깨어나며 환호하던 그 감각, 거기서 느껴지던 열등감과 분노.
다른 언데드도 그런 감각을 느낀다면? 그래서 ‘이 세계에 속하지 못한 존재’가 자신들의 세계를 원한다면? 요정과 달리 언데드에겐 세계가 없다. 그러니 만들거나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 세계수는 필수 재료일 것이다.
세계수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이질적인 존재가 섞여서, 아니면 세계수가 아직 덜 자라서 언데드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어 세계수가 좀 자란 다음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보는 게 논리적이지 않을까?
만티코어의 세계수 납치 미수는 멋대로 한 행동이거나, 언데드끼리 의견이 안 맞아서 나온 행동인지도 모른다.
“세계수로 그런 게 가능합니까?”
헤이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종교 이론을 잘 아는 연장자들은 아직도 경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각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카트리야는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원래 세계수는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세계수가 거대한 나무일 때는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같은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머리카락 꼭대기에 올라가 봤자 정수리밖에 없다. 정수리에 이계로 가는 포탈이 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사도님을 통해서 세계수 본체를 소환한다거나, 그런 게 필요하다는 건데···.”
엘피에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카트리야도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언데드가 그런 방법을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지식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건 마치···.
“만약에 엘피에라··· 님의 주장이 맞다면 말인데요···?”
루치아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약간 해쓱한 표정이었다.
“언데드들이 사도님의 존재를 주시하고 있다 치면요. 2차 언데드 대전은 사도 탈환전이 된다는 건데··· 그럼 언데드가 대성전에 침입하나요? 그게··· 가능할까요?”
“성전 도시의 강대한 신성력은 어차피 인간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
루드비히의 청회색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도시를 포위하고 모든 인간을 학살하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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