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탕녀 엘피에라 (4)

루치아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카트리야도 약간 속이 안 좋아졌다. 성전 도시의 인구는 3천명 정도지만, 이 세계의 총인구는 200만 명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 사람들에게 성도는 자신에게는 인구 천만의 도시, 그러니까 서울에 가까운 느낌일 것이다. 그걸, 전멸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뭐, 재미있는 생각이긴 하네. 확증은 없지만.”
엘피에라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람들의 굳어진 표정은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도한테 진짜 문제가 없는지 확인도 하고, 법황한테 정보도 좀 캐내고, 필요하면 내 정보도 주고, 그러려고 계율을 어긴 거야. 나 이번까지는 진짜로 얌전히 지냈다, 알지?”
에드윈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의자 등받이에 턱을 고였다.
“다음 달이면 사면 심의가 시작되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올 정도로 급해 보이든?”
물론 엘피에라의 가설이 맞다면 대책은 빨리 세울수록 좋다. 성전 도시의 방어에 신경을 쓰거나···. ···아니면 신의 사도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빼내야 한다. 그러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아니, 난 사면 신청 안 해서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사도 강림 예배에 요정의 밤까지 겹치면 경비가 좀 소홀해질 것 같길래 그냥 질렀지?”
그 말에 에드윈이 루드비히를 돌아보았다. 루드비히는 눈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네 사면 신청서, 결재 끝났다.”
“···내 사면 신청? 그걸 누가 했어? 난 안 했는데?!”
엘피에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차피 사면 신청은 보증을 서는 사제가 올리게 되어 있다. 본인 신청서는 위조 서명 같긴 했지만 결재 라인의 모두가 흐린 눈으로 넘겼고 최종 결재도 그러려니 하고 끝냈다.
에드윈이 머리를 긁적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꽤 그럴듯한 이야기인데 넘겨짚는 부분이 너무 많네. 세계수를 찾는 목적 부분이 특히나. 심증만 가지고 움직이자니 일이 크고, 무시하자니 너무 위험하고.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법황 성하.”
루드비히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턱을 쓸어내렸다.
“일단···. 파문 규정을 어기고 성도에 진입한 죄를 정보 제공으로 상쇄할 수 있을지부터 따져야겠지. 그러니까 연행은 해야겠는데.”
엘피에라가 조용히 루드비히 옆으로 다가섰다. 앉아 있는 루드비히의 어깨에 허벅지를 기대면서 반대쪽 어깨를 손으로 슬쩍 끌어안더니, 슬그머니 옷깃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은빛 머리와 엉겨들었다.
루드비히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길과 함께 끈적해진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자기야아, 우리가 지낸 시간이 있는데···.”
“법황 희롱죄 비싸다.”
루드비히가 냉정하게 엘피에라의 손을 치웠다. 엘피에라가 쳇, 혀를 차면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야박한 놈. 어떻게 한 번을 안 넘어오냐, 진짜.”
“장난치지 말고. 아무튼 이번 규정 위반 정도는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후로도 용병 쪽 정보가 필요할 것 같으니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아?”
에드윈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 고민한 뒤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샐비어와 헤이즐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렇지, 하고 탄식하면서 에드윈은 목 뒷덜미를 문질렀다.
“파문 철회 심사는 별개라고 하실걸.”
루드비히는 존재감 없이 구석에 구겨져 있는 엘피에라의 동료를 힐끗 보았다.
“저쪽도 파문당한 건 아니지? 저쪽이 연락책이 되는 건?”
남자는 급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법황 성하. 외람되오나 그, 저는 일개 용병에 불과해서 중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안 되냐고 눈으로 묻자 엘피에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파문당한 치유 사제는 귀한 몸이야. 난 여기저기 목숨 빚 받아낼 게 많아서 정보 수집도 수월하고 몸 숨길 구석도 많거든. 대성전 끄나풀이 돼도 무사하지. 저 친구는 아니고.”
루드비히는 한숨을 삭이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저 ‘보고했다 괜히 소란 피웠다고 욕먹을지 몰라서 숨기는 정보’가 한동안 절실해질 것 같은데.
희사령 심사에서 파문이 철회되려면 한두 달은 걸린다. 언데드가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데 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파문이 철회되더라도 한때 파문당했던 전직 주교를 법황이 매번 불러들이기는 이상하다. 사제도 아닌 사람이 법황이나 고위 사제를 만나려면 매번 알현이나 접견 신청도 넣어야 하고, 당연히 우선순위가 밀린다. 필요할 때 급하게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몰래 접촉하기에도 방법이 없었다. 경비대를 매번 따돌리기는 힘들고 루드비히가 몰래 빠져나오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카트리야는 루치아를 쿡쿡 찔러서 지금 사람들이 뭘 고민 중인지 물어보았다. 속닥속닥 상황 설명을 듣고서 테이블에 턱을 고인 채 엘피에라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웠다.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상대를 굳이 달고 다니는 자학적인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데드가 나 때문에 섬멸전을 벌일 가능성이 쥐꼬리만큼이라도 있다면, 최대한 협조를 하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
고민은 짧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침묵은 그보다 더 길었다.
카트리야는 테이블에 붙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세계수 덩굴이 사르륵 쏟아져 내려 멍청한 얼굴을 가려 주었다.
“샐비어 경.”
“예?”
“샐비어 경은 성하한테는 깍듯하신데 엘피에라··· 씨한테는 좀 허물이 없으시네요. 왜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샐비어는 순간 이 상황에 뭘 물어보는 거냐는 표정을 잠깐 지었다. 하지만 대답은 성실하게 나왔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민망합니다만···. 성하와는 사적인 교류가 없었습니다만, 엘피에라와는 신학교 시절에 잠깐 사귄 적이 있어서요.”
연인?
카트리야는 엘피에라를 돌아보았다. 법황한테 집적거린 건 장난이고 여자만 좋아하는가?
“엘피에라 씨는 여자가 취향이신가요?”
“어머니께서는 우리에게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상대의 외모나 성별 같은 데 구애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중요한 건 영혼이지.”
엘피에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카트리야는 잠깐 그 얼굴을 보다가 다시 샐비어에게 눈을 돌렸다.
“그럼 샐비어 경, 엘피에라 씨하고 계속 얼굴을 마주쳐도 괜찮으신가요?”
“···공사 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카트리야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피곤하고 예민한 기분은 술 때문인지, 아니면 엘피에라 때문인지, 여기서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해야 하는 일은, 해야지.
“법황 성하. 신의 사도로서 정식으로 요청드리겠습니다. 파문당한 전직 주교 엘피에라를 제 개인 호위로 임명하고 싶으니, 파문을 취소하고 대성전 출입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천재다!”
에드윈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법황 알현에 비하면 사도의 호위가 사도를 만나는 절차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무조건 최우선 순위였다. 사도가 법황을 만나는 데에는 아무 절차가 필요 없다.
루드비히도 순간 혹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실례지만 반드시 엘피에라여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신의 사도 아니겠습니까.”
카트리야는 한 일 없이 진이 빠져서 느릿하게 대답하면서 엘피에라를 손으로 정중하게 가리켰다.
“여기에 이렇게, 세상 경험이 풍부하고 전투 실력도 출중한 여성이 있네요. 헤이즐 경이나 샐비어 경처럼 소속이 따로 있어서 차출될 일도 없고, 대성전 바깥에서 귀족을 상대하거나 제 재산을 관리해 주기도 수월해요. 동시에 대성전 출신이라 성전의 구조도 잘 알고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는 시간도 거의 들지 않으니 바로 업무 투입이 가능하겠지요. 이만한 적임자가 달리 있다면 굳이 엘피에라 씨가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있을까요?”
당연히 없다. 심지어 엘피에라는 귀족 출신이라 귀족 사회에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조건만 보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고용해야 하는 호위였다.
루드비히는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사도의 제안은 확실히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명안이기는 했다. 신의 사도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파문 철회 심의를 특례로 매우 빠르게, 매우 우호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도가 베풀어 준 좋은 기회를 낼름 받아먹자니 걸리는 부분이 있다.
“신의 사도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뜻대로 이루어져야··· 겠습니다만···.”
“습니다만?”
“···이런 말씀 올리기 실로 민망합니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피에라의 파문 사유··· 말입니다만···.”
루드비히는 심란한 표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옆에서 엘피에라가 낄낄거렸다.
“사도님이 애도 아니고 뭘 그렇게. 사도님, 저 ‘문란한 연애’ 때문에 파문당했어요.”
넴?
카트리야는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생글거리는 엘피에라를 바라보았다. 성숙한 여성이긴 하다. 사실 샐비어 경이 좀 더 섹시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에겐 각자 취향이 있으니, 이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의 금발 누님을 좋아하는 남자··· 와 여자들이야 당연히 많겠지. 그렇다면!
카트리야는 샐비어를 휙 돌아보았다. 샐비어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저하고 사귄 건 문제 없었습니다! 전 파문 안 당했잖습니까!”
휙.
루드비히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꾸했다.
“저하고는 아무 사이 아닙니다.”
긴 한숨을 내쉬고, 루드비히는 다시 한번 성호를 그렸다. 지금 생각해도 살짝 혈압이 오르는 이야기다.
“언데드 대전 때 말입니다. 전장에 남기는 무섭지만 돌려보내 달라고 매달리기는 자존심이 상했던 사제들이 일부러 징계에 해당하는 짓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보란 듯이 문제 행위를 해서 대성전으로 소환당하는 거지요. ···문란한 연애는 타격이 크지 않고 나중에 수습도 쉬워서, 애용되는 수단이었습니다.”
에드윈이 벽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비참한 표정이 되었다.
“엘피에라는 그런 놈들을 상대해 주고, 그것들이 자신과의 관계를 실수인 척 떠벌리는 것까지 눈감아 줬거든요. 그게 반복되다 보니 대성전에서도 경고로 넘어갈 수가 없어져서··· 일단 서임을 취소했다가, 같은 일이 반복되니까 결국 사제들을 타락에 빠뜨렸다는 죄로 파문했습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반대하긴 했습니다만··· 워낙 소문이 심하게 나서요.”
엘피에라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좀 멋쩍은 듯이 한쪽 귀를 문질렀다. 녹색 눈에 살짝 그리워하는 듯한 빛이 깃들었다.
“사실 얘들이 내 동기라 좋게 봐 주는 것도 있고···. 그때는··· 뭐,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나도 겁이 났던 거지? 쉽고 효과 좋은 현실 도피를 택했다고나 할까. 딱히 누굴 돕느니 희생하느니 그런 건 아니었어. 사실 다들 조금씩 미쳐 날뛰던 시절이거든. 하필 혈기 왕성한 20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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