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졸리다.
졸리지만 일어나야 했다. 카트리야는 자신을 깨워준 사제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도 잠깐 이불을 휘감고 앉아 있었다.
졸리다. 눈물 나게 졸리다.
그래도 일어나자. 이건 어쩌다가 아침 7시 반에 조찬 회의가 잡힌 상황이라고 생각하자. 어떻게든 졸음을 이겨내서 늦지 않게 도착해야 했다.
눈치를 보는 사제를 안심시켜주고 일어나서 평소에 입는 사제복으로 갈아입고, 따스한 담요를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루치아가 가르쳐 주었던 길을 더듬어 갔다. 여기서 계단을 내려가서 이렇게 돌아가면 나가는 문이···.
···없네?
길을 잃었다.
한동안 복도를 헤매다가 겨우 나가는 길을 찾아냈다. 사실 좀 서러워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일인데 괜히 사서 고생하는 건 아닐까. 긁어 부스럼은 아닐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꾸역꾸역 없는 의욕을 짜내서 영빈관을 나섰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희미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움직이자 건물에 발이 막혔다. 건물을 빙글 돌아 소리를 따라가니 친위대 연무장이 나타났다.
이미 기사들은 한창 훈련 중이었다.
친위대와 성기사들이 둘러선 가운데, 낯익은 두 사람이 무시무시한 공방을 펼치고 있었다. 은발을 질끈 동여맨 루드비히와 싸우는 것은 당연히 엘피에라였다.
루드비히의 어깨를 빗맞힌 발이 연무장 바닥을 내리찍자 바닥에 깊이 구멍이 패였다. 엘피에라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루드비히의 팔이 엘피에라의 뒷목을 휘감았다. 엘피에라는 뒷목을 찍어 누르는 팔에 저항하지 않고 바닥을 휙 굴러 버렸다. 도로 간격이 벌어졌다.
“아, 사도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돌리자 루치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루치아 곁의 몇몇 기사들, 그리고 연무장의 낮은 담장에 군데군데 모여 있던 구경꾼들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시선이 쏠려서 조금 민망해졌다. 카트리야가 괜히 머리 덩굴을 쓰다듬는 사이 루치아는 허리 높이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달려왔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엘피에라 씨가 오늘부터 아침 훈련을 한다고 해서 구경할까 하고요. 오늘은 루치아 씨도 계셨네요?”
카트리야는 아침잠이 많아서 루치아를 보러 온 적은 없었다. 조금 섭섭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루치아는 그저 시원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훈련보다는 관전이지만요. 성하, 굉장하시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굉장한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루치아는 연무장의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와서 편히 구경하세요. 성하 다음에도 대련 계속 있을 텐데, 재미있을 거예요.”
주위 아가씨들의 시선이 순간 무섭도록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대부분 젊은 귀족 여성으로 보였다. 아마 법황이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모인 것 같은데 늦게 온 사람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게 좀 억울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저 사이에 끼어서 구경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카트리야는 루치아를 따라 연무장으로 들어가서 대기석의 긴 벤치에 앉았다. 친위대의 누군가가 재빨리 물을 가져다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젊은 기사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인사를 웅얼거리고는 도망쳤다.
그 사이에도 루드비히와 엘피에라는 살벌한 대련을 지속하고 있었다. 맨손 맨발로 싸우는데 연무장 바닥이 푹푹 패인다. 팔다리가 부딪칠 때도 살과 살이 부딪친다기보다는 가죽과 쇠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언데드가 아니라 인간이 상대인데.
“엘피에라 님, 진짜 잘 싸우네요···. 성하 상대로 저러기 쉽지 않은데.”
루치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성하가 우위··· 인 거죠?”
카트리야의 확인에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무심코 대답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의외로 호각일 수도요···? 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 건지 잘 모르겠다. 카트리야는 그 기사에게 다시 물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보통 여자 쪽이 체력이 떨어져서 불리해지지 않나요?”
사도가 루치아에게 한 질문을 가로채어 버린 기사는 조금 민망해하면서 루치아에게 눈짓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사도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엘피에라가 체력 관리를 꽤 잘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빠직.
좋지 않은 소리와 함께 구경꾼 사이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카트리야도 화들짝 놀라 연무장을 쳐다보았다. 엘피에라가 오른쪽 팔꿈치로 루드비히의 얼굴을 찍는 참이었다. 루드비히는 얼굴로 들어오는 팔꿈치를 막으면서 한발 물러서고, 엘피에라는 오른팔을 감싸 쥔 채 뒤로 크게 물러났다. 한순간 루드비히가 얼굴을 다쳤나 했는데 오히려 엘피에라의 팔 가운데가 살짝 뒤틀려 있다.
루드비히가 다시 앞으로 치고 나가서 엘피에라의 왼쪽 어깨를 후려쳤다. 그 짧은 사이, 엘피에라의 오른팔은 순식간에 도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카트리야는 입을 딱 벌렸다가 틀어막았다.
저 사람들이 지금 뭘 하는 걸까. 대련에서 뼈를 부러뜨리고, 그러고도 계속 싸우고, 심지어 대련 중에 그 뼈를 붙이고 있다. 저게 지금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인가?
반응이 너무 격했는지 주위의 기사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루치아가 멋쩍게 웃었다.
“평소 대련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잘 안 하는데···. 저걸 꼭 보여주겠다고 엘피에라 님이 고집을 부려서요.”
“지금 싸우면서 골절 치료한 거 맞죠···? 저래도 돼요?”
“원래는··· 못하죠, 보통. 예.”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선배들이 술 먹고 과장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저게 되네요···.”
젊은 기사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얼굴이 새하얘진 전투 사제가 신음을 내뱉었다.
“쟨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산 거야? 아무리 자기 몸이래도 저게 저 속도로 치료가··· 세상에···.”
“용병이 뭘 하면 저렇게 치료 경험이 쌓인대냐···.”
“저 정도로 독하게 붙으면 성하라도 이기긴 난감하지 않나?”
실제로 루드비히는 좀 지쳐 보였다. 타격을 주는 것보다 더 빠르게 회복하는 적을 이기려면 최소한 아주 끔찍한 장기전이 필요했다. 맨손 대련에서 골절상이 무시되는 이상 관절기로 꺾어서 항복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데 엘피에라의 저 유연한 몸놀림을 볼 때 그것도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당연히 법황 성하께서는 오전에 집무실로 출근해야 한다.
다시 한번 엘피에라의 관절을 꺾고, 또 치료하는 꼴을 확인한 다음.
루드비히는 결국 뒤로 크게 물러서며 손을 들었다. 출근도 하기 전에 이미 녹초가 된 표정이었다.
“기권합니다.”
“좋았어, 내가 이겼다!”
엘피에라 혼자 환호성을 질렀다. 기사들은 루드비히와 비슷하게 질린 표정으로 엘피에라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살짝 짜증 난다는 눈으로 엘피에라를 노려 보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수습 기사가 가져다주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카트리야의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 카트리야와 눈이 마주치자 지친 얼굴에 익숙한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뒤쪽 울타리 너머에서 작은 환호성이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련은 흡족하셨습니까? 사도님.”
카트리야는 조금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을 보러 왔다가 뭔가 셀프 고문을 보게 된 것 같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대답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친위대가 내미는 물을 받아 마셨다. 땀에 젖어 조금 달라붙은 훈련복을 떼어 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엘피에라가 얼마나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사도님께 처음으로 보여 드리는 대련인데, 기권패라 조금 민망하군요.”
엘피에라에게는 다음 도전자가 접근했다. 에드윈이었다. 치유 쓰지 말고 그냥 붙자, 곧 성하 출근 시간이라 바쁘니까 짧고 굵게 하자, 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오히려 기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길어졌으면 무슨 참사가 벌어졌을지···.”
누군가의 눈알이나 이빨이 날아가는 광경을 라이브로 보고 싶지는 않다. 그게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이 되는 것도, 사실은 도리어 기괴해서 무서웠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진심 어린 대답에 낮게 웃고, 살짝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어깨에 잘 둘러 주었다.
“사도님의 호위로 부족한 실력은 아니지요? 호위 경험이 부족해서 시야가 약간 좁은 게 문제이긴 하지만, 용병대에서 호위 업무를 한 적도 있다고 하고 친위대에서도 잘 교육해 줄 겁니다. 치유술 쪽도 보시다시피 속도만 따지면 저보다 빠르고요. 신성력도 풍부한 편이니 쓸 만은 하실 겁니다.”
“엘피에라 씨도 부활을 쓸 수 있어요?”
“2명까지 아슬아슬하게 가능합니다. 너무 아슬아슬해서 보통 연속으로는 쓰지 않지만요.”
젊은 기사들 몇몇이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카트리야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려 보았다. 1 부활이 3 루치아였던가? 그럼 엘피에라는 대충 6 루치아로군···. 법황이 7.5 루치아이니 약간 떨어지기는 하지만 법황이 워낙 엄청나다고 했다. 아무튼 1 루치아면 실전에서 부대 전담 사제가 될 수 있는 거니까.
연무장에서는 에드윈이 양손에 단검을 거머쥐면서 자세를 잡았다.
카트리야는 다시 입을 딱 벌리고 루드비히를 돌아보았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반짝이는 저 단검들, 왜 날이 시퍼렇게 서 있을까요?!
루드비히는 턱을 문질렀다. 엘피에라의 무기 다루는 솜씨도 한번 점검은 해야 하지만, 굳이 단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어차피 오늘은 엘피에라의 솜씨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우호적인 여론 형성의 밑밥을 까는 자리다. 무기가 뭐가 됐든 헛짓거리하지 않을 상대와 먼저 싸우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루드비히는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혹시 다들 아침잠을 못 자서 살짝 판단력이 떨어지신 건 아니죠? 아무리 단검이래도 진검으로 대련을 하신다고요?! 좀 위험하지 않아요?”
카트리야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속삭이고 있었다.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같은 반응이다. 하지만 카트리야는 대성전에 온 뒤 처음으로 아침잠을 아껴서 연무장에 나왔다. ‘신의 사도가 엘피에라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스스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우울해서 기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였던가.
루드비히는 혼란에 빠져 버벅거리는 카트리야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여기서 칼에 맞으면 곤란한 사람은 사도님 한 분뿐입니다. 사도님은 제가 성심성의껏 지켜 드리지요.”
“저 뒤에 구경꾼도 있던데요?!”
“다들 그 정도 각오는 하고 구경하시는 거 아닐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대성전의 책임자시면서! 저쪽도 지키셔야죠!”
“저, 사도님, 괜찮을 거예요···. 에드윈 경 솜씨면 진검이든 가검이든 뭘 맞아도 죽으니까 딱히 신경 안 쓰셔도··· 응?”
루치아가 옆에서 변명하다가 멈칫했다.
다행이다. 본인이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고 판단할 정신머리는 남아 있는 모양이다.
- 작가의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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