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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2.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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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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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8. 탕녀 엘피에라 (5)

DUMMY

다들 그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성전 도시와 달리 황폐한 북쪽 땅도, 그곳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전쟁도 버거웠다. 제 손으로 닭 모가지 한번 비틀어 본 적 없는 젊은이들이 눈앞에서 친한 기사의 목이 썰려 나가는 걸 보면서 제정신일 리 없었다.

모두 어딘가가 무너졌다.

게오르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자면서도 눈물을 그치지 못해서 막사 밖에서 혼자 자는 날도 있다고 했다.

반대로 엘피에라는 혼자 밤을 보내지 않았다. 따뜻한 몸을 끌어안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다.

에드윈은 술을 끼고 도박에 뛰어들었다. 어떤 날은 약도 옷도 없어 피를 흘리며 벗고 다니고, 어떤 날은 일주일 치 식량을 땄다며 잔치를 벌였다.

루드비히는 폭력에 익숙해졌다. 세상 둘도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무표정한 가면처럼 만들고서, 규정을 어긴 사람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가 도로 치료해 냈다.

징계를 받고도 멈추지 못한 사람이 엘피에라 하나였을 뿐.

그래도 그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전장에서 신학생들은 사제가 되었다. 무너지고 망가진 채로 사람들을 지키고 싸우는 법을 배웠다. 어릴 때 꿈꿨던 완벽하고 고결한 사제는 되지 못했지만, 허술하고 바스러진 사제마저도 절실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엘피에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나마 탈주는 안 했으니 어머니께서도 눈감아 주신 거겠지. 난 신성력이 그대로 남았거든. 탈주 사제 중에는 신성력이 사라진 사람도 있는데.”

루드비히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 사면 심의 때는 신성력 보유 여부도 평가 기준에 넣기는 합니다. 그러니 엘피에라는 사면받을 가능성이 높긴 한데···.”

“사유가 사유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들 눈치가 말이죠. 사정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면 저렇게 되어서.”

에드윈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을 따라가 보자 제이크가 조금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 별명하고, 좋지 않은 소문만 들어서···.”

‘탕녀 엘피에라’. 소문에 없던 꼬리와 날개를 붙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카트리야는 엘피에라를 돌아보았다. 마주 보는 녹색 눈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직접 사면을 신청하지 않으신 이유는, 본인이 돌아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인가요?”

“그렇지요?”

“법황에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도? 거절하고 싶으신가요?”

엘피에라는 무심코 웃었다.

루드비히가 이 사도에게 약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에 차분한 분위기, 묘하게 서투른 몸놀림이 조금 만만해 보이는데, 방심하는 순간 요령 없게 급소를 찌른다. 머리 회전이 빠르지만 그걸 숨기는 재주는 없다. 어디 내놓아도 쉽게 적을 만들 사람이었다.

“사도님. 나는 원래 도와달라는 요청은 어지간하면 받아 줘요.”

엘피에라가 처음 부름을 받고 신에게 인생을 바치기로 결정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원칙이었다.

“그런데 내가 도와줬을 때 상대가 더 곤란해지면 이야기가 다르지. 날 호위로 삼으면 사도님의 평판도 악화될 거고, 대성전 이름도 지저분해져.”

“평판이야 엎으면 되지. 참전한 사람들은 파문 때 말 많았던 거 다 알아. 너하고 손도 못 잡아본 것들이 가짜로 고해성사했다가 징계 먹은 것만 해도 몇 번인데. 이 김에 돌아오지 그래?”

에드윈의 재빠른 참견에 엘피에라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에드윈. 우리 교단은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모든 나라에 전투 인력을 파견할 권한이 있는 집단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어머니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 거고. 파문이 그렇게 쉽게 취소해도 되는 처분은 아니잖아? 소문만큼 심하지 않았더라도 난 분명히 어머니의 가르침을 어겼어. 여기서 더 죄를 짓게 하진 않아 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한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를 넘겨 보았다. 루드비히도 마침 카트리야를 보고 있어서 눈이 마주쳤다. 루드비히는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사도님은, 정말 엘피에라로 괜찮으신 겁니까?”

“엘피에라 씨 본인이 돌아오고 싶으시다면. ···평판··· 은···. ···어차피 좋아본 적이 없으니까···. 사람은 안 만나면 되는 거고···.”

조금 흐릿해지는 갈색 눈을 보고 루드비히는 무심코 한숨을 삭였다. 카트리야는 가끔 자기 비하가 바닥을 치다 못해 도로 긍정적으로 돌아오곤 한다. 볼 때마다 새로웠다.

루드비히는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엘피에라의 앞에 서서 맥없는 금발을 내려다보았다.

“엘피에라.”

“하지 말자.”

엘피에라는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본인이 법황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정중한 존댓말로 돌아와서 ‘법황’은 담담하게 선고했다.

“신의 사도께서 직접 요청하신 일입니다. 파문을 철회하는 대신, 이후 심의회에서 지정하는 기간 사도님을 섬기는 손과 발이 되어 그분의 뜻을 받들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신의 사도께서는 그 어떤 위해도 입지 않으셔야 할 겁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어긴 데 대한 속죄는 그로써 갈음하겠습니다.”

“···그걸 법황이 혼자 결정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거부하는 경우 파문당한 몸으로 성도에 출입한 죄로 영구 파문 및 신체 절단형입니다. 물론 성도 출입을 도운 사람들 역시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협박까지 하는군. 진짜로 법황다워졌다.

엘피에라는 새파랗게 질린 용병 동료를 힐끗 보고 눈을 감았다.

솔직히 돌아가고 싶다. 허름한 숙소에서 홀로 하는 기도도 어머니에게 닿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번 축복받은 땅에 발을 딛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은 있었다. 그래도 그럴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대답은 차후 심의회에서 듣도록 하지요. 오늘은 연행만 하겠습니다.”

루드비히는 그 와중에 생각할 유예를 주었다. 엘피에라는 힘없이 웃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성하의 자상하신 배려에 그저 감읍하나이다.”

잠깐.

문득 엘피에라는 루드비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을 고용하려면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평판 문제는 이렇게 덮고 넘어간다 쳐도 하나가 더 남았을 텐데.

비슷한 타이밍에 카트리야도 살짝 손을 들었다.

“그런데 성하. 엘피에라 씨를 제 호위로 삼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뭐였나요?”

루드비히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조금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카트리야에게 되물었다.

“지금의 대화로 짐작이 되셨을 것 같습니다만.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뭐가 문제인가요.”

“보시다시피···.”

루드비히는 엘피에라를 힐끗 보고는 어째선지 약간 심술궂게 웃었다. 어린 시절 주위 사람들을 골탕 먹일 때 보이던 표정과 똑같다.

엘피에라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엘피에라는 상당히 독실한 신자입니다.”

별거 아닌 칭찬이 나와야 하는 맥락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의 사도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건 상당히··· 힘든 도전이 되겠군요···.”

대체 뭐가?


“신성력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미 어머니께서 죄인을 완전히 내치지는 않으셨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갱생할 기회를 주는 것 또한 어머니의 뜻이시겠지요.”

“성하의 말씀대로 사도님의 호위로 이보다 더 적절한 인재가 없기는 합니다. 죄인도 한때 유망한 추기경 후보였지 않습니까.”

“물론 대성전에 적을 두지 않는 호위도 원하신다는 사도님의 뜻은 존중해야지요. 허나 죄인의 평판을 생각하세요. 과연 사도님 곁에 두는 게 어울리겠습니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적절한 인재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사도님이 직접 지명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뜻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따라 드리면 어떨까요.”

“애초에 파문이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스른 결과이고···.”

길다.

추기경들의 설전 속에서 카트리야는 영혼이 털리는 기분을 느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제가 요청한 파문 심의회이니 물론 참관을!’ 같은 소리를 한 자신에게 꿀밤을 먹여 주고 싶다.

다른 일을 보다가 중간에 들어온 루드비히도 조금 지루한지 자세가 살짝 무너져 있었다. 옆에 앉아 다른 서류를 확인하면서 펜을 움직이고 있다.

엘피에라만 더없이 곧은 자세로 재판정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사도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죄인의 행동이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일이었다는 저희의 의견이 잘못되었습니까?”

로랑 추기경의 질문에 카트리야는 담담히 대답했다.

“교단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동이긴 하더군요.”

“교단의 가르침을 어기는 건 어머니의 뜻을 어기는 게 아닙니까?”

이게 지금 나한테 들어올 질문인가.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교리 해석의 최고 책임자께서는 ‘편히 말씀 나누시지요’ 하고 태평하게 속삭여 주었다. 최고 권위자 비브리다 추기경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모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리야는 한숨을 내쉬고 보조 재판정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의견을 제시했다.

“애초에···. 신이 전지전능하면 인간이 신의 뜻을 어기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요···? 그러니까 교단의 규율만 따지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했는데요···.”

참고인 석에 일제히 내리꽂히는 시선이 따가웠다. 루드비히가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불가능하다, 는 말씀은···?”

로랑이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카트리야는 별수 없이 말을 이었다.

“신이 ‘전지’하다는 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죠? 그럼, 여기서 ‘모든 것’이 무엇인가요?”

“이 세상의 모든 존재, 모든 생명과 모든 사건이지요.”

비브리다 추기경이 대답했다. 로랑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조금 사나웠다. 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는 원망 섞인 시선이었다.

카트리야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지한 신은 바다에 존재하는 모든 물방울의 수와 사막에 존재하는 모든 모래알의 수를 알고 계실 테고, 이 땅에 숨은 개미 하나하나의 이름과 밤하늘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별의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그럼 공간축이 아니라 시간축으로는요? 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고, 벌어지지 않은 과거와 오지 않을 미래, 그러니까 선택받지 않은 가능성이 만들어 냈을 모든 세계를 아는 존재인 게 아닌가요?”

공간축. 시간축. 낯선 단어지만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좋은 표현이었다. ‘바다에 존재하는 모든 물방울의 수를 아는 분’도 괜찮다. 개미의 이름··· 은 좀 그렇지만. 저 세계 사람들은 신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을 아는군. 언제 설교 때 쓸까 싶어서 루드비히는 서류 끝에 사도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러니 신은 엘피에라 씨가 하는 일을 알고서 묵인하셨을 테고, 엘피에라 씨가 아니라 누구라도 ‘신의 뜻을 어겼다’고 보긴 좀··· 어렵지 않은가요?”

중앙에 있던 엘피에라만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신의 사도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작가의말

고백하자면... 다른 사이트에서 관작이 20을 넘었을 때 '30에 연참을 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쪽은 작은 사이트라 노출도가 높거든요.

30이 되었는데 비축분이 없었습니다.

낑낑대며 비축분을 드디어 만든 오늘, 저쪽은 관작이 어느덧 40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관작 40 기념이라 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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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25. 울게 하소서 (2) +2 25.02.10 18 3 11쪽
94 25. 울게 하소서 (1) +2 25.02.09 18 3 11쪽
93 24. 영혼이 가는 곳 (4) +2 25.02.07 23 3 11쪽
92 24. 영혼이 가는 곳 (3) +2 25.02.05 20 5 11쪽
91 24. 영혼이 가는 곳 (2) +2 25.02.03 18 3 11쪽
90 24. 영혼이 가는 곳 (1) +2 25.02.02 18 4 11쪽
89 23. 울지 않는 아이 (5) +1 25.01.31 19 4 11쪽
88 23. 울지 않는 아이 (4) +2 25.01.30 19 4 11쪽
87 23. 울지 않는 아이 (3) +2 25.01.29 20 4 11쪽
86 23. 울지 않는 아이 (2) +2 25.01.27 18 4 11쪽
85 23. 울지 않는 아이 (1) +2 25.01.26 22 4 11쪽
84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4) +2 25.01.24 23 4 11쪽
83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3) +2 25.01.22 22 4 11쪽
82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2) +2 25.01.20 24 4 11쪽
81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1) +1 25.01.19 21 3 11쪽
80 21. 불행의 편지 (3) +2 25.01.17 24 5 11쪽
79 21. 불행의 편지 (2) +2 25.01.15 25 4 11쪽
78 21. 불행의 편지 (1) +2 25.01.13 24 4 11쪽
77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2 25.01.12 21 4 11쪽
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29 4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28 4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26 4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27 4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27 4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29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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