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사도님이 보시기엔 조금 잔인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전 생존율과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치유 사제가 충분할 때, 그러니까 제가 있을 때는 훈련은 과격하게 하는 편이지요. 통증이나 부상에 익숙해지고 다친 채로 싸우는 감각을 익혀 두면 실전에서 다쳐도 얼어붙는 시간이 짧아지거든요.”
루드비히는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건··· 알겠지만.
카트리야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폭력을 눈앞에서 보는 건 불편하다.
“역시 보기 불편하실까요? 이만 들어가시렵니까?”
다정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물었다.
카트리야는 자신이 루드비히의 훈련복 소매를 붙잡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푸른 눈이 조금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얼굴을 닿을락 말락 쓸어내렸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절반은 대련 때문이고 나머지 절반은 솔직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일 거다. 이 몸도 아침엔 저혈압이었다.
본의 아니게 엄살을 피운 기분이라 카트리야는 살짝 눈을 피했다. 어릴 때도 못 부린 응석을 이 나이에 부리게 되다니.
“저렇게 다쳐도 괜찮은가요? 그러니까, 크게 다치고 나면 고통을 피하려고 무의식중에 몸을 사리게 되어서, 상처를 입힌 상대가 껄끄러워진다거나, 크게 다친 부위는 나은 뒤에도 잘 못 쓰게 된다거나···.”
루드비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걸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을 실전에 데려가면 어차피 죽습니다. 서로를 위해 미리 걸러내야지요. 이곳 기사들은 이미 실전 경험도 풍부해서 과격한 훈련은 괘념치 않는 편입니다만··· 역시 사도님께서 보시기엔 불편하신가 보군요.”
방금도 엘피에라가 찍어 내린 단검에 에드윈의 팔이 찢어져서 피가 튀었다. 고작 법황 얼굴을 보겠다고 이걸 보러 몰려와 있는 구경꾼들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애초에 불편함을 무릅쓰고 온 목적이 있었다. 들어가라고 하는 건 혹시 또 내가 생각을 잘못해서인가.
“···그, 역시 제가 여기 온 건, 쓸데없는··· 굳이 할 필요 없는 일, 이었을까요···?”
들릴락말락 소심하게 한 질문을 루드비히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옷소매를 움켜쥔 손을 가볍게 다독였다.
“어려운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신의 사도에게 그냥 입발린 소리를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카트리야는 살짝 눈을 들었다. 루드비히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속아도 괜찮겠지.
“그럼 더 있을게요.”
쓸모가 있다면, 괜찮다. 참을 수 있다.
루드비히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카트리야를 내려다보았다.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냥 어깨 담요와 머리 덩굴을 한 번 더 정리해 줄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이 엘피에라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친위대가 아쉬워하는 걸로 두 번째 대련이 끝났다.
“루드비히이이이이이!!!”
햇볕이 따스하게 비쳐 드는 복도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 왔다.
법황 집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법황만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태연히 펜을 잉크에 담갔다.
“야 임마!!”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엘피에라가 달려들어 왔다. 루드비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불경죄로 다시 투옥해 버립니다.”
“너, 너!! 사도 교육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신의 사도가 대주교 바로 위가 부제급 추기경인지도 모르는데?!”
루드비히는 서류 끝에 서명을 하면서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교단 구조엔 별 관심이 없으시더군요. 어차피 다 사도님 아랫사람인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엘피에라는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에드윈이 부러뜨린 손목은 도로 멀쩡해져 있었다.
“무슨 문제냐니··· 사도가··· 사도가 상식이 없잖아···!!”
“신의 사도에게 상식이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재를 받으러 와 있던 주교와 추기경 중 몇몇이 슬금슬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곁눈질로 보면서 루드비히는 서명이 끝난 서류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깍지 끼고 엘피에라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엘피에라. 그걸 보완하라고 굳이 당신을 사면해서 사도님의 호위로 임명한 겁니다. 소리 지를 시간에 가서 사도님 교육을 하시지요.”
“법황이 천천히 배워도 된다고 했다면서 도망쳤는데?”
“잡아 오시지요. 활동 반경이 넓지 않은 분이니 멀리 안 갔을 겁니다.”
“아니, 그래도···!”
“사도님의 교육은 비브리다 예하의 담당이니 문제가 있으면 찾아뵙고 상의하세요. 법황에게 긴급 보고를 할 사안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야, 이게 왜 안 긴급해! 주교급 추기경이 주교랑 같은 건 줄 알고 있는데?!”
엘피에라는 답답해서 미치려는 눈치였다. 법황의 책상을 움켜쥐는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을 있는 힘껏 참고 있는 거겠지.
도대체 ‘신의 사도는 상식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건지 루드비히도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말 그대로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 어린이집에 보내는 건데. 추기경 위계에서 이렇게 절망하는 사람한테 나머지 교육을 맡겨도 되는 걸까?
“엘피에라··· 경.”
알베르토 사제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사도님의 상식을 논하기 전에 일단 본인의 말투부터 점검해 주셔야겠습니다.”
“···아.”
사람들 앞에서 법황에게 반말을 뱉어 대던 성기사 서임 예정자는 급히 사과를 웅얼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렇지만 성하, 이게 지금 말이 되는···! 말이 되는 상황이란 말입니까!”
“말이 되는 상황이면 우리도 엘피에라 경처럼 파격적인 인사 조치까지 취하지는 않습니다. 부디 사도님을 잘 어르고 달래서 이 세계의 상식을 제대로 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하는 아무래도 사도님께 약해서 강하게 말씀을 못 하시니까요.”
그런 거였냐, 하고 엘피에라가 루드비히를 노려보았다.
루드비히는 살짝 한숨을 쉬고 알베르토 사제를 가볍게 노려보았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조금 억울하다. 사도가 심약하니까 맞춰 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눈길을 올려 엘피에라는 마주 노려보았다.
“교육은 상관없지만, 절대로 사도님을 주눅 들게 만들면 안 됩니다. 윽박지르거나 무시하거나 화를 내거나, 그 어떤 방식으로도 사도님이 위축되게 만들지 마세요. 함부로 닦달해서 그분이 초조감이나 부담감을 느끼게 만들지도 마십시오. 지식은 나중에라도 익힐 수 있지만 신뢰는 한번 잃으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사도님이 당신을 믿고 따르도록, 그래서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당신의 지시를 의심 없이 따르도록 하는 게 최우선 순위입니다. 알겠습니까? 신의 사도는 우리 교단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고, 당신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 주신 은인입니다. 그 사실을 단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루드비히는 엘피에라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엘피에라는 신음을 뱉으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알기는 하는데 내가 속이 터진다, 하고 온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자, 자, 이것도 다 어머니께서 부여하시는 시련 아니겠습니까. 엘피에라 경. 마음을 강하게 먹으세요. 어머니께서 이 시기에 당신을 다시 성전으로 불러들이신 이유가 있겠지요. 아무쪼록 사도님을 잘 부탁합니다.”
알베르토가 진심을 담아 위로했다.
“아. 사도님 저기 계신데?”
창가에 기대어 있던 에드윈이 바깥을 보고 말했다. 엘피에라는 그 옆으로 달려가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사도가 작은 꽃다발을 들고 샐비어와 함께 뽀짝뽀짝 뒤뜰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엘피에라는 다시 울컥했지만, 이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눈을 번뜩였다.
“좋아··· 잡는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 오겠어! 우리 신의 사도가 어디 나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순 없다!!”
엘피에라는 팔을 걷어 부쳤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집무실에 짧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결국 인내심이 끊어진 루드비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문으로 다니십시오, 문으로! 대체 나이가 몇입니까!!”
집무실은 3층이었다. 그곳에서 뛰어내렸는데도 엘피에라는 부드러운 잔디밭 위에 무사히 착지했다.
소란을 듣고 놀라서 돌아본 카트리야가 급히 사제복 자락을 잡아 올리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엘피에라가 무서운 속도로 추격했다.
내가 정말로 엘피에라를 쉽게 만나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단 말인가. 착각이다. 착각일 것이다.
루드비히는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의 깊으신 뜻이 뭔가 있겠지··· 있겠지만···. 두통이 밀려왔다.
“···진짜 여전하군요. 엘피에라는···.”
도서관 예산 담당 대주교가 한숨을 내쉬며 예산 집행안 서류를 조용히 내밀었다.
루드비히는 미간을 짚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도서관 복귀하시거든 비브리다 예하께 엘피에라의 예절 교육 시간 좀 늘려 달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알베르토가 웃음을 참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름대로 그리운 풍경이긴 했다. 루드비히와 엘피에라가 십 대일 때, 대성전이 좀 더 붐빌 때는 종종 이런 식으로 고함소리가 오가곤 했었다. 대성전의 기운 넘치는 젊은 사제들은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사고를 치는 입장에서 수습하는 입장으로 바뀐 지금, 루드비히도 심경이 복잡할 것이다.
대주교도 낮게 웃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뭐, 그래도 다른 의미로는 든든하군요. 신학교 후배들 잡아 와서 수업 듣게 만들던 그 솜씨로 사도님께도 상식을 주입해 주겠네요.”
“솔직히 왜 하필 엘피에라인가 싶기도 했습니다만, 성하와 둘이면 균형이 잘 맞을지도···.”
“그렇죠, 성하는 사도님한텐 싫은 소리 못 하시니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아니, 내가 그렇게 사도한테 물렀나? 남들 눈에 뻔할 정도로?
루드비히는 조금 반성했다.
“잡혔네요. ···아, 저 자세는 좀.”
에드윈이 또다시 중얼거렸다. 도서관 예산 집행 서류를 보려던 루드비히는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엘피에라가 사도를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 옆에서 샐비어가 뭔가 잔소리를 하면서 말리고 있다. 사도는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시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화를 낼 기력조차 사라졌다. 루드비히는 조용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날씨가 쓸데없이 화창하다.
어머니께서도 이 광경을 보고 계신 거겠지···. 그리고 그저 지켜만 보시는 거겠지···. 우리 인간의 자유 의지를···.
슬프다.
“예절 교육 시간을 아주··· 아주 많이··· 늘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네 이 녀석! 당장 사도님 내려놓지 못해!!! 그걸 들고 가서 어디에 쓰려는 거냐!!!”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피에라에게 콘라드 추기경이 달려가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이 또한 법황으로서, 모든 신자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이겨내야 하는 시련일 것이다.
“가는 길에 치유소 들러서 콘라드 예하도 저하고 저녁이나 같이 들자고 전해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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